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준희(화자)'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 여중, 여고를 다녔던 준희는 또래 여자친구들끼리 서로 사귀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준희는 그 아이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그 아이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거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녀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 한 학년 위의 선배를 좋아했었고, '남자처럼 짧은 머리'의 인희의 사랑을 받기도 했었다.

그 애들은 날마다 반복되는 강도 높은 수험생 생활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연인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서로를 지켜보고, 살뜰하게 챙기고 보살폈다.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인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특별한 관심을 주고, 설렘을 느끼게 해 준다면. 다른 아이들과 구별해 줄 모종의 사연, 로맨스를 선사해 주기만 한다면. 또한 당시 우리의 조건에서는 남자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자 애인이 이 모든 요구를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한지, 다가오는 생일에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도 굳이 내색하고 가를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그로 인한 이득이 욕심나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음속 깉은 곳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신자가 될 수 없는 사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난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럴 수 없는 쪽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46~47쪽

그 시절 아이들이 좋아했던 상대는 또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오빠들(!)의 팬클럽 활동은 물론이고 팬픽까지 직접 써서 돌러보며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마치 그 오빠들이 자신들과 늘 함께하는 것처럼 여겼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친해질 수도 없는 애인이었다.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다들 그런 애인을 한 명씩 갖고 있었다. 한번은 민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오빠가 진짜 그 오빠가 맞을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 우리가 보는 모습은 대중을 상대로 만들어진 거니까. 화려하고 매끈매끈한 표면이니까. 그 이면에 어떤 성격이 감춰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 135쪽

동성애니 레즈비언이니, 학창시절에 소문이 무성했던 아이들도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시절, 그 감정 들을 솔직하게 밝힐 수 없었던 준희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날 느닷없이 찾아온 인희를 보면서, 예전과 달라진게 전혀 없는 인희를 돌려보내고 나서 생각한다.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희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그 애를 비웃었다. 그건 그저 유행이었다고, 그뿐이었다고 못박아 주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집단에서 너는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얻었던 거라고 말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우리 주변에는 진짜 남자들이 있으니 남자 흉내는 그만두라고.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진짜 남자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너의 꼴은 우스꽝스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진다고. 158쪽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 당연히 ─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159쪽

이것은 준희가 살았던 작은 항구 도시에서만 유행했던 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즈음 여중, 여고에서 흔하게 일어나던 일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레즈비언이니 팬픽이니, 이런 용어만 쓰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도 여러 오빠들에게 미친듯이 열광했었고, 키 크고 숏커트 머리를 한 소녀들이 두루두루 인기가 많았었다. 바로 옆에 남중, 남고가 붙어 있었지만 남학생들을 만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늘 높은 담벼락 안에 갇혀 있었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어느덧 버스 막차가 끝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시절 우리 모두가 준희였고, 인희였으며, 민지였을 것이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인희의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땐 다 미쳤었어." 150쪽

나는 남자들을 아주 좋아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 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 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153쪽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82쪽

언젠가 시골 외할머니를 보며 사람이 산골짜기 사이에서 태어나 밭에서 일하다가 그냥 그곳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을 기억해 주나? 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