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크랩의 파파 기도 - 전에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기도
래리 크랩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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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영적인 호흡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얼레고 달래서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좇아 세상을 살아갈 힘을 구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실현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함축돼 있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물론 어린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미신처럼 숭배한다. 기도도 그 수준에 머물러 하나님께 간청만 하고 끝내버린다. 온통 자기 욕구를 아뢴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응답을 받으면 기뻐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면 못내 씁쓸해 한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한다. 그만큼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그로 인해 A를 구했을 때 A나 B나 C를 응답받아도, 또는 무응답을 받아도 감사하며 산다.

제자 하나가 기도에 관한 책을 보내왔다. 전주태평교회 시절의 중고등부 제자였는데 지금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섬기는 선생이다. 그가 보내 온 책은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였다. '파파'라고 하니 언뜻 생각하기를 '아빠'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아버지를 향한 기도가 파파 기도요, 무언가를 간청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기도인 까닭이다.

"파파 기도는 내 영혼에 하나님이 기쁘게 채워 주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며, 나의 내면 세계에 잔뜩 쌓아 놓은 쓰레기를 청소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분의 진실(reality)로 나를 채우시게 하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부어 주신 거룩한 에너지와 지혜로써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도 파파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40쪽)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란 나를 비우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이루고픈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나를 내어 놓는 일이다. 그때 그 분이 내 속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그 힘과 지혜로 수평적인 삶도 잘 엮어나갈 수 있다. 이른바 '십자가의 도'를 이루는 기도가 그것이다. 크랩은 그와 같은 파파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을 네 단계로 제시한다.

"P: 자신을 꾸밈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라(Present).

A: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의주시하라(Attend).

P: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 놓으라(Purge).

A: 하나님을 당신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라(Approach)." (109쪽)

이 책 뒤쪽에서 크랩은 4분짜리 파파 기도를 실제적으로 소개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도할 수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게 기반이 되면 매 순간순간 파파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사항은 그것이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위에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1순위'로 올려드리는 기도여야 함을 강조한다.

사실 신앙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여러 이미지를 품고 있다. 바쁜 왕, 시계공, 자동판매기, 근엄한 아버지, 또는 잔인한 폭군과 같은 여러 유형들 말이다. 이른바 하나님은 세계 70억명을 다 둘러봐야 하는 바쁜 왕이거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뒤 잘 굴러가는지 지켜보는 시계공이거나, 뭔가 요구하면 뚝딱 쏟아줏는 분, 혹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아버지, 어렸을 때 받은 상처 속에 각인돼 있는 잔인한 군주 등이 그 모습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와 같은 유형들 외에 몇 가지 모습을 더 제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친근한 아버지, 다시 말해 모든 것에 부족함 없으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것 말이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이제부터라도 자동판매기를 연상하는 기도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과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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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라는 이름의 외계인 - 소통하지 못하는 십대와 부모를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김영아 지음 / 라이스메이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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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자살이 늘고 있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학원폭력이 가장 큰 이유로 떠오른다.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삥을 뜯기고, 과제물도 대신하고, 심한 모욕감과 폭력에 수치심과 좌절을 겪는 것 말이다. 그것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여러 요인들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무엇보다 경찰단속을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더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갖고 교육에 임하도록 당부한다. 더욱이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은 가차 없이 전학시킬 것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조치로 십대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학원폭력만 근절시키면 그게 해결될 일일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바로 가정 안에서 풀어야 할 실마리가 그것이다. 배고픈 시절에 대학진학만을 목표로 했던 어른 세대와 지금의 십대가 겪는 감수성을 공감하는 게 그것이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데서부터 십대 자살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십대라는 이름의 외계인〉(라이스메이커)은 그런 점에서 십대의 감수성을 들여다보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어른 세대가 바라보는 관점과 십대가 생각하는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그 틈을 빤히 엿볼 수 있고, 그들과의 간격을 좁힐 수 방안도 체득케 하는 책이다.

