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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미학론
이상우 지음 / 시공사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화하미학>이라는 책을 들고 끙끙댔던 생각이 난다. 당시 하일지의 '소설에 있어서의 거리 이론'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가 어딘가에서 잠깐 언급한 <화하미학>을 기억해냈다. 그 때 사서 들기는 했으나 다는 못읽었다. 중국의 미학책은 확실히 기반공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의 미학책들은 그런대로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었는데 유독 <화하미학>은 읽히질 않아서 아직도 숙제처럼 책꽂이에 꽂혀 있다. 그걸 보면 아직도 아득하다. 동양의 미학. 그것은 과연 있었을까?

우리나라 사람,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서 북경대 가서 박사를 받았단다. 그 박사학위논문의 결론부분을 2년 동안 수정 보완한 책이 이것이란다.

읽는 도중에는,

'스스로 많은 질문을 하지만,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지만, 정작 확실한, 저자의 확신이 들어있는 답은 없다. 계단 하나하나가 질문이라면 올라서게 하는 힘이 답일 것이다. 그러나 답이 없고, 결과적으로 계단을 오르지 못해야 맞는데, 에스컬레이터인지, 이 사람, 잘도 끝까지 가고 있다. 도대체 이 계단들을 어떻게 이 사람은 넘어서는 것일까?'

라고 써놓았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그러니까 끝까지 읽고는 다시 이렇게 썼다.

'빈 계단들을 불안해 하면서 넘고 보니 대답의 산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자주, 아니 귀가 닳도록 들었던 것, 그러나 지금의 내 것은 아닌 것을 이 자는 가득 쌓아놓았다. 경청할 만하고 배울 만하다!

일단, 이렇게,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제 속에서 캐낸 답을 내는 사람을 본 것도 오랜만이다.

손쉬운 직관이 아니라, 탈도 쓰지 않고, 탐구와 지성으로 노력한 결과물이 분명하여 나는 끝에 다다라 즐거움을 느낀다.'

'경계'라는 말이 화두처럼 느껴지는 시대이기도 해서 이 책이 다루는 '경계'를 그것과 연관시킬 뻔 했으나, 후훗.. 애저녁에 그런 경계는 아니다. 여기서의 경계란 경지의 다른 말이라고 해도 된다. 벌써부터 좀  뻔해 보이지만. ^^;

밑줄친 부분은 참 많다. 그 중, 지금 딱 열어서 나온 것.

-만일 구할 것이 있고 원하는 바가 있다면, '나'의 마음은 전도된 현상들의 무수한 유희를 만들어낼 것이다. 만일 세상에 복福을 누릴 만큼 누렸음을 알고, 세상의 화禍를 겪을 만큼 겪었음을 알며, 전도된 현상들의 유희를 할만큼 하였음을 깨닫는다면, 바로 '나'의 마음은 여여如如한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 망발하지 않으니 일체의 것이 적적寂寂하고 청정淸淨할 따름이다.

;'경계'를 세 수준으로 가르고 그 세 경계의 다름을 설명하는데 내게 다가오는 것은 '아름답게 살고자 하라'는 것이었다. 노장과 불교를 훑으며 저자는, 자신은 불교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밝힌다.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망발妄發이랜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따지면 그 망발의 부재, 바로 저 여여如如한 무대無待의 경지이니, 내 느끼기로 동양의 미학은 윤리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그야말로 術이기 때문이다.

-전략....뒤샹Duchamp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괴이한 행위같은 것들은 인간과 예술의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이나 미학에서 물어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기네스북Guinness Book과 같은 책에서 거론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인간에 관한 문제이든 예술에 관한 문제이든 의미있는 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을 '나'의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나타내려고 기획되었던 추상예술은, '나'의 합리적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두게 되는 것이므로 그 탄생 자체가 '총체적 미감(; 말 그대로 우리 전존재로서의 미감-shosha)'의 발현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p. 167)

;위험하다, 이 신념은. 이것도 분명 '나'가 아닌가. 그러나 무대無待의 경계를 최고미학으로 삼았다는 측면에서 그는 옳다고 느낀다.

