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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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한 작가 심윤경은 『달의 제단(2004)』, 『이현의 연애(2006)』, 『서라벌 사람들(2008)』 등 2년마다 한 편씩 장편소설을 선보이며 이름을 떨쳤다. 그녀의 데뷔작을 읽고 완전 반해버린 나는 『서라벌 사람들』, 『달의 제단』을 거쳐 마지막으로 『이현의 연애』를 읽게 됐다.
그리 많은 작품을 써낸 것도 아니고, 책과 책 사이의 간격이 큰 편도 아니어서 어느 것을 먼저 읽든 상관은 없어 보이지만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이 마지막이었을까? 사실은 제목 탓이다. 적어도 그동안 내가 보아온 심윤경은 시시한 연애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니다. 매 작품마다 남녀간의 사랑이 빠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녀가 하고자하는 주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문짝만하게 '연애'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현의 노래』와 같은 '현(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잖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재경경제부에서 일하는 이현은 어느날 매점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녀는 이현이 여섯 살 때 부모님과 함께 결혼식장에 갔다가 첫눈에 반해버렸던 신부, 그러니까 그의 첫사랑이었다. 여전히 그녀에게서는 살구향이 났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눈부신 외모는 남자들을 매점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어릴적 함께 찍었던 결혼식 사진을 들고 이현을 찾아가자 그녀는 사진 속 신부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 마흔이 넘도록 간직해왔던 첫사랑인데 이번에는 절대 그녀를 놓칠 수 없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 영혼을 기록한단다. 영혼이라면 귀신? 그렇다면 그녀는 무당처럼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것도 아니란다. 그녀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 그러니까 생령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령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찾아오고, 그녀는 생령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생령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단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왕실 혈통의 이생 공. 굳이 그녀가 매점에서 일하지 않아도 될만큼 이생 공은 부유하지만, 영혼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한다. 매점 일을 하느라, 그녀를 끊임없이 찾아오는 영혼을 상대하느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이현이 스폰서가 되어주겠다고 제의한다. 3년 동안 자신과 결혼해서 살아준다면 3년 후에는 그녀가 평생 영혼을 기록하며 살 수 있을만큼의 위자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일명 계약결혼인데, 이건 너무 이현에게 불리한 조건이 아닌가? 사실 이현에게는 세 번의 이혼이라는 화려한 경력이 있다. 그가 굳이 3년이라고 명시한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3년을 넘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나면 이내 상대에게 싫증을 느끼는 그를 솔직하다고 해야할까? 아님 바람둥이라고 해야할까? 흔히 우리가 하는 이야기 중에 결혼하면 남녀간의 사랑은 3년 이상 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 시기가 지나면 그저 자식 바라보며 산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현은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하지 않은가.
그런 이현에게 이생 공은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없을거라며 그를 말린다. 아무리 그래도 이진은 자신의 딸인데 이생 공은 왜 그리도 싫어하는 것일까?

기록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이진,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의 존재감은? 그녀는 단지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기록을 멈출 수 없고, 그녀의 생활은 기록하는 일에 맞춰져 있다. 이현이 그녀의 노트를 찢어버리고, 더이상 기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자신이 미처 다하지 못한 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또다른 자신을 잉태하고, 그 숙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되풀이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진은 그녀의 어머니처럼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이현이 찢어버린 노트에다가 그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노트를 읽고 찢어버린 자신의 배덕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느 '연애'담처럼 달콤하지도 않고, 행복한 결말도 없지만 이야기 자체는 독특하다.

『이현의 연애』는 이현과 이진의 이야기 사이에 '이진의 기록' 네 편이 어우러져 있다. 네 편 중 두 편은 이미 써놓은 것이고, 두 편은 새롭게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의 두 편은 완전히 독립적인 단편처럼 읽혀지지만, 뒤의 두 편은 이진의 기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장편소설로 데뷔한 심윤경은 지금까지 줄곧 장편만 고집해 왔다. 그러나 그녀의 장편들을 읽다보면 어쩌면 다음에는 단편집을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의 제단』에서는 서간의 형태로 살짝 선보였고, 이 작품에서는 '이진의 기록'이라는 이름을 빌려, 그리고 『서라벌 사람들』에서는 연작소설의 형태를 빌려 쓰고 있다.

과연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존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귀신이라고 말하니까 조금 이상하네요.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귀신이라는 이름에는 아무래도 경멸적이거나 적대적인 어감이 섞여 있어요. 귀신보다는 영혼이라고 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요, 영혼이지요. 죽은 사람의 영혼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에요. (p30)  
   

2008/07/20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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