"소위 '비행청소년'들이 하는 행동은 대개가 비슷하지만 그들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변수는 딱 하나다. 바로 '집', 즉 '가정'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더 이상 가정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느껴 집을 떠난다."(35쪽)

이 책에서 김영아는 십대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과 갈등의 문제를 '가정'에 두고 있다. 모든 질병도 그 근원이 있듯이 십대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가정 속에 있다는 뜻이다. 십대 아이들이 폭력에 기웃거리는 이유도 대부분 부모와 생긴 거리감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대리 만족하고 또 인정받으려고 삥을 뜯고 폭력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유독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혹 자신의 왜소함이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무엇을 그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얻으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그들과의 관계는 더욱 끈끈하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이지만, 아이는 그 관계에서조차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48쪽)

이는 내 아이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보고 느끼는 충격일 수 있다. 내 아이가 담배와 술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심하게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과 함께 돌아다닌다면 어떠할까? 부모라면 당연히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도 부모에게 받지 못하는 인정의 욕구 때문에서 비롯되는 일이라고 하니, 깊이 돌아봐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십대 아이들이 부모에게 바라는 관심이 어디 그 뿐이랴. 공부도, 장래 목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도 나와 있듯이, 울산에 살던 부모는 자기 아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그럴 듯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바람이지만, 녀석은 미용사가 되는 게 꿈이다. 부모가 바라는 꿈과 아이의 꿈이 달랐던 것이다. 그 간격을 좁힐 방안을 가정 안에서 찾는 게 십대 자살을 예방하는 또 하나의 최선책일 것이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눈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우고 익히는 게 아이들의 몫이지 않던가. 자녀는 분명 잘못을 저지르면서 배운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그렇다. 아이들의 잘못으로 인해 화가 날지라도 끊임없는 용서를 통해 부모는 자녀를 알고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울타리가 있는 가정, 그런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깃든 가정, 아이들의 문화와 감성에 눈높이를 맞추는 부모가 있을 때, 아이들이 비록 학교에서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더라도 그 과정들을 능히 견뎌내고 이겨내게 될 것이다. 그걸 지탱하는 힘이 가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십대 자살을 예방하는 근본 최선책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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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라 - 황광우와 함께 읽는 동서양 인문고전 40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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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존재 자체가 가벼워지고 있다. 지식도, 정보도, 문화도 인터넷과 스마트폰 하나로 가볍게 해결한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불리는 성경도 점점 더 스마트하게 읽힌다. 세상에 비난을 받을지언정 제 욕망에 따라 철새처럼 가볍게 날라 다닌다. 시대변화에 잘 대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얄팍함만 난무한다면 결국은 그 존재 자체를 가볍게 하고 만다.

세월이 흘러도 묵직한 고전이 빛나는 이유도 그것이다. 고전은 스스로 남다른 혜안을 제시하지만 모두가 보편적인 가치를 제공한다. 비록 동양과 서양고전이 다른 견해차를 보일지라도 그 근본은 인류의 역사와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도덕을 떠받치는 주춧돌과 같다. 그것이 버티고 서 있는 한 그 어떤 외투를 갈아입어도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요즘처럼 경제가 암울한 때에도 고전은 귀한 버팀목이 된다. 작금의 경제는 단순한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에 춤추듯 소인배들은 정권의 시녀역할을 자처하며 불나방 춤을 춘다. 하지만 진정으로 존경받는 인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군자의 모습이다. 난세에 난 영웅들과 혁명가들은 모두 그 속에서 배태된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고난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 디딤돌이었다.

황광우의 〈철학하라〉는 고전의 깊이를 통해 존재의 무거움을 다시금 생각토록 하는 책이다. 불확실성이 판을 치는 시대에 진정으로 흔들리지 않고 깊은 안목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혜안은 고전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하는 소인배들이 들끓는 시대에 진정한 군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일깨워 준다.

"사람들은 권위를 숭배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뱉어 놓은 말을 쉽게 믿어 버린다. 그런데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푸르른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의 나무'라는 말처럼 현실은 끊임없이 이론의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길 싫어하는 사람은 훌륭한 신앙인은 될 수 있어도 세계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인간은 될 수 없다."(서문)

바로 이것이 그가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철학하고 사유하기를 바라는 이유다. 아무리 위대한 소크라테스와 공자와 석가모니가 한 말이라도 각 개인 스스로가 그 말을 되짚어보고 곱씹어 보지 않는 한 그들의 삶을 몸소 체득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말이 힘이 있는 이유는 단순한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삶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까닭이다. 그걸 위해 독자들 스스로가 동서양 고전으로 철학하고 사유하길 원하는 것이다.

