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강명관 지음 / 소명출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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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하건대, 강명관 교수의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는 한국문학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사와 한국철학, 나아가 넓은 의미의 '한국학'(저자에 따르면 이것 역시 심히 문제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을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사람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 강명관 교수가 줄곧 주장하는 바, 곧 한국문학사가 '민족'이라는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민족주의를 공고화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고 또한 '근대'라는 서구중심적 목적론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왔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민족과 근대에 대한 편집증이 이 땅에서 펼쳐진 문학 활동 및 사상의 전개 양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정형화시켰는지 강명관 교수만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학자는 없었다. 특히 그가 '제도적으로' 속해 있는 학문 분과인 '한국고전문학' 쪽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한문학 역시 국문학의 일부라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한문학이 국문학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강명관 교수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적 열정에 들려 국문학사를 구상하던 사람들이 단지 '남의 글자'로 씌어졌다는 이유로 한문학을 국문학에서 몰아내려 했던 시도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순수성과 우월성이 학적 연구와 결합할 때 잉태될 수 있는 지적 폭력을 낱낱이 고발한다. 한문학의 자산이 완전히 부정될 경우 개화기 이전의 국문학은 더할 수 없이 가난해진다는 자명한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정도는 과욕이 빚어낸 시행착오쯤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이 '근대'를 향한 열망과 결합되면 사정은 심각해진다. 근대를 확고한 기준으로 삼고 모든 문학적 운동이 근대를 정점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관점 아래 문학사를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과 발전상 자체를 치명적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조선 후기역사를 설명하면서 자주 언급하는 말 가운데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것이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해, 민족주의와 더불어 근대성의 한 축을 이루는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형성될 조건이 조선에서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다. 그리고 이를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테제가 바로 1970년대 한국 학계의 주도적 담론이었던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바는 조선의 근대적 성격이 개항과 더불어 '이식'된 것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발현되고 있었던 것임을 밝힘으로써,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자 함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강명관 교수에 따르면 근대는 서구에 한정된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기 때문에, 식민사관의 극복에만 얽매인 나머지 근대성의 단초를 찾아내고 이를 역사적 발전의 자연스런 전개과정으로 봉합시키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사에서 서양사를 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어 역사 기술의 왜곡과 오류, 기형화를 필연적으로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낳는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미 정답으로서의 결론을 미리 전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사 내부에서 근대로의 주체적 발전경로는 그것의 객관적 존재 여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구 결과 근대로의 주체적 발전경로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인 스스로 식민지 사학의 정체론을 인정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한국인의 트라우마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도 근대로 향한 자생적 주체적 발전경로가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부정의 답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106쪽)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근대/근대의 도식적 이항대립들을 달달 외워왔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곧 근대로의 이행과정이라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주자학/실학, 한문학/국문학, 이(理)/기(氣), 평시조/사설시조, 사대부/평민 등등. 강명관 교수가 이 책에서,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해 작년 여름에 한꺼번에 발간한 [안쪽과 바깥쪽],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농암잡지평석]에서 동시에 천착하는 작업은 이러한 이항대립이 국(문학)사에서 근대성을 재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구축된 상상적 가공물임을 자세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은 주자학이라는 탁상공론의 관념세계를 탈피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민하는 실용적인 학문이자, 중국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토착 학문으로, 자생적인 근대의 서막을 알리는 대표적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실학은 부분적으로 주자학과 차별되는 면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주자학을 대체하고자 했던 학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으며, 오히려 주자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측면이 더욱 강했던 학적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강명관 교수의 주장이다. 즉 어떻게든 근대적인 무언가를 찾아내고 이를 개념화하려는 의지가 앞서 나열한 대립쌍들을 구성하여 한쪽을 열등한 전근대적인 것으로, 다른 한쪽을 우월한 근대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바로잡으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강명관 교수의 결론은 자명하다. 자생적 근대성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 설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다고 믿어 왔던 '조선 후기의 근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구의 '근대 찾기'가 만들어낸 가공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내부에 있는 서구사는 명백히 타자이다. 타자를 배제하고 주체를 찾는다면서 헤맨 끝에 우리는 나의 내부에 있는 타자를 발견하고 주체로 오인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중세니 근대니 하는 시대 구분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 구분을 따른다면, 서구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서구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162-163쪽)

