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이름을 올린 그녀는 그 한 권의 소설로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심, 윤, 경이라는 이름 세 글자로도 나는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다. 『달의 제단』은 그녀의 신작 『서라벌 사람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작품이다.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막 제대를 한 상룡이는 손이 귀한 종가의 서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쓰러져가던 종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번도 할아버지를 거역한 일이 없는 상룡이지만 종가의 전통을 잇는 것에는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은 서자이기 때문이다. 상룡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서 근본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해 상룡을 얻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할아버지께 돈을 받고 아버지를 떠났다. 그후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했지만 몇 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행실이 나쁘다는 상룡 어머니의 소문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비록 아버지와 혼인신고까지 했지만 할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서자임에 틀림없다.
이런 고민에 빠진 상룡은 어머니가 하는 초콜릿 가게에서 사 온 초콜릿을 먹고 오랫동안 집안일을 봐주던 달시룻댁의 딸 정실을 쓰러뜨리고 만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랐던 상룡의 깊은 시름이 정실과 몸을 섞은 이후로 사라졌고, 상룡은 더욱 더 정실에게 매달린다. 그런데 멘스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정실의 배가 점점 불러온다. 분명 할아버지는 정실을 인정하지 않을테고, 그렇다면 상룡 자신은? 정실은 자신이 부리는 사람으로 멀쩡한 다리는 한쪽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없는 정체성에 정실까지 더해진다면?
상룡의 고민을 엿보면서 어느새 나는 정실이도 아닌 상룡의 편에 서 있었다. 아니 상룡에게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 가슴 속에도 할아버지와 같은 잣대가 존재하고 있었나보다. 한편 국문학을 전공하는 상룡에게 할아버지는 해석해 달라고 오래전 언찰을 하나 맡긴다. 해석한 언찰을 두고 종가의 전통을 지키려는 할아버지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상룡은 서로 갈등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포항으로 등장인물들은 거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다. 사투리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사투리를 듣고 자라며 사용하고 있는 토박이인 나조차도 막상 문장으로 써내려면 쉽지 않다. 하물며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에게는 오죽했을까. 그런데 문장으로 써내려간 경상도 사투리가 예술이다. 문장을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내어 한번 읽어보라. 문장들이 입 안에 착착 달라붙어 절로 나온다.
게다가 그녀는 우리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그녀의 작품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면 그런 단어들을 메모해 놓는 버릇이 생겼다.
아참, 상룡과 정실의 이야기를 엿보면서 내 머리 속에는 줄기차게 또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데릴사위와 마름의 딸이 등장하는 김유정의 「봄봄」. 상황은 다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그녀는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 버려서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것은 정열보다는 냉정이다. 완전한 옛날식의 정열을 품고 있는 사람은 정실뿐이지 않은가? 상룡은 정열과 냉정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할아버지는 완전히 냉정의 편이다. 상룡의 어머니와 해월당 어머니 모두 냉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지 않는가. 어쩌면 해월당 어머니는 열정을 품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참, 열정의 편이 한 사람 더 있다. 정말 쿨하지 못해 자살한 상룡의 아버지다.
이제 한 작품만 남았다. 다음에 만나볼 『이현의 연애』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그녀를 향한 나의 신뢰가 계속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2008/07/11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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