황광우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 그는 우선 이 책을 통해 동서양 고전 40선을 선정하여, 동양편에서는 자아와 정체성에 관한 심연을 드러내고, 서양편에서는 정치·경제·철학·심리·법·과학 등 외부세계에 대한 지평을 넓혀준다. 물론 초보자들도 각각의 고전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각 장마다 개괄적인 안내를 빠트리지 않고 있다. 나 같은 고전에 대한 초짜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부분이 그것이다.

"어떤 나라도 영원히 강할 수 없고, 또 영원히 약할 수도 없다. 강함과 약함은 그 나라의 법을 받드는 자에게 달려 있다. 그가 강하고 곧으면 그 나라는 강해지지만 그 사람이 그렇지 못하여 법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못하면 그 나라는 약해진다. 《한비자》〈유도(有度〉"(168쪽)

이는 강력한 지도자가 강대한 나라를 만들기를 원했던 한비자(韓非子)의 원문을 직접 인용한 글귀다. 한비자는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부여한 것도 아니고, 그가 군자라서 주어진 것도 아니라, 단지 '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왕권을 쥔 이라고 내다본 이였다고 한다. 그는 왕에게 필요한 것은 포괄적인 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다시 말해 누가 봐도 명확하고 분명한 법 적용을 행사하는 지도자란 뜻이다. 그런데 그걸 요구한 한비자에게 진시황은 죄를 묻고 사약을 보내 자살케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흐름이 대명천지 21세기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을 쓴 황광우도 실은 19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 옥살이한 인물이었으니, 그 어찌 한비자의 원문을 읽으며 땅을 치고 하늘을 향해 분노하지 않았으랴? 하지만 옥중에서 고전과 씨름하고 성경으로 사색한 고뇌의 편린(片鱗)들은 그의 존재감을 더 무겁게 드러내게 한 주춧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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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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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분교였다가 지금은 폐교가 된 백련초등학교. 그곳은 어린 시절 내가 배우고 자란 초등학교였다. 지금은 학교 운동장도 좁디 좁은 논밭과 같지만 그때는 월드컵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체육대회 때가 되면 왜 그렇게 운동장이 길던지, 이어달리기를 해도 좀체 끝나지 않았고, 기마전을 해도 적벽대전을 방불케 하는 광활한 대지였다.

그곳에서 함께 배운 아이들 이름이 떠오른다. 기현이, 상운이, 행용이, 성수, 길배, 인갑이, 치권이. 또 정순이, 영금이. 다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 운동장에서 배우고 자랐다. 학교 운동장 아래는 논두렁길이 나 있었고, 학교 옆 동산에는 대낮에도 무서운 묘지와 비석들이 서 있었다.

백련초등학교에서 잊지 못할 게 있다면 우리들을 동무처럼 대해 준 선생님들이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내게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 문성화 선생님이 바로 그 분이다. 그 분은 무척이나 잘 생겼다. 미남형이라 여학생들에게는 인기 짱이었다. 나도 그 분이 잘 생겨 내심 질투심도 났지만 내 노래 솜씨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셨다. 더욱이 꾀꼬리처럼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예쁜 혜련이 누나와 함께 학교를 대표해서 듀엣으로 졸업식을 부르게 한 건 더 가슴에 남는 추억이다.

탁동철 선생님과 아이들의 산골학교 이야기 묶음집인 〈달려라, 탁샘〉(양철북 펴냄)도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그 선생님은 아버지가 졸업한 학교를 다녔고, 이제는 그 모교에서 아들딸들과 함께 공부하고 씨름하고, 산과 들판을 누비고, 운동장 구석에 작은 논도 만들어 모도 심고, 심지어 닭장도 짓고 토끼도 키우며 아이들과 동무가 되어 살고 있다.

