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으로 올라가니(행1:12-14절)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좋은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지닌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교인들이 꽉꽉 찰지라도 예배 행위를 뺀 나머지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비록 교인 수가 적을망정 모든 교인들이 생명력을 지닌 채,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산다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통해 이 사회를 새롭게 하시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지니신 채 구름에 안겨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휘황찬란하게 변한 주님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천사는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일러 주었습니다. 그 일은 성경 속 비유적인 해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역사로 다가올 것을 약속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하필 두 천사는 제자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만큼 주님과 함께 3년동안 동고동락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승천의 장면을 직접 바라본 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은연 중에 자기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것마냥 자기 교만과 자기 아집에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경계하도록, 자신들의 근본된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러 줬던 것입니다. 그만큼
갈릴리 출생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겸손하게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본문 12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은 감람나무, 다시 말해 올리브 나무가 많은 감람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승천하신 주님을 보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확신한 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전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세상 사람들을 도피하여 산 속에서 신선노름 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자신들이 두 발로 딛고 살아야 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은 그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어디에 모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소위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기도모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모임으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은 성령님의 임재를 바라는 낮고 낮은 심령을 지닌 ‘갈릴리 사람들의 모임’(행1:11, 행2:7)이었습니다. 그 모임은 자신들의 욕망이나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사교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임은 연약하고 볼품없는 자신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가 그 땅에 흘러 퍼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임이었습니다.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임이었기에, 오순절 날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재 하셨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그들의 모임 장소를 ‘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다락방’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페룬’(hypeeron)은 그 집의 가장 높은 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을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칭합니다. 그 집 주인의 이름이 마가라고 하기 때문에 붙인 호칭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처럼 그 집을 마가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는 그 집을 가리켜서‘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유인 즉 주님을 위해 그 집을 내어 놓은 사람은 마가가 아니라, 마가의 어머니였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관습상 여자의 이름보다는 남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관례였기에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들의 기도모임을 1층 접견실이 아닌 2층 다락방에 두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고층 빌딩과 같은 집은 짓지는 않았습니다. 단층집이거나 높아야 2층이었습니다. 1층은 남자들이 기거하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삼았고, 2층은 여인들이 머물며 일하는 공간(the highest part of the house, the upper rooms or story where the women resided)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120명 정도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1층 접견실에서 모여야 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은 그 모임 장소를 1층이라 하지 않고 2층‘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2층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머물던 장소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뗄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락방과 관련하여, 신약시대보다 앞선 구약 시대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된 생생한 역사를 증언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은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이란 동네에서 행한 일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 동네에 갔을 때에 그는 한 여인의 집 다락방에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집 주인의 어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자신이 기거하던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그 다락방의 침상에 아이를 누인 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줄 것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 아이는 살아나게 됩니다. 바로 그 집의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후계자였던 엘리사 역시 그와 동일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이란 동네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한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다락방을 지었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게 됩니다. 본래 그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후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안고, 아들의 시신을 엘리사가 기거하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돌아 온 엘리사의 기도로 인해 그 아이가 다락방에서 살아납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다락방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신 자가 있다면 그곳은 죽음과 절망의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의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 장소가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진리의 말씀을 유훈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 당신 자신의 몸을 보여주시면서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그렇듯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받들어 그곳 마가의 다락방에서,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르밧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과 수넴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머잖아 그곳 마가의 다락방은 오순절 날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곳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는 생생한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마가의 다락방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의 모임이 무엇을 위한 모임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위한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교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는 모임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이는 장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곳이 크고 화려한 공간이든, 비좁고 볼품없는 장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1층이든, 아니면 마가의 다락방처럼 2층이든, 그도 아니면 지하나 3층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는 모임의 장소가 어떤 곳이든지 간에,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나누고 받드는 통로가 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공간에만 임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심령이 낮고 낮은 자들을 통해서만, 그 마음이 비고 비인 자들을 통해서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모임을 갖든, 우리 마음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모인다면, 그곳이 바로 오늘의 마가의 다락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존 번연은 자신이 쓴 《천로역정》 중 목동의 노래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는 쓰러질 염려가 없고,

낮은 자는 교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나니

겸손하자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이곳을 낮고 낮은 마음으로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으로 삼으십시다. 진정으로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십시다. 아니 우리가 거하는 그 어떤 곳이든 그곳을 마가의 다락방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때에 진리와 생명 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 하시사,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는 생명의 참된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교회가 참된 마가의 다락방이 되길 원합니다.