강명관 교수의 결론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 문장들에는 한국학, 아니 식민주의를 경험한 비서구에서의 '자생적' 학문이 결코 피해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고민과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소 원론적이고 상투적인 문제 제기에 불과하다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세한 찬반여부를 떠나서 강명관 교수의 주장을 일단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면밀한 당대적 인식 아래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거친 뒤에 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강명관 교수는 사후적으로 구축된 현재의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텍스트의 구성요소를 취사선택하는 대신, 해당 텍스트가 생산된 당대의 맥락에 텍스트를 배치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절실함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문학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법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민족과 근대라는 개념을 집어던지든, 아니면 좀더 믿어보든지 간에, 힘들더라도 먼저 텍스트 하나하나를 자세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이 모든 것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학이란 무엇인가, '민족' 없이 한국문학, 한국역사, 한국철학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라는 문제설정 대신 그 무엇으로 생성과 변이를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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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1-1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량님, 좋은 리뷰 반갑습니다. :-)
저도 이제 국학 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돼서 그렇지 않아도 이런 류의 책들을 찾고 있던
참인데, 마침 사량님이 좋은 선물을 하나 주셨네요. ^^
앞으로도 좋은 선물 계속 부탁해용~~~

사량 2008-01-1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 님께서 저와 알라디너들에게 선사한 선물들을 생각하면 마지막 문장이 심히 부담되는 걸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국학 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셨다니 무척 궁금합니다. 발마스 님 서재에서 관련 이야기 많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balmas 2008-01-31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앞으로 이쪽 이야기를 좀더 자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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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제 번역이라는 지적 작업이 갖는 중요성은 단지 지식인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 학문의 융성과 심화를 가로막아 온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번역에 대한 홀대 및 무관심이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인터넷서점에서 독자리뷰를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큼은 확실히 입력된 듯하다. 이 책은 이 땅의 척박한 번역 현실에 대한 그간의 문제 제기들을 집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으로, 이제 막 번역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이 읽으면 여러 방면으로 깨우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다만 이런저런 호기심으로 번역에 관심을 가져왔거나 알라딘서재를 자주 기웃거렸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다. 곧 있으면 초판이 나온 지 2년이 된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긴급하고도 절박한 문제의식이 유효한 이상, 이 책은 단순한 사례모음집으로서가 아닌 일종의 '마니페스토'로서 읽히고 또 읽혀야 한다. 이 땅에서 번역의 의미가 더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결국 한국어의 미래와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집요하게 캐내다가 단물이 빠지면 미련 없이 바다를 건너 버리는 무책임한 엘리트들이 득세했던 이 땅에서, 후대를 위해 한국어텍스트를 축적하는 번역 작업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독할 것인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영어공용화론이 점점 더 득세하고, 급기야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MBA를 받은 사람이 "한국에서 서비스 산업이 잘 육성되지 않는 것은 언어 문제 때문"이라며 "앞으로 1백 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고 자신 있게 단언하며(225쪽), 또 여러 사람들이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에서, 후세에 넘겨줄 한국어의 자산을 늘리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진심으로 권할 수 있는가? 저자는 "그의 지적이 정확하게 우리의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서, 나아가 "우리가 현재 처한 이 지지부진한 상황이, 실은 우리 사회 상류층과 주류 사이에서 암묵리에 합의되고 있는 '어떤 의도'가 관철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품게 된다"라고까지 말하기에 이른다(같은 곳). 그 "어떤 의도"란 무엇인가. 한국어가 정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자본)의 수월한 이동과 효율적인 축적을 감당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든 이를 버릴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무서운 욕망이 아니겠는가.

대학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모아 보면 이미 한국어는 학문언어로서의 위상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다. 이미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영어 개념어에 한국어 조사를 덧붙여 쓰는 식의 의사소통이 빈번해진 지 오래고, 인문학 쪽에서도 특정 분야를 제외하면 영어강의가 불가능한 사람은 교수가 되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태다. 본문에서 인용되는 김용옥의 말처럼 인문학 서적을 1년에 다섯 권 내고 받는 인세수입보다 교수의 일년치 연봉이 더 많다는 웃지 못할 사정을 차치하더라도, 한국어로 씌어진 문헌을 읽고 한국어로 사유하고 말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가는 지금, 번역을 통해 이 땅의 문화적 수준을 드높이자는 주장은 막막하기만 하다. "번역 그 자체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멸망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현 수준에서 머물 수는 없다.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228쪽)라며 젊은 학도들에게 번역을 권장하는 대목은 참담하고 서글프기까지하다. 나도 이 나라가 정말이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최소한 책과 공부를 좋아하다가는, 나아가 모국어를 아끼다가는 딱 망하기 좋은 꼴로 가고 있는데 어찌할 것인가.

