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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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다 가난하다 해도 어쩌면 그렇게도 가난한지, 세상에! 31쪽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은 1846년에 발표한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가난한 관리인 마까르는 하숙집 부엌 한쪽에 있는 칸막이 방에 거주하고 있다. 이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시끄러운 방이지만, 장점이 있다면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바렌까의 방이 보인다는 것. 먼 친척 사이인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 편지 속에는 자신들과 주변 사람들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17살 때 근무를 시작해서 근속 30년째인 마까르(알렉세예비치 제부쉬낀)는 러시아 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관리의 전형이다. 9등문관인 그는 '각하'의 문서를 정서하고 있지만, 승진은커녕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가난'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의 유일한 낙은 먼 친척 아가씨인 바렌까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는 돈이 생길 때마다 바렌까에게 보내거나 선물을 보냈다. 나이 많은 자신이 바렌까와 함께 있으면 바렌까에게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 봐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은 절대 방문하지 않았는데, 하숙집에서 그만 그 편지가 발각되어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만다.

12세 때 뻬쩨르부르그로 이사 온 바렌까(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척 아주머니인 안나 표도로브나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 집에는 뽀끄로프스끼라는 대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숙비 대신 바렌까와 사촌동생 사샤를 가르쳤다. 바렌까를 늘 어린애 취급했던 뽀끄로프스끼, 바렌까는 그의 생각을 바꾸려면 그가 읽고 있는 책을 자신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렌까 어머니의 병간호와 책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 그러나 갑작스럽게 뽀끄로프스끼가 죽고 만다. 바렌까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안나 표도로브나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샤와 바렌까를 망가뜨리려 하자 바렌까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다.

그러나 이사 온 바렌까의 집으로 비꼬프 씨가 1년 만에 찾아와 지난 일은 모두 안나 표도로브나가 나쁜 마음을 먹고 한 짓임을 알았다며 느닷없이 그녀에게 청혼한다. 놀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 상황(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왜 바렌까는 마까르를 선택하지 않았나?

당신은 제가 쏟아 낸 감정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셨더라고요. 제가 느끼는 감정은 부성애입니다. 순수한 부성애 말입니다,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서러운 고아 신세인 당신에게 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모두 제 진심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혈육의 정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어찌 됐건 저는 당신의 먼 친척입니다.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쨌든 친척은 친척이죠. 게다가 지금의 당신에겐 제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고 보호자 아닙니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배신감과 분노만 느꼈지요. 21~22쪽

비록 마까르가 바렌까보다 나이가 많고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그녀를 아끼는 마음이 크다면 돈만 생각하는 비꼬프 씨 대신 그와 결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바렌까는 마까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마까르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가난'했던 게 아니라 정신적(문학적)으로도 빈곤했던 사람이다. 마까르와 바렌까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었던 것은 정신적(문학적)인 면에서의 간극 탓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바렌까가 사랑(동경) 했던 뽀끄로프스끼는 늘 책을 가까이했고, 뿌쉬낀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반면 마까르는 바렌까가 읽어보라고 한 고골의 「외투」마저 형편없다고 비난하며 저급한 연애 소설만 읽었고, 바렌까에게 쓴 편지의 문장조차 두서없었다. 마까르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편지를 주고받고, 그녀에게 (작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서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늘 마까르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마까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바렌까,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3류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죠.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풍자 작가들은 여기저기 살피고 다니면서 이런 말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 발바닥을 전부 땅에 대고 걷나, 아니면 까치걸음을 하나?> 혹은 <어떤 관청에 다니는 9등 문관 아무개 관리는 신발 밖으로 맨 발가락이 비어져 나왔네. 팔꿈치도 다 해져서 구멍이 났잖아>. 그들은 자기 글에 이런 것을 묘사해 넣고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책이랍시고 찍어 낸단 말입니다…… 129~131쪽

도대체 그런 글은 왜 쓴답니까? 그런 게 왜 필요하대요? 이런 책이 나오면 독자 중 누군가가 외투라도 하나 장만해 준답니까? 새 신발이라도 사준대요? (…) 그런데 이 소설이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죠? 뭐가 잘됐다는 거예요?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생활에서 시시하고 공허한 한 단면만 썼을 뿐이잖아요. 도대체 당신은 이렇게 이런 책을 저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바렌까, 이건 몹쓸 책이에요.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요. 그런 관리는 있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이런 책은 읽고 나서 반드시 불만을 얘기해야 합니다, 바렌까. 정식으로 항의해야 해요. 117~119쪽

고골의 「외투」에 등장하는 관리 '아까끼'와 마까르는 닮았다. 만년 9등 문관으로 정서 업무를 하고 있고, '외투' 하나 사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 아니 아까끼보다 마까르가 더 가난하다. 마까르가 이토록 고골을 비난한 이유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고골의 소설을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 몹쓸 책이라고 비난하면서 현실성이 결여된 연애소설만 읽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걸작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사관학교에 다니면서 학과 공부보다 문학에 더 열중합니다. 틈틈이 프랑스 소설을 읽고 습작을 하던 시기에 쓴 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리고로비치라는 친구에게 읽어주고, 이 친구가 당시 『동시대인』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던 시인 네크라소프에게 보여줍니다. 네크라소프가 다시 그 길로 당시 최고의 비평가인 벨린스키에게 달려가 작품을 보여주자 벨린스키가 격찬을 하죠. 그래서 네크라소프와 벨린스키가 한밤중에 무명의 작가 지망생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와서 "자네가 도대체 무슨 작품을 썼는지 알고나 있나?" 하고 감격해 서로 껴안고 했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두고두고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가장 우쭐했던 시절이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야말로 비존재였는데 당대 최고의 시인과 비평가가 찾아와서 "자네가 쓴 것은 걸작이야"라고 했으니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겠죠.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얼마 못 갑니다. 지나치게 우쭐해서 자신이 대작가라도 된 양 거만하게 행세하는 바람에 벨린스키와 투르게네프가 절도 없는 생활을 비난하고 나설 정도였습니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 19세기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193쪽

문학이란 정말 좋은 것이더군요. 정말 굉장해요. 문학이란 정말 심오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저기…… 아무튼 문학 속에는 그런 다양한 이야기가 씌어 있어요. 정말 훌륭합니다! 문학은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그림 같고 또 거울 같기도 합니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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