그 옛날 사르밧 과부의 다락방처럼,

수넴 여인의 다락방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보는

참된 심령의 소유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좇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곳들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는

이 시대의 마가의 다락방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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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사민+복지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10년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집권기였다. 흔히 우리사회에서 좌파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과연 그 시절이 진정으로 좌파의 집권기였을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하는 듯 보였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받들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쳐왔다. 자본시장 개방은 더욱 가속화시켰고, 금융기관들이 대형화하고 겸업화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었으며, 한미 FTA 체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복지 혜택도 보편적인 복지가 아니라 선별적인 복지에 그칠 뿐이었다.

그로 인해 닥쳐온 위기는 무엇인가?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청년들이 대학문턱을 쉽게 넘나들지만 대학이 취업교실로 전락하였고, 대량실업의 위기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물질만능 풍조가 온 사회를 휩쓸고, 한탕주의와 각종 투기가 극성을 부리고, 양극화는 극대화되고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전혀 좌파가 아닌 지난 10년의 정책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시민+복지 기획위원회에서는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을 통해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대안을 찾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실현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 자본주의 새로운 위기 국면의 전개에 따라 한국의 국민 경제 역시 새로운 위기 국면에 빠져들고 있으며, 이 위기는 한국 자본주의로 하여금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적 사회-경제 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10쪽)

현재 이명박 정부는 세금을 인하하여 기업투자와 고용증대를 늘리고, 가계 소비를 활성화시킬 정책을 찾고 있다. 복지예산보다는 토지개발과 신성장동력 에너지 개발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그래서 이전의 정부를 좌파라고 차별화하고 있지만 사회․경제 부분에서는 이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노선을 걷고 있다. 물론 양극화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핀마저도 빼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차이가 있긴 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좌파사회는 무엇인가?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실현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는 차별화된 것이다. 이른바 영․미식 국민의 선별적 복지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스웨덴과 같은 국민의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부유한 자산 계층의 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하여 제 3자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사유재산권 침해로 여기는 지상자유자들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다. 사유재산이 있든 없든, 많든 적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활동하며 혜택을 받도록 하는 사회다.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틀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다. 

물론 세수확보가 관건이다. 이 책에서는 국방비와 일반 차인 등 안보 관련 예산과 경제사업 관련의 예산 비중을 줄여 그 부분을 복지예산으로 돌리고, 개인 소득세의 누진율을 도입하되 지금처럼 8,800만 원 이상의 종합 개인 소득세에 대해 일률적으로 35%의 세율을 적용하는 것을 더욱 세분화할 필요가 있음도 제기한다. 

그렇다면 일반 영세사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전에는 연매출 4,800만 원 이하의 영세사업자들에게는 간이영수증만 주고받도록 했다. 그렇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세금계산서를 주고받도록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재 미국 발 경제금융 위기로 우리나라까지 혼란에 휩쌓여 있다. 이는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이야기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진정한 좌파는 선별적 기업 금융의 특혜와 선별적인 국민 복지혜택으로 인한 양극화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경제 전 분야에서 국민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우리나라가 더 늦기 전에, 자유민주주의 정책의 아류와도 같은 신자유주 열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침몰하기 직전에, 하루 빨리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대안 삼아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발돋움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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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
존 프란시스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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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오체투지(五體投地) 중이다. 나이든 두 성직자가 땅에 엎드리면 몸에서 고통이 묻어나고,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베어 나올 것이다. 그런 뒤 마음속으로 열을 세고 일어나면 등은 그만큼 들썩 거리고, 온 몸은 가눌 수 없이 힘에 겨울 것이다. 
 
