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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 임의진 참수필집
임의진 지음, 이동진 그림 / 이레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녘 강진의 흙집에서 들려오는 '참 종소리'
"대봉 형님 으름장에 김이 폴폴 나는 돼지머리 누른 고기를 일동 확보해 놓고서야 만 원짜리 지폐를, 칼만 안 들었다 뿐인 노상 강도에게 아까워하며 바쳤다. 기복신앙이 어쩌고 하면서 욕을 퍼붓고 다니는 나인데 교회도 다니지 않는 인호네가 하도 떼를 쓰며 졸라대는 통에 그 날 무사고 기원제의 개회 기도까지 해 주었지 않았던가."
이 글은 남녘 마을 강진에 사는 임의진 목사의 두 번째 참 수필집인 《종소리》(이레·2001)에 실려 있는 '고구마에 동치미'라는 꼭지 중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임의진은 시인이요, 동화작가요, 민중운동가요, 화가에다, 최근엔 〈산〉이라는 일철스님 헌정음반까지 낸 목사다.
그토록 팔방미인 재주를 지닌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달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도닦는 도사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목사라고 해서 교회 안에만 갇혀 지내지도 않고 종교인으로서 금기시할 수 있는 세상사에 대해서도 마음껏 끼어 들고 휘젓고 다니며 옳은 소리만을 곧잘 해 댄다. 그래서 싫지 않는 살 가운 목사이다.
지금 그는 조그마한 종이 세워져 있는 남녘교회에서 고향 동네 사람들과 벗삼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있고 강진 들녘에 작은 텃밭을 일구며 세상사 느릿느릿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엔 교회 앞에 세워져 있는 종의 추가 삭아 부러지는 바람에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던가 보다. 그래서 곧장 철공소 진택씨가 종 추를 구하여 가지고 와서, 종탑에 올라가 새로 갈아 끼우게 돼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예전 서울 살이 할 때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들었던 그 종소리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서울 살 때, 고궁의 낙엽이 밟히던 광화문 언저리의 성공회 성당 나무의자에 앉아서 들었던 종소리, 약자들의 농성장을 찾았다가 명동의 성모상 앞에서 비둘기랑 들었던 종소리, 한참 방랑벽에 휘둘려 전국 명산고찰의 숲진 뜨락을 산보하고 다니던 시절 들었던 절 집의 중후한 종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종소리들이다."(p.37, '종지기' 중에서)
농촌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만들었다던 어느 해의 달력에는 그런 달 이름들도 적어 넣고 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재미나고 신나는 달 이름들이 아닌가 싶다.
"1월은 새벽별달(엄마는 새벽밥을 차립니다. 아빠는 새벽별을 보고 일하러 나가십니다)
2월은 고드름달(동네 친구들이랑 처마 밑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 고드름을 땄습니다)
3월은 꽃뜨락달(꽃이 피었습니다. 겨울에 태어난 강아지들이 꽃밭에 나와 재롱을 피웁니다)
4월은 안개숲달(안개가 자욱한 숲에서 큰오빠하고 새언니가 뽀뽀를 했습니다 나는 봤지롱)
5월은 나들이달(이모가 낼모레 동물원 구경을 시켜준다고 그랬습니다. 야호 야호.)
...
12월은 함박눈달(아침 내내 형이랑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
(p.104, '달이름' 중에서)
그 뿐만이 아니다. 그가 인도하는 예배도 특별한 듯 싶다. 우리 가락 우리 것을 존중하고 높이 세우려는 그런 참다운 의식이 뚜렷해 보였다.
"작년 칠석에는 우리 교회 입당송인 〈직녀에게〉작곡가 박문옥 님을 노래 손님으로, 지금은 북으로 올라가 살고 계시는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특별 손님으로, 관옥 이현주 목사님을 말씀 손님으로 모셨다. 올해 칠석에는 〈이등병의 편지〉 작곡가 김현성 님을 노래 손님으로, 무주에서 농사를 배우며 글을 쓰고 있는 한상봉 이시도르님을 말씀 손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소리로, 멋들어진 춤으로 남도의 벗들은 우리 국악의 멋을 한껏 뽐낼 것이다. 동네 분들도 교회에서 내는 동동주 맛을 보려고 찾아오실 것이다."(p.146, '상사화' 중에서)
아호가 '어깨춤'인 임의진 목사. 그는 자신이 기거하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또 글을 쓰고 있는 집 이름을 '선무당(仙舞堂)'이라고 이름한다. 그런 이름을 붙인 까닭은 아마도 그의 아호에 걸맞게 신선처럼 어깨춤을 추며 살고 싶은 생각에, '착한 무당'(善巫堂)(?)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이름 짓지 않았나 싶다.
"내 흙방 이름을 선무당이라 했던가. 가끔 욕도 할 줄 아는 땡목사요 돌팔이 목사인 나는 사람 잡는 선무당이 아니겠는가. 선무당에 걸맞게 사는 집 당호조차 선무당이니 기가 막힌 이름 궁합이렷다."(p.210, '선무당' 중에서)
남녘 땅 강진의 선무당이란 흙집에 사는 임의진 목사.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해 지길 바라면서 그런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고 있다.
"종교를 뛰어넘어 그 상냥한 밀어에
가슴마다 허물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확성기로 고막 터지게 틀어놓은 찬송가 차임벨도 아니고
예배시간을 알리는 교인들만의 종소리도 아니고
일손 놓고 그만 집에 돌아가 밥지어 드시라고 알리는
자상한 종소리,
공사판으로 바쁜 걸음인 일당벌이 인생들을 담고 두 손을 모은
새벽 종소리,
노느라 정신 없던 막내의 흙 묻은 손바닥을 털게 하는
엄마 목소리인 종소리,
논두렁을 걸어오던 주름살 깊은 농부는 좋은 세상을 기도하고
공장을 나온 누나는 고향집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겁고
사랑하는 사이들은 잡고 있던 손을 더욱 세게 쥐겠지
그대 귀에 시방 이 종소리가 들려오는가."(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