이 땅에서는 자유로운 번역과 학문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이를 거스르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구조를 뛰어넘고 구조를 뒤흔드는 '초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번역이 돈을 가져다주지 못해도,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어도, 한국어가 천대받아도,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지식과 사상의 민주화를 향한 책임감과 사명감만으로 외국의 고전을 부지런히 한국어로 번역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는 번역자 자신에게 아무런 득이 없기에 '정상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미친 짓이고,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불온한 짓이다. 저자는 마지막 문장을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229쪽)라고 쓰고 있지만, 모국어로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 땅에서 번역이 진정 미친 짓이고 불온한 짓이라면 번역은 참다운 의미에서 반역이다. 번역은 반역이다. 천덕꾸러기 한국어로 불가능한 역모를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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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1-01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님, 아주 좋은 리뷰네요. 재미있게 잘 읽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니다. :-)

사량 2008-01-0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발마스 님, 영광입니다. ㅠ 꼭 새해 복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

balmas 2008-01-1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답변이 늦었네요. 사량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로드무비 2008-01-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마디.
사량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쓰기의 영도 동문선 문예신서 342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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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주변에서 바르트를 읽는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바르트의 책들은 꾸준히 소개되어 왔고 결국 그의 첫 번째 저작인 [글쓰기의 영도]마저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글쓰기의 영도]는 바르트의 문학론이 집약된 문학이론서이자 짧고도 준수한 프랑스 근대문학사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책이지만(개별 작품론을 담고 있는 3부는 초판에는 없고 나중에 추가된 부분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무척 까다롭고--번역의 문제도 개입되겠지만--프랑스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이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굳이 [글쓰기의 영도]를 집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종언'이라는 소문 속에서 배회하는 근대문학의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고, 나아가 이를 문학 또는 글쓰기의 일반의 문제이자 과제로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발자크부터 플로베르, 말라르메, 지드, 프루스트, 그리고 카뮈에 이르는 프랑스 시인과 소설가들을 줄곧 언급하면서 바르트가 작가에게 주어진 재료로서 대립시키고 있는 두 영역은 작가 자신이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체,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빚어지는 문체이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작가가 언어체에 기대고자 할 때 그(녀)는 소설가가 되며, 문체를 향할 때는 시인이 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언어체의 사용이 극단화될 때 소설은 역사와 사회의 질서 속에 얽매이게 되며, 문체가 절대화될 때 시는 지시대상을 잃고 자연의 폭력만을 남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양 극단으로 포섭되지 않는 중립적이고 무구한 부재의 글쓰기가 바로 '영도의 글쓰기'이다. 바르트가 영도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전범으로 예를 드는 작품이 바로 카뮈의 [이방인]인데, [이방인]은 "일종의 부정적인 양태로 귀결되며, 그 속에서 한 언어의 사회적, 신화적 특질들은 형태의 중립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어떤 상태를 위해 폐기"(70쪽)되는 중립적 글쓰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영도]는 주어진 언어체와 개성적 문체, 역사 및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좌절했던 시인과 소설가들이 선택한 글쓰기의 양상들을 문학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 바르트의 '프랑스 근대문학사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대문학의 본질인가? 바르트는 "근대성은 불가능한 하나의 문학의 추구와 더불어 시작된다"(38쪽)고 밝히고 있다. 근대문학의 딜레마는 작가가 기존의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언어에 저항하고자 하나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괴리와 좌절에서 비롯된다. "이 상황의 근본적인 애매성은 혁명이 그것 자체가 파괴하고자 하는 것 속에서 그것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의 이미지 자체를 끌어내야 한다는 점이다."(78-79쪽) 말하자면 작가는 모든 제도와 구속에서 자유로운 언어를 창조하고자 하나 그러한 언어는 이미 주어져 있는 언어 바깥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필연성으로서 그것[문학적 글쓰기]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 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다."(79쪽) 이러한 작가의 노력을 바르트는 '선택'이라고 명명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때묻고 오염된 언어 안에서 새로운 문학을 창안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불가능한 하나의 문학의 추구"라는 근대문학의 꿈이자 "언어의 유토피아"(같은 곳)로의 지향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배적 언어로부터 소외되고 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언어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무엇에도 복속되지 않는 영도의 글쓰기를 구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만간 또 다른 질서에 포획되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선택하는 글쓰기의 무한한 급진적 운동이야말로 근대문학의 기획이 갖는 본질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 바르트에게 묻는 것은 어리석다. 단지 부정의 글쓰기로서만 나타날 뿐인 언어의 유토피아는 우리가 글쓰기를 무한히 거듭해나갈 때만 순간적으로 그 단초를 내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글쓰기의 재료가 무엇인지, 우리의 꿈을 구현할 언어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사유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조차 상투어가 되어가는 듯한 지금, 우리는 문학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아니, 우리는 꿈을 꾸고 있기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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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 끊이지 않는 분쟁, 그 현장을 가다
이유경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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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은 여행기, 좀더 저널리스틱하게 말하면 현장취재라는 글쓰기 형식이 지니는 미덕과 한계 모두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발로 뛰어다니면서' 씌어졌기 때문에, 그 어떤 뉴스나 시사교양프로그램보다도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장의 목소리들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특히 버마(미얀마가 아니다!)와 카슈미르, 스리랑카 현지 무장투쟁 세력과의 인터뷰는 아마도 이 책 말고는 당분간 접하기 어려울 것이라 사료되는 더없이 소중한 기록이 될 것 같다. 또한 식민통치와 해방 뒤 남성중심적 민족주의 세력, 종교근본주의라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아시아 대륙에서 페미니즘이 무엇을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는지를 무겁게 시사하고 있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분쟁지를 취재하려면 이 정도의 깡다구는 필요하다구!"라며 앞장서는 듯한 저자의 패기와 발랄함이 하나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법도 하다. 마치 한국의 모모 신문들처럼 아시아 여기저기에도 자국의 분쟁들을 왜곡, 편파 보도하는 수구 신문들이 존재한다는 저자의 재기 넘치는 설명을 접하게 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아닌 '낯선'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심층적으로 들여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그리 유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각 장마다 각국의 분쟁상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쟁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사들을 자세하게 정리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얘네들은 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고 언제까지 싸우기만 할 거야?'라고 질문하기 시작하면, 저자의 좌충우돌 취재기와 그 안에서의 온갖 '수다'들을 감당해 내기가 버거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을 크게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유재현의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에서도 느꼈던 점이기도 하지만, 아시아의 어느 나라든 구구절절하고 기막한 내력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서, 세계사 과목 시험공부를 하듯 단지 책 한 권으로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 언감생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는 같은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심했던 대가인 셈이다.