두 분이 그토록 온 몸으로 땅을 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함일까? 아니면 이명박 정부를 질타하기 위함일까?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근본적인 것은  그게 아니다. 돈이면 최고라는 경제적 물신주의에 흠뻑 젖어 사는 우리 사회, 곧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기 위함에서다.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도 그와 비슷한 흐름을 담고 있다. 1971년 금문교 밑에서 유조선 두 척이 충돌했다. 애리조나 스탠더드 호와 오리건 스탠더드 호다. 그 일로 기름은 샌프란시스코 만까지 퍼져갔다. 그때 지독한 가스 냄새로 사람들은 두통과 복통을 호소했다. 청년 여섯 명은 스탠더드 오일 본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펼쳤다. 


프란시스는 그들의 분노를 바로 눈 앞에서 목격했다. 그때 그에게 밀려든 고민은 그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피해 주민들이 보상을 받고, 기름으로 뒤덮인 해변을 닦는 것으로 그치는, 그 이상의 뭔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22년간을 걸어 다녔고, 17년간은 말없이 지냈다. 도보와 침묵 순례를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더 귀히 여기는 사회가 되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추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준다. 내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침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히 내가 입을 다물 때 생기는 말의 부재가 아니다. 침묵은 총체적이면서 독립적인 현상으로, 외적인 요소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83쪽)

물론 도보와 침묵 여행 중에서도 그는 대학 공부를 마쳤고, 석사학위와 토지자원 분야에서도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처음 도보와 침묵 여행을 할 때만 해도 부모는 물론이요, 동료들과 지역 언론까지도 반대와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에 소홀함이 없을 때 그에게 등을 돌렸던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고, 그의 도보와 침묵에 동행하는 이들도 늘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신의 눈높이대로 행동한다. 그가 무엇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그의 발걸음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미 우리사회는 경제적 물신이라는 마약에 모든 눈길이 쏠려 있다. 이명박 정부는 나름대로 그것을 구색에 맞춰 요리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마약은 중독이 되면 될수록 그 발걸음조차 가누기 힘들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한다.

아무쪼록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있게 각인시킨 젊은 프란시스의 묵언과 도보 여행기를 통해 나이든 두 성직자의 오체투지 순례를 한 번쯤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이정표도 그려보고, 나름대로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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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행1:8-1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이끌고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예수님의 의도를 알기 위함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죄가 있음을 알았기에 돌을 놔두고 돌아갔습니다.(요8:1-11)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적 속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두 가지 모순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간음이란 남자나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자는 아무런 까닭 없이 보내고 여인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엔 불륜을 저지른 여자만 처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자의 불륜에 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고, 여자의 불륜에 대해서는 한없이 심판적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중인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두 번째 모순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간음 자체의 행위에만 무게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본래의 마음입니다. 이른바 궁수의 화살이 과녁을 맞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정조준 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죄를 범했다는 것은 간음 자체의 현장보다 그녀의 그릇된 마음 상태가 이미 죄를 범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들 모두도 숙연해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죄 된 마음의 상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준수하는 것도 크나큰 모순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성경 말씀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고난을 알리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7:14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빈민들이 사는 갈릴리 동네에서 사역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실 때에는 십자가에서 대못이 박힌 채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 모든 말씀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행전의 오늘 말씀은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이제 곧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성령의 능력으로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예언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구름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너무나도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주님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여기서 주님을 위해, 모세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고 사시지요?” 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완전 신선처럼 용모가 변한 주님을 보고서, 도무지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아예 산 속에서 장막 셋을 짓고 편안하게 신선노름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꼭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의 힘을 입어,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으로 사명을 다해야 했지만,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만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흰 옷 입은 두 사람은 다음 구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제자들이 하늘 본향의 보좌로 올라가시는 그 장면에만 집착하고 있을 때에,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너희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본향의 보좌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하늘로 간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이 땅에 재림할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초림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야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야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병듦과 탄식을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말 구유에 태어나지 않고 왕실의 보금자리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갈릴리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을 상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과도 관계를 가졌고, 세리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 먹고 마셨고, 유대의 고위직 관인인 니고데모와도 진리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듯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를 망라하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그 초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과 진리를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든 모든 직업은 신성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로서 섬기는 직업만이 신성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그 직업과 일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 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 선교지가 때로는 가정이 될 수 있고, 일터가 될 수 있고, 직장이 될 수 있고,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정과 일터와 직장과 학교를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며 사는지는 중요합니다. 우리에 주어진 세상의 일을 오직 주님의 증인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주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진리와 생명으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라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지는 않습니다. 오직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신 문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물론 그 날과 그 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도 모르고, 성령님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아신다(마24:36)고 말씀합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성으로 입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의 본향인 천국이 그곳입니다.