"손바닥만 한 논에서 하는 모심기지만 흉내는 다 낸다. 작대기 두 개에 끈을 묶어 만든 못줄을 두 아이가 양쪽에서 잡아 줄을 맞추고, 다른 아이들은 허리 숙여 모를 심었다. 교장 선생님이 보시고는 거 되지도 않을 걸 뭣하러 하냐고 했다. '안 되어도 좋아요. 살아 있는 모를 구경만 해도 그게 어디에요.' 5학년 아름이는 벌써 '선생님, 우리 나중에 이걸로 떡 해 먹어요.' 한다. 논두렁을 만들고 콩도 심었다. 일기장을 보니 모를 심는 날이 5월 31일이었다."(67쪽)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가장 바쁠 때가 모내기를 할 때라는 것 말이다. 경운기가 나오지 않던 그 시절에 나도 손모내기를 직접 했다. 그때만 되면 아이들이 학교를 빼 먹고 부모님들을 도와 직접 모내기를 도와야만 했다. 물론 힘이야 들지만 학교를 빼 먹는다는 건 그 시절엔 재미난 일이었다. 더욱이 배불리 먹었던 모내기 밥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데 탁동철 선생님은 거기에다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니 모내기 할 때 학교에 나오지 않는 녀석이 있으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 녀석의 논으로 모내기를 직접 하러 가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줄을 띄우고 한 줄에 한 뼘씩 모를 심는 모습은 흡사 이웃집 아저씨의 품앗이 하는 모습일터다. 물론 선생님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정겨운 동무로 어울린다.

탁동철 선생님이 머문 학교들은 명문이거나 도심에 있는 초등학교가 아니다.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그 흔한 시골 초등학교다. 가난하고, 배운 게 덜하고, 자주 싸움을 하는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학교다. 탁동철 선생님은 그 속에 공부하다 삐친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연극을 해서 아이들 잘못을 돌이켜보게 하고, 또 학교 급식문제에 관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며 길을 찾기도 한다.

요즘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하나만 낳아서 기른다. 교육비가 그만큼 만만치 않는 탓이다. 그런데 시골도 그런 흐름을 타고 있으니, 그 많던 시골 학교들이 다들 폐교가 될지 모른다. 이 책에서 '닭장'이란 시를 쓴 차정현이랑 '메뚜기 선수'를 쓴 다솔이, '거름 나르는 아저씨'를 쓴 유정이, '잡탕 떡볶이'를 슨 희영이도 먼 훗날 자기들이 배우고 자란 '오색초등학교'랑 '공수전분교'랑 '상평초등학교'를 바라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나 어릴 적 배우고 자랐던 백련초등학교처럼 녀석들도 그런 감회를 떠올리지 않을까? 왜 그 시절에 그토록 코피 터지며 친구들과 싸워댔는지, 왜 그토록 여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는지, 왜 그토록 친구 물건을 탐하며 살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함께 뒹굴며 자기 삶을 나누어 준 멋진 탁동철 선생님을 사무치도록 떠올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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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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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정약전. 천주학과 노론에 밀려 유배지로 끌려간 형제다. 동생은 강진으로, 형은 흑산도에 똬리를 튼 게 그것. 동생은 훗날 '자연과학'에 눈을 떠 신앙을 접었고, 형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다. 동생 정약용을 높이 치는 건 그가 남긴〈경세유표〉,〈주역사전〉, 〈목민심서〉같은 업적들에 있다.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기른 것은 익히 아는 바다. 물론 처음부터 그 집터를 마련한 건 아니었고 유배초기에는 동문 밖 샘터 옆에 있는 주막을 서당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손병조(孫秉藻), 황상(黃裳), 황경(黃褧), 황지초(黃之楚), 이청, 김재정(金載靖) 등 여섯 제자를 두었다.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은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이 엮은 사제 간의 발자취를 담은 책이다. 이른바 다산이 40세에 강진에 내려간 시점부터 회혼연(回婚宴)을 맞이할 즈음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둘 사이의 교학상장(敎學相長)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학문만 주고받는 사제간이 아니라 참된 정을 나눈 그 흔적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스승 정약용 앞에 섰을 때 제자 황상은 자신의 둔함과 막힘과 답답함을 털어놓는다. 그야말로 공부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다는 뜻이다. 그때 스승은 뭔가 민첩하게 외우고, 예리하게 글을 짓고, 깨달음이 빠른 아이들보다 오히려 둔한 더 눈여겨본다. 그런 제자라야 세상의 흐름에 약삭빠르게 대처하기보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꿋꿋한 제 길을 갈 거라 확신했던 이유다.