나는 '나'를 중시하나 나의 '자격'에 관한 신념은 없다. 그래서 타자인 '나'를 보며 그 자격을 판단하는 '나'로 하여금 자격을 갖추도록 단련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문제는 도덕적 측면이 된다. '나'를 중시하나 결국 '나'는 '無我'로 가기를 원한다. 그것이 자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키치'가 극복되는 지점이라는 것을 요즘들어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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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술 이해의 길잡이
쓰지 노부오 지음, 이원혜 옮김 / 시공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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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술, 하면 나는 으레 화려한 색채 위에 금분을 입힌 꽉 찬 장식화를 떠올린다. 한 발 더 나가면 일본 귀족들이 가문의 문장으로 쓰던 자연물의 도안들, 더 나가면 기모노의 대담한 무늬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이 책표지의 우키요에를 생각한다. 역시 꽉 찬 그림이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선생님은 빈 화면이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하다못해 흰색 물감이라도 좋으니 다 칠하라고, 빈 화면은 남기면 안된다고. 기껏 8절 도화지 채우는 일도 끔찍한 노동이었다. 지금이라고 안 그러랴. 화면을 다 채우는 일은 지금도 극심한 노동이다.

그 노동의 격심함을 장식욕, 사치욕, 허세욕, 풍류욕으로 극복한 민족의 미술을 엿보려고 든 책이 이 책이다. 독후감을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일본미술이론가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면서 써내려간 책을 읽으며 묘한 느낌이 들었으니, 그것은 일종의 소외감이기도 하다. 그 철저한 자부심, 교묘한 눈가림, 부단한 띄우기, 침소봉대가 읽는 내내 내 속 어딘가를 긁었고 그나마 이렇게라도 바라보는 우리미술이론가를 찾을 수 없을까, 인터넷책방검색기를 들락날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 미술을 좋아한다. 서양의 그것과 비교해 나는 일본의 미술작품 앞에서 더 많이 멈춘다. 대개 그런 그림은 몇 점으로 한정되지만 빈도수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 작품 앞에 서서 오래 바라볼 줄은 알지만 화가나 미술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문외한에 가깝다. 사실 '알면 그 만큼 더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지식의 개입없이 절대미감으로 작품을 대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 되도록이면 작가나 화가, 음악가에 대한 지식을 피해 왔다. 아무래도 그 이유가 이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사실은 지금 몸소 체험 중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이 책도 그 체험의 일부이다. 덕분에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어떤 것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짐작도 생겨났다. 이런 종류의 책읽기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바람부는 가을의 어느 해질녘 겐지는 아카시노 주구와 함께 그녀를 문안했다. 겐지는 고개를 숙이고 무라사키노우에는 얼굴을 소맷자락에 대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보면 볼수록 무상한 바람에 흩날리는 싸리꽃 위의 이슬'이라며 덧없는 자신의 운명에 비유하여 시 한 수를 읊게 되는데.... 화면 왼편에 은니銀泥로 미묘하게 처리한 마당부분의 공간에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싸리, 참억새, 마타리 등 가을풀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가을풀은 하나의 점경點景으로서가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감정, 아니 화면 전체의 감정이 그 속에 배어 들어 있음을 어느 누구라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감정을 당시의 말로 바꾸어 보면 다름아닌 '애틋함(아와래あはれ)'이 된다.-「겐지왕자이야기 두루마리그림」 중 '불법佛法 장면' 해설부분

이 마당 가을풀의 이미지는 시대를 달리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즉 에도 막부 말엽인 1820년경 사카이 호이쓰가 그린 「여름과 가을의 풀그림병풍夏秋草圖屛風」중의 '가을풀'광경이다. 한 차례 부는 바람이 가을풀들을 술렁이게 하고 단풍든 담쟁이덩굴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은박입힌 배경의 미묘한 수묵표현으로 인하여 사생풍으로 그려진 가을풀이 돋보임과 동시에 화면 전체에 서늘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어째 저 '아와래 あはれ' 부분에서 멈췄다. '애틋함'이라. 이렇게 콕 집어내는 것을 읽고 있자면 그림에서 애틋한 음악이 흐르는 것같다. 일본 만화 <음양사>를 읽다 보면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생활사가 한눈에 들어오는데(이 만화는 강추다! 그림도 볼만하고!! ) 저 아와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생각나기도 했다.