요즘 들어 자칭 재림주라고 떠드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제주나 재림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결코 구세주도, 그리고 재림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미 마리아의 몸 속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만이 이 땅에 재림의 주로 하늘에서부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 그 누구도 재림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림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 하나님도 알 수 없는 노릇이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며 신실하게 사는 자라면, 하나님인 영역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실한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를 하고 있는데, 그 당부는 곧 이 시대를 향한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씀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하나님의 뜻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역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매일같이 가지 삶으로 증인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자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삶에서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굳이 그가 재림의 때를 알려고 하지 않더라도, 재림의 날에 자연스럽게 초청을 받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문자 그대로 사실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스스로 구세주나 재림주라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누가 재림의 때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어머니의 배속을 통해 태어난 자들은 결코 구세주도, 그리고 재림주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단 사설에 현혹되어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가정과 자식들을 내 팽개치고 그 삶을 탕진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도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재림이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 육신의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 살기를 바라는 이단, 사이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기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 있는 날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신성하게 여기십시다. 내게 주어진 세상의 일을 통해 욕망과 쾌락을 좇기보다 오직 땅끝의 증인으로 사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십시다. 그때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우리의 코끝에 있는 호흡을 앗아가신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코 끝에 있는 호흡이 멈추는 그 날은 우리가 소망하던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그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재림은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자칭 구세주로, 스스로 재림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신화와 꼬임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로삼아 진리와 생명을 분별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일을 통해 참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재림하실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며, 기대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재림 하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온 교우들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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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 8월 15일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교회를 창립한지 2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아이들 셋과 청년 한 명, 그리고 어른 한 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던 때였다.

그 무렵 어느날 아침, 중년 한 분이 교회에 상담 요청을 하러 왔다. 2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술술 풀어 놓았다. 물론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그 분은 남다른 유머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다 쏟아놓은 다음, 끝머리에 들어 오십견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우리 부부는 그 분이 떠난 자리에 앉아 그 분을 위해 정성스레 기도했다. 그로부터 한 주간이 지났을 때 그분이 사는 집을 찾아나섰다. 우리 부부가 집에 들어섰을 때, 그 분은 너무나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이야기를 또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아내는 그분을 모시고 신경외과에 다녀왔다. 아픈 어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동행해 준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난 바로 그날 아침, 아내는 그 분을 위해 끓인 호박죽을 가지고 길을 건너는데 그만 차에 치인 것이다. 그날 사고로 얼굴은 퉁퉁 부었고, 왼쪽 다리가 분쇄골절을, 오른쪽 발목은 금이 갔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로부터 한달이 넘은 지금 아내의 얼굴은 차츰 붓기가 빠지면서 제자리를 찾았다. 분쇄골절 부위도 수술을 해 안정을 취하고 있고, 금이 간 발목은 석고보드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면 무척이나 안쓰럽고 딱할 뿐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Easy com, Easy go."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것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는 그 분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제 몸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그 분도 본의 아니게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쉽게 얻으려는 자세로 매사를 조급하게 밀어붙이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급히 먹는 것은 무엇이든지 체하는 속성이 있지 않던가. 일도, 사랑도, 그리고 사람도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어렵더라도 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한걸음씩 헤쳐 나가는 자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분명 귀한 것을 얻을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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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19-12-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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