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초
요시다 겐코 지음, 채혜숙 옮김 / 바다출판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바다출판사.

여기서 나온 책들은 인상깊은 것들이 많다. <블루데이북>이 그렇고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들이 그렇고 <박무직의 만화공작소>들이 그렇고 가깝게 <시평>이라는 계간시잡지가 그렇다. 하긴 <시평>이라는 잡지는 나를 시로 이끈 주범이다. 그 하얀 책표지와 명조체의 제목. 매호마다 달라지는 작은 사각형의 색깔. 지금 <시평>은 시평사가 출간하지만 처음엔 바다출판사의 책이었고 그 안에 <도연초>광고가 실려 있었다. 인상적인 제목이지만 도무지 내용을 추측할 수 없는 일본 중의 수상집. 두 달 동안 천천히, 무료할 때 하나씩 하나씩 읽어나갔다.

-봄날의 그림(제43단):

부드럽고 따사로움을 주는 어느 화창한 봄날, 그리 허름하게 보이지 않는 한 채의 집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나무들도 세월의 흐름을 담고 있었으며 정원에 떨어져 있는 꽃잎들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던 차에 문이 열려 있어 집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다. 사랑채의 남향에 있는 미닫이는 모두 닫혀 있어 적적한 느낌이 들었으나 동쪽의 여닫이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 앞에 엉성하게 쳐진 발 사이로 엿보았더니 스무 살 정도의 고상한 한 매력 있는 젊은이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열려 있는 집에 대한 향수가 이 글에서 멈추게 했을 것이다. 상호간의 위협이 없는 세계가 빚어내고 있는 봄날의 그림. 겐코는 이런 그림 속의 젊은이에게 자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가며 찾아낼 수 있었다. 일본의 역사만화물을 보자면 저런 젊은이가 책을 읽고 있는 집 안을 흔히 보는데 이런 정경은 나름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종의 매혹이 아니었을까. 젊음과 고요함과 독서가 함께 하는 풍경의 매혹. 좀 고답적이기도 해서 지금도 충분히 매혹적으로 보인다.

유난히 사람에 관한 글들이 많다. 보기 흉한 사람, 보기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비천한 사람, 중후한 사람과 경박한 사람 등등. 글의 대개는 너무 상식적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이렇듯 사람을 묘사하는 글은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우아한 여인(제 32단):

음력 9월 스무날 경 어느 분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새벽까지 달을 벗삼아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불현듯 생각이 난 듯 어느 집 앞에 멈추어 서서 집안의 동정을 살피게 한 후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뜰에는 이슬이 흠뻑 내려 있었고 은근한 향내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티끌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 있는 모습에 깊은 정취를 느꼈다.

잠시 후 그 분은 그 집을 나왔는데 나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인마저도 우아하게 느껴져 그늘에서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손님이 나간 뒤에도 여닫이문을 조금 열어 둔 채 달을 감상하고 있는 듯했다. 방문객이 나간 다음 곧바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면 실망을 했을 텐데, 이러한 여인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평상시의 마음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내심 감탄을 했다. 여인은 손님이 가고 난 후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그 여인은 얼마가지 않아 곧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훗, 역시 은근하다. 읽으며 끄덕끄덕.. 우아해서나 깊은 정취에서가 아니라, bye하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친구들을 뒤에 남아 바라보면서 느꼈던 말도 안되는 배신감이 떠올라서다. 일부러 집에 갈 때는 친구들과 미리 헤어져 혼자 정류장에 닿았다. 버스를 태우고, 혹은 먼저 버스에서 내려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이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더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바라보고 싶으면 바라보고 그 바라보는 일을 완벽하게 잊어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덕분에 그 서운함은 내 손 안에 들어왔다.

;그 호젓한 느낌은 언제라도 생각날 것이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고 쓸쓸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