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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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찾아 떠나는 엔리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오래 전의 우리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7,80년대 가족을 위해 머나먼 사막의 나라로 떠나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모래 위의 건설 현장에서 땀 흘렸던 우리네 아버지들, 우리 자식들에게만은 이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자식들을 맡겨 두고 공장으로 일 나가시던 어머니들,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형, 언니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라우데스의 이야기는 비단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불과 2,30년 전의 우리들의 모습도 그러했었다.


화물 열차의 지붕이나 난간에 매달려 미국으로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전쟁터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전쟁 시절,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엔리케처럼 남쪽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었다. 도중에 열차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가족들이랑 헤어지기도 했다.

사실 총, 칼을 겨누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다. 엔리케는 가난과 전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이야기이지만, 게다가 중국이나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덕분에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인양 느껴졌다.

그러나 작가의 이야기 방식은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원래 기획기사 시리즈로 연재된 이야기인지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엔리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 객관적이어서 읽는 사람도 그렇게 따라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작은 아이를 노리는 독수리를 담은 보도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보도사진은 퓰리처 보도사진상을 받게 되었지만, 이후 사진 기자의 윤리성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실을 알린다는 것, 상당히 중요한 것이지만 가끔은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모습에 거부감을 느낄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점을 더 보태자만 ‘생생한 기록’을 담은 사진이 몇 장 되지 않았다는 점, 그마저도 사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사진 찍기 기술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또 적은 사진의 기록을 텍스트로 만회하려고 해서인지 문장이 자연스럽게 읽혀지지가 않았다.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문멕이 매끄럽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은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내겐 낭만적이고 멋진 기차 여행이 어느 누군가에겐 치열한 생존 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 누군가도 나처럼 그런 멋진 기차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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