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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영화감독 정성일 씨는 사계절을 빗대 읽을 만한 소설을 추천했다. 가령 긴 겨울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적당하며, 봄날이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야 할 것이며, 장마철이라면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이 필수라는 것이다.
장마철에 『행인』이라니 좀 의외다. 긴 비가 듣는 여름날이면 공포물이나 미스터리를 읽기에 안성맞춤이 아니던가.
내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정성일 감독은 왜 장마철에 『행인』을 읽으라고 한 것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해서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정성일 감독의 던진 화두를 거머쥐고 읽는다면 좀 낫지 않을까?
이 작품의 화자는 나가노 지로. 그에게는 형 이치로가 있다. 지로와 이치로, 두 형제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치로가 자신의 아내와 지로와의 관계를 의심하여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는 일을 동생에게 제안하는 것이 이야기의 축이다. 아니, 형제가 한 여자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이 주된 줄거리일진대 왜 제목이 『행인』인가?
이치로는 식견이 높고 미적· 윤리적으로도 지나치게 예민하여 마치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아내와 남동생의 관계에 의심을 품는 것은 이런 자학적 감수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회의, 그 사람의 정신을 온전히 가지지 못했다는 고통은 이치로를 계속 옥죄어든다. 동생 지로는 “남의 마음 같은 건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몸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마음도 떨어져 있는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치로는 결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치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생각할 뿐"이라며 "제발 나를 믿을 수 있게 해줘라"라고 요구한다. 그는 결국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거나, 내 앞에는 이 세 가지 길밖에 없네"라고 토로한다.
이치로는 뭘 믿지를 못하는 성격이니 종교에 입문할 수도 없고, 삶에 미련이 있어 자살할 수도 없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은 미치는 것. 이치로는 혹시 이미 자신이 미친 게 아닌지 무서워 견딜 수가 없다.
작가는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이치로가 품은 불안은 어쩌면 근대화에서 기인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이런 기시감이 있다. 뭉크의 「절규」에서 이런 불안감을 본 적이 있다. 꼭 짚어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익숙했던 기존 것들을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그런 불편함 같은 것들.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문명을 이끈다. 하지만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르네 듀보는 삶의 속도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할 때 사람들이 우울과 불안에 빠진다고 했다.
비록 소세키가 그렸던 모습은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의 일이나, 현대사회의 모습과 크게 진배없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우울증, 신경증, 공황장애 등 마음의 병은 그 기본적인 궤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중 속에서도, 가족 속에서도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는 저마다의 고독으로 스쳐 지나가는 '행인'이겠다.
소세키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기에 닿는다. 이치로가 겪는 고통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안고 있던 시대적 우울을 잘 보여준다. 작가도 독자도 과연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신을 제대로 유지하며 현재 주어진 삶을 살 것인가?
어쩌면 독자를 향한 계몽일 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우울을 위한 불안은 필요하지만, 정도를 벗어나면 이치로 처럼 정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