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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의 탄생 - 알렉산더 해밀턴과 앨버트 갤러틴의 경제 리더십
토머스 K. 맥크로 지음,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3년 12월
평점 :
미국 연방정부
부채 규모는 2013년 3월 1일 기준으로 16조 7475억 달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발표에 의하면 2012년말 국가 부채는 총
821조 1천억원이었다.
2011년도말 773조 5천억원에 비해 약 6.2% 늘어났다. 이는 2011년도부터 공무원·군인연금 충당부채 산정기준이 바뀌면서 부채 증가
효과(47조 6천억원)가 발생한 요인도 있다.
자 앞으로 국가부채는 계속 늘어날 것인가? 가계 부채도 1000조가 훌쩍 넘어섰다. 과연 우리의 대비책은 무엇일까? 제2의 IMF 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국민과 국내외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탁월한 재정 전문가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국가 부채와 국가 채무의 차이점을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국가회계법에서 규정하는 국가부채(Liability)는 지출 가능성이 크고 신뢰성 있는, 금액 책정이 가능한 모든 경제적 부담을 부채로 계산한다. 이에는 공무원·군인연금, 공기업 부채 등도 포함된다. 이에 비해 국가재정법상의 국가채무(Debt)는 정부가 직접적인 상환 의무를 지는 확정된 채무만을 반영한다.)
토머스 K. 맥크로 교수의 역작 《미국 금융의 탄생》은 위의 물음에 혜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고, 지난 2012년 11월 타계했다. 이 책은 고인의 유고작이다.
맥크로 교수가 주목하고 있는 시기는 미국이 독립을 쟁취하던 1776년도 무렵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미국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연방정부 체계를 맞아 새로운 국가 체계를 막 갖추어 가던 시기였고, 13개 주 연방의 국가 예산을 처리할 인재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 때 등장해서 탁월한 능력을 펼친 인재가 바로 알렉산더 해밀턴과 앨버트 갤러틴 재무장관이었다.
미국이 독립하던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는 중농주의 혹은 중상주의에서 초기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가던 시기에 놓여 있었다. 자유무역 사조와 함께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무역주의도 점점 강화되어 가던 이율배반적이던 시대, 미국이 필요로 했던 인재는 이러한 세계 경제의 사조를 꿰뚫어보고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 체계를 수립하면서 보호무역주의 장벽도 넘어서야 했다. 게다가 국제 금융의 흐름에도 정통해야 했으니, 과연 누가 이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당시 미 연방정부의 재정과 예산을 재편하는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된 배경에는 영국 식민지이던 시절, 재정과 예산은 전적으로 영국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정부 차원의 규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몇 배나 덩치가 커진 연방 예산을 수립하고 집행해 본 경험자가 미국 내에는 거의 없었다.
1776년 이전에는 아예 국가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그 누구도 국가 차원의 공공예산을 처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구는 적었고 또 넓은 지역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나 주정부에서 공공예산을 다룬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예산 규모는 매우 작았다.
여러 식민지들 안에서 통화를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국방과 공공사업에 예산을 지출하는 기능은 모두 미국에 주재하던 영국 관리들이나 지역의 관리들이 했다. 대규모의 예산을 다루는 재무 분야에는 지적인 진공 상태가 존재했다. - 462쪽
이런 위기 상황에서 미국이 초기 정부 시절 탁월한 인재들-알렉산더 해밀턴과 앨버트 갤러틴을 비롯해서-을 얻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일했고, 갤러틴은 토머스 제퍼슨 정부 때 역시 재무장관으로 함께 했다.
맥크로 교수는 이 두 사람을 주목하면서 본서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핵심은 두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진화했으며, 맨처음 어떻게 현실에서 실현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민자 출신이었는데. 그렇다고 본국에서 자신들의 처지가 썩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해밀턴은 서인도 제도 출신이었고, 갤러틴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한편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다수 있었는데, 가령 우선 9살에 고아가 되었고 10대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눈부신 지성의 소유자였으며 숫자와 셈에 특히 빨랐고, 특이할 정도로 탁월한 행정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제에 반대해 노예 해방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에서는 서로 적이었다. 이는 워싱턴과 제퍼슨의 정치 철학과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해밀턴은 경제 성장을 위한 연방정부 차원의 강력한 개입과 공공 정책을 적극 주장했고, 갤러틴은 낮은 세금과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펼치고자 노력했다. 당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적절한 역할, 정부 개입의 수준, 국가 부채의 성격 등에 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2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치적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미국 건국사를 통해 오늘날 국가론이나 정부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철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맥락에 대하여 통찰하고 있다. 이의 일환으로 건국 초기 상반된 입장을 보였던 워싱턴과 제퍼슨의 정부론에 대해 살펴본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고찰과 문헌은 이미 상당수 진행된 탓에 어쩌면 식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대리인적 성격으로 해밀턴과 갤러틴이라는 두 재무 장관을 대비시켜 본다는 탐구는 여간 창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낯설었던 두 사람이 미국 건국 초기 어떤 활약을 펼쳤고, 그 이면에는 어떤 준비와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는지 소상히 알 수 있었다.
결코 대지주도 부유층도 아니었던 두 사람이 이민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그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그 비법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어떻게 보면 자수성가요, 인간 승리가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의 현실도 그리 녹록치 않다. 여전히 정부의 역할, 공공 정책의 범위 그리고 경제와 복지 등을 둘러싼 이견과 갈등이 여전하다. 그러기에 이를 조화롭게 타계하면서 새로운 미래 사회의 비전을 그려나갈 한국의 해밀턴과 갤러틴이 절실히 필요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