어쨌든 내 마음에 든 그림은 사카이 호이쓰의 그림이다. 일본에 가게 된다면 저 병풍을 꼭 한번 구경하고 싶어졌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담쟁이덩굴과 화면 밖으로까지 뻗어나가 보이지 않는 가을풀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역시 만화지만 <후쿠야당의 딸들>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교토라는 곳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집 둘째딸 이름은 아라레, 싸락눈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 걸맞는 과자를 후쿠야당의 장인이 만드는데 그 또한 아라레. 애틋함이라는 아와래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집 둘째딸은 내 기억 중의 하나가 된다. 이름이 참 이쁘지 않은가. 그런 풍취가 있다는 것이 마음을 기울게 한다.

;이 '애틋함'에 대비되는 정서도 있다 한다. 자연의 생동감에 의탁한 적극적 감정의 방출은 역동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특히 꽉 찬 화면으로 나타나는 그림들이 그 예가 된다. 하세가와 도하쿠(1539~1610)의 「소나무와 가을풀 그림松に秋草圖」는 높이 2m나 되는 화면 윗부분까지 참억새, 부용 등이 쭉쭉 뻗어 있다. 화면을 비스듬히 질러간 거대한 소나무가 금색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잎줄기들은 화면의 양 상단부를 덮고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화면은 꽉 차있다. '화면을 벗어나 공중 속으로 계속 그려가는 듯한' 이 구성 감각은 쾌활하게 상대에게 열려진 심정이 화면에 개입된 것이라 하는데 이런 마음을 '명랑함をかし'라 한다 한다. 확실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바깥으로 확장되는 화면을 느낄 수 있는데 이전통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유명한 판화연작인「후지산의 삼십육 경치富嶽三十六景」가운데 유명한 '가나가와의 파도'(1831)와 닿아 있다고. 꽉 찬 화면이 좀 답답해 보인다면 화면 바깥을 보면 된다는 얘기겠다. 사실 호쿠사이의 저 부악삼십육경은 참 보기 좋다. 보고만 있어도 그 거친 파도의 감각이 충분히 전해진다. 그 감각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히 있는 화면 바깥의 거친 바다가 들어 있다. 이들의 꽉 찬 화면에서 '명랑함をかし'를 느껴나 보자, 앞으로...

흑백도판으로 본 하세가와 도하쿠의 금색 구름도 꼭 보고 싶다.

;일본미술책을 읽으며 오히려 만화 생각을 더 많이 하게된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도판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화에 지나지 않는 그림들을 올려 놓고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이도 느꼈으며, 그래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하기도 했다. 일본을 간과하지는 않지만 그네들 말을 그대로 듣고 끄덕거려주고 싶지도 않은 내 심사는 결국 우리 그림 이해의 숙제를 남겼다.

덤!

음양사(오카노 레이코 작 ~13권, 미완)

비록 5등신으로 보이는 인물체이기는 하나 그림 좋고 내용 좋다. 영화 <음양사>도 나왔거니와 물론 그 주인공 아베노 세이메이가 여기서도 주인공이다. 이 만화를 보고나서 영화를 보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영화보다 아마 백배는 낫지 싶다. 영화는 아직 안 봤다. 얼핏 영화장면을 보았는데 세이메이가 세이메이가 아니어서 지금 볼까 말까 하고 있다.

