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엘르』지의 잘나가는 편집장으로 그 누구보다도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뇌졸증이라는 불청객이 갑작스레 찾아와 그를 쓰러뜨렸다. 3주 후, 다행히도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만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 뿐이다. 여전히 그의 머리와 가슴은 자유롭게 활개를 치고 있지만, 꼼짝도 하지 못하는 그의 몸 속에 갇혀 있다. 의식은 정상이지만 마치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즉 '로크트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이 그의 병명이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아무런 말도,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차라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더라면 덜 답답했을텐데. 그의 언어치료사는 이런 답답함을 해소해주기 위해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을 고안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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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해 보이는 이 알파벳 행렬은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철자를 새롭게 배치한 것이다. 가장 자주 쓰이는 E가 제일 앞에 나오고, 가장 적게 쓰이는 W가 마지막이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언어치료사가 ESA...로 된 알파벳 행렬을 순서대로 읊조리면 그가 원하는 글자에서 눈꺼풀을 깜박이면 되는 것이다. 똑같은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가 원하는 단어 혹은 문장을 완성할 수 있다.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을 익힌 그는 자신의 책을 내길 원했다. 여성 편집자 클로드 망디빌이 알파벳을 읊조리면 그가 왼쪽 눈꺼풀을 깜박였고, 그녀는 그 알파벳을 받아 적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루동안 쓸 수 있는 글의 분량은 고작 반쪽.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려 15개월 동안 알파벳을 읊조리고, 눈꺼풀을 깜박여서 바로 이 책 『잠수복과 나비』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실화다. 이 책의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는 자신의 일상을 이런 방법으로 써낸 것이다. 그는 병과 싸워야했지만 특유의 냉소와 유머를 잃지 않았고, 온 힘을 쏟아부어 그것을 표현했다. 만약 이것이 영화나 소설이었더라면 그 주인공은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실화다. 그는 자신의 책이 나온지 1주일 만에 그동안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잠수복을 벗고 나비가 되어 자유로운 세상으로 날아갔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 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막강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p. 174)
 
이 작품은 지난해 줄리앙 슈나벨 감독을 통해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왼쪽 눈꺼풀 밖에 움직일 수 없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답답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비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목조차 돌릴 수 없는 그가 왼쪽 눈으로만 보는 세상은 얼마나 좁고 답답할까. 우리는 잠시 보비의 시선으로 영화만 볼 뿐인데도 이렇게나 답답하고 불편함을 느끼는데, 보비는 그렇게 열 다섯 달을 살아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새삼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8/05/2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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