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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평점 :
저자 샘 킨은 미 미네소타 대학에서 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사이언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사라진 스푼』에 이어 국내에 소개되는 두 번째 작품이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DNA다. 읽어 보니 단순히 DNA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거나 최근 연구 동향을 전달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뭐랄까, DNA에 관한 히스토리 그리고 DNA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치열한 경쟁과 그 속에 깃든 애환을 담고 있다. DNA에 관한 인문학이라면 어떨까 싶다!
옮긴이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교양 과학도서의 번역가로 활동 중인 이충호 씨. 과학을 전공하 전문가 답게 번역문이 세련되어 무난하게 읽힌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바로 19세기에 활동한 바이올린의 거장 니콜로 파가니니를 말한다. 특히 그의 엄지.
파가니니는 아주 유연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엄지손가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주로 연주했는데, 그 곡들은 그의 현란한 손놀림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성공을 거둔 이유가 놀랍도록 강하고 유연한 손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저자는 파가니니의 엄지에서 화두를 펼친다. 그는 파가니니에게 손가락을 아주 유연하게 만드는 유전 질환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파가니니의 탁월한 연주 실력 이면에는 DNA가 작동한 것이다!
샘 킨은 “DNA의 이해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우리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DNA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 역시 우리 몸과 마음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DNA를 들여다보는 것은 인류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과도 같다. 자, 이제 저자가 이끄는 안내에 따라 DNA 투어를 떠나보자.
나는 DNA하면 우선 멘델이 떠오른다. 당시 가난했던 멘델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대학 등록금을 포함해 필요한 비용을 대주었기 때문에 기꺼이 수도사가 되었다. 이는 《은유로서의 질병》을 번역한 이재원도 “종교 기관이 의학 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던 이유는 비교적 자금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권 계층들이 종교 기관에 정기적으로 돈을 헌납했고, 결론적으로 이것이 유전학 등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책에 따르면 멘델은 좀 괴팍한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평을 보면 “(멘델은) 자신이 오로지 적과 배신자와 음모자들도 둘러싸여 있다고 의심으로 가득차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당대에 정부 당국 등과의 불화로 연구 논문과 문서가 모두 불태워지는 등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는 니콜로 파가니니가 지닌 천부의 재능은 손을 놀랍도록 유연하게 만든 유전 질환의 도움이 컸다. 기괴할 정도로 멀리 벌려진 엄지손가락에 주목하라. (책 325쪽)
사후 16년이 지난 1900년에 세 과학자가 독자적으로 멘델을 재발견하면서 마침내 빛을 발휘했다. 아울러 다윈의 자연 선택설과 멘델의 유전학 사이에 불꽃 튀기는 내전이 벌어진다.
다윈은 1882년에, 멘델은 1884년에 세상을 떠났다. 둘은 동시대의 사람들이었다. 20세기 벽두에 빚어진 다윈과 멘델의 치열한 논쟁을 보면 두 사람이 근대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 수 있다. 샘 킨은 특유의 꼼꼼함과 치밀한 필체로 DNA를 둘러싼 논쟁의 서막을 화려하게 열어젖힌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몰입해 들어간다.
멘델에 이어 다음 타자는 초파리 연구로 유명한 모건과 그 제자들(일명 플라이 보이스fly boys)다. 나는 모건 이야기도 흥미로왔지만, 허먼 밀러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다.
밀러는 낮에는 호텔과 은행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밤에는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했다. 그는 연구에 대한 열정을 어쩌지 못했는지 모건의 연구실을 어슬렁거렸고, 마침내 모건의 플라이 보이스에 합류했다. 샘 킨은 밀러를 두고 나름대로의 통찰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부실한 모건의 이론을 튼튼하게 다져나갔다고 평한다. 이상하게도 모건은 그에게 급여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정식 연구원 신분이 아니었던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밀러의 노력에 보답을 했다. 모건은 1933년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어 밀러 역시 1946년에 방사선이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상을 받았다. 인생 역전이 아닐 수 없겠다.
야마구치 쓰토무에 관한 이야기는 의외로 반전이 있는 사례였다. 야마구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연이어 피폭된 히바쿠샤 150여 명 중 한 명이었다. 두 번이 피폭당했으니 일찍 사망했으려니 했지만, 웬걸 전혀 아니었다. 그는 피폭된 지 65년이나 더 살다가 2010년 위암에 걸려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저자는 야마구치에게 일어난 돌연변이는 ‘침묵’ 돌연변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한다. 밀러의 발견에 따르면 DNA 돌연변이가 생겨야했던 것이다.
여성 과학자에 대한 소개도 이어진다. 가령 미리엄 마이클 스팀슨 수녀, 로절린드 프랭클린 그리고 바버라 매클린톡 등이다. 사실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 나선을 풀게 된 실마리는 앞의 두 과학자 연구에 힘입은 바가 컸다. 커다란 후드가 달린 수녀복을 입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미리엄 수녀의 모습은 한편으로 경건하면서도 한편으로 엄숙했다.
일찍이 북극 탐사과정에서 맞닥뜨렸던 북극곰과의 한판 승부도 소개한다. 북극곰을 잡아먹은 선원들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구토를 계속 반복”하면서 “머리뼈 안쪽에 큰 압력을 느꼈”고 심지어 정신이상 증상까지 보였다. 왜 그랬을까? 곰의 간에는 비타민 A가 농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관심은 고농도의 비타민 A에 적응하게 된 북극곰의 내막을 추적하는 것이다.
게놈 프로젝트 결과로 밝혀진 사실 중에 30억 개의 염기쌍 중 8%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라는 것이었다. 순수한 인간 유전자는 2% 미만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의 DNA는 인간 보다 바이러스의 속성이 4배쯤 많은 셈이다. 더군다나 2006년 프랑스의 티에리 에드만은 이 바이러스들의 유전자 문자열을 복제하여 “피닉스(Phoenix)”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DNA의 묘미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 유전자를 침팬지 유전자와 합쳐 ‘휴먼지’를 만들려고 했던 러시아 일리야 이바노비치 이바노프 이야기는 섬뜩하기조차 했다. 비록 이바노프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마치 과학사에서 최대의 사기 중 하나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은 파울 카메러 처럼 유전학 영역에서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다만 인륜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는 조건을 잘 지켜야겠지만.
여기서 잠시! 저자는 과학에는 ‘독불장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프레임이나 패러다임에 갇힌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에 눈이 멀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청개구리’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호전적으로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다. 대표적인 인물에 린 마굴리스와 크레이그 벤터가 있었다.
저자는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둘러싼 프랜시스 콜린스(『생명의 언어』 저자)와 크레이그 벤터(『게놈의 기적』 저자)의 대결,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되는 후성유전학의 발전, 복제양 돌리의 탄생으로 생명의 영역에 발을 내딛게 된 내막 등을 풀어낸다.
유전과학이 가져올 가장 큰 변화는 즉각적인 진단이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전과학은 우리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무엇이며,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더 넓은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 450쪽
다 읽고 나니 DNA에 관해 이처럼 다채롭고 흥미진진하게 쓸수 있다니, 작가의 역량이 부럽고 또 부럽다. 경탄마저 일게 만든 역작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과학계에도 샘 킨 같은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이제 구입해 놓고 미처 읽지 못한 샘 킨의 다른 저작 『사라진 스푼』을 읽어야겠다. 주기율표에 얽힌 세계사라니 벌써 기대가 된다. 이 책 역시 이충호 씨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