옴니버스라서 천천히 읽는 맛을 볼 수 있고 주변 인물들과 배경이 실사에 못지 않다. 고증이 잘된 작품이랜다. 구비해놓고 싶은 작품이다. 헤이안 시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좋은 일본사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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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초
요시다 겐코 지음, 채혜숙 옮김 / 바다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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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출판사.

여기서 나온 책들은 인상깊은 것들이 많다. <블루데이북>이 그렇고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들이 그렇고 <박무직의 만화공작소>들이 그렇고 가깝게 <시평>이라는 계간시잡지가 그렇다. 하긴 <시평>이라는 잡지는 나를 시로 이끈 주범이다. 그 하얀 책표지와 명조체의 제목. 매호마다 달라지는 작은 사각형의 색깔. 지금 <시평>은 시평사가 출간하지만 처음엔 바다출판사의 책이었고 그 안에 <도연초>광고가 실려 있었다. 인상적인 제목이지만 도무지 내용을 추측할 수 없는 일본 중의 수상집. 두 달 동안 천천히, 무료할 때 하나씩 하나씩 읽어나갔다.

-봄날의 그림(제43단):

부드럽고 따사로움을 주는 어느 화창한 봄날, 그리 허름하게 보이지 않는 한 채의 집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나무들도 세월의 흐름을 담고 있었으며 정원에 떨어져 있는 꽃잎들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던 차에 문이 열려 있어 집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다. 사랑채의 남향에 있는 미닫이는 모두 닫혀 있어 적적한 느낌이 들었으나 동쪽의 여닫이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 앞에 엉성하게 쳐진 발 사이로 엿보았더니 스무 살 정도의 고상한 한 매력 있는 젊은이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열려 있는 집에 대한 향수가 이 글에서 멈추게 했을 것이다. 상호간의 위협이 없는 세계가 빚어내고 있는 봄날의 그림. 겐코는 이런 그림 속의 젊은이에게 자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가며 찾아낼 수 있었다. 일본의 역사만화물을 보자면 저런 젊은이가 책을 읽고 있는 집 안을 흔히 보는데 이런 정경은 나름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종의 매혹이 아니었을까. 젊음과 고요함과 독서가 함께 하는 풍경의 매혹. 좀 고답적이기도 해서 지금도 충분히 매혹적으로 보인다.

유난히 사람에 관한 글들이 많다. 보기 흉한 사람, 보기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비천한 사람, 중후한 사람과 경박한 사람 등등. 글의 대개는 너무 상식적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이렇듯 사람을 묘사하는 글은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우아한 여인(제 32단):

음력 9월 스무날 경 어느 분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새벽까지 달을 벗삼아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불현듯 생각이 난 듯 어느 집 앞에 멈추어 서서 집안의 동정을 살피게 한 후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뜰에는 이슬이 흠뻑 내려 있었고 은근한 향내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티끌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 있는 모습에 깊은 정취를 느꼈다.

잠시 후 그 분은 그 집을 나왔는데 나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인마저도 우아하게 느껴져 그늘에서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손님이 나간 뒤에도 여닫이문을 조금 열어 둔 채 달을 감상하고 있는 듯했다. 방문객이 나간 다음 곧바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면 실망을 했을 텐데, 이러한 여인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평상시의 마음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내심 감탄을 했다. 여인은 손님이 가고 난 후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그 여인은 얼마가지 않아 곧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훗, 역시 은근하다. 읽으며 끄덕끄덕.. 우아해서나 깊은 정취에서가 아니라, bye하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친구들을 뒤에 남아 바라보면서 느꼈던 말도 안되는 배신감이 떠올라서다. 일부러 집에 갈 때는 친구들과 미리 헤어져 혼자 정류장에 닿았다. 버스를 태우고, 혹은 먼저 버스에서 내려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이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더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바라보고 싶으면 바라보고 그 바라보는 일을 완벽하게 잊어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덕분에 그 서운함은 내 손 안에 들어왔다.

;그 호젓한 느낌은 언제라도 생각날 것이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고 쓸쓸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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