보통 그 당시에는 아이들이〈천자문〉과 〈자치통감〉을 5년 넘게 꿰차고 외우는 학습관을 가졌다고 한다. 그 이후에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깨우치게 한다는데, 다산은 일관되지 않는 체계와 단절된 의미를 전달하는〈천자문〉보다 자신이 직접 집필한〈兒學編〉(유학편) 상하권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지금 강진군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가르침은 직접 연표를 만들어서 가르친〈자치통감〉과〈통감강목〉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그건 현재 내가 집필하고 있는 성경에 관한 책도 그런 흐름일 것이다. 사실 서구신학에 영향 받은 목회자들이 성경을 중구난방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이른바 공시적인 접근 방법이 그것인데, 그로 인해 괜한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이단과 여러 사이비들에게 엉뚱한 해석을 내비치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바로 잡고자 성경을 하나의 줄로 꿰는 통시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이 〈유학편〉을 직접 집필하여 가르쳤다는 건 그래서 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 온 바이다.

제자들을 위해 그토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던 다산은 되레 성깔을 부리기도 한다. 18살 되던 해에 제자 황상이 장가를 들어 안식구에게 빠져든 채 공부를 하지 않는 그 무렵이다. 그때 다산은 황상에게 짐을 싸서 따로 각방을 쓰도록 호통을 치기도 한다. 이유인 즉 하던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아예 하지 않은 만 못한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황상은 보은산 산방에 올라가 기거하는데, 그곳에서 23살 된 다산의 첫째 아들 학연과 돌림놀이 시 짓기 시합도 벌이고, 또 28살의 천재 스님 혜장과도 2년 동안 어울리게 된다. 그 이듬해에는 둘째 아들 학포까지 초당에 내려와 아버지 밑에서 배움을 얻게 되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57세에 달한 다산은 서울로 돌아가는데, 제자 여럿이서 스승에게 과거급제에 관한 청탁을 넣기도 한다. 물론 황상 만큼은 꿋꿋한 야인(野人)이자 유인(流人)으로 사는데 족할 뿐이다.

"황상은 겉으로 꾸밀 줄 모르는 질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고 또 새겨 자신의 삶 속으로 옮겨오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자 그도 읍내를 떠났다. 아전으로 백성의 고혈을 빨며 탐욕스럽게 사는 삶은 견딜 수가 없었다. 백적산 깊은 골짝으로 가족과 함께 들어가 돌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예전 스승에게 삼근계를 받고 그랬던 것처럼 다른 잡생각 없이 오로지 스승이 일깨워 준 유인의 삶을 일구고야 말겠다는 서원만을 되새겼다."(387쪽)

그러던 황상은 만 18년 만에 다산을 찾아 서울로 상경한다. 그건 가난한 삶에 해결책을 찾고자 함도 아니요, 청탁을 넣어 과거에 급제코자 함도 아니었다. 병들어 누워 지내는 스승을 참되게 알현코자 함이었고, 그 해가 다산이 부인과 혼인한 지 60년 되던 날이라 축하코자 함도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다산을 만나 강진으로 내려오던 며칠 뒤 황상은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책 뒷부분은 황상과 다산의 큰 아들 학연과의 서신왕래를 비롯하여, 황상과 초의선사의 대화, 그리고 황상과 추사 김정희와의 대화도 담겨 있다.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황상이 쓴 시는 두보나 한유나 소동파나 육유의 시들에 견줄 만큼 그의 시는 개성 있는 빛깔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한다.

사제 간의 의리와 정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스승이 어떤 분이지를 묻는 제자가 없는 시대다. 물질적인 교환 가치처럼, 좋은 대학에 들어간 제자들을 배출하는 선생만 기억케 하는 이 세상과 교육 풍토다. 정민 교수도 그걸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펴냈으니,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탑고 질박한 정을 맛보길 원한다면 이 책을 들춰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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