개인적인 불만은 이 책이 아시아 각국의 어제와 오늘을 소상히 알려주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 '나'의 이야기가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한반도라는 "섬" 소녀가 어떻게 아시아라는 "대륙의 딸"로 변모해 갔는지를 자랑스럽게 밝히는 프롤로그부터, "나는 아직도 꿈 많은 소녀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자신이 삶에 갖는 용기와 열정, 그리고 앞으로의 희망을 당당히 피력하는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나'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차고넘쳐서 가끔은 '아시아'가 '나'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이 부분이 미덕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그러한 내용들이 가져다 주는 솔직함과 친근함은 때로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즉 그만큼 진부해서, 이 책을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그저 '모든 걸 내려놓고 훌훌 떠날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젊은 여성의 호기심 넘치는 아시아 기행'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업으로 평가절하시키는 약점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가뜩이나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지면은 한정되어 있는데, 막상 짧은 꼭지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소소하게 잔뜩 들어 있으면 읽다가 맥이 빠진다. 저자의 열정과 용기는 이 책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시도와 기록이 대단히 중요하고 뜻 깊은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니, 다음 책부터는 자기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면 좋겠다. 저자는 우리에게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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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8-01-2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저도 조금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걸 콕 집어주셨네요.

사량 2008-01-2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눈길 조심하시고요, 에구구;;)
 
들뢰즈의 니체
질 들뢰즈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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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알라딘 측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딱히 없는 관계로(물론 출판사 책임이 크다) 먼저 책의 구성에 관해서 얘기해야겠다. <들뢰즈의 니체>는 들뢰즈가 니체 입문서 형식으로 편찬한 책으로, 프랑스에서는 <니체>라는 간명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목차를 보면서 설명하자면, '생애'는 말 그대로 니체의 이력을 간단하게 정리한 글이고, '철학'은 니체의 사상을 힘에의 의지, 긍정, 니힐리즘, 영원회귀, 초인 등의 개념들로 요악하고 해설한 일종의 '니체 개론'이다. '니체 철학의 주요인물사전'은 독수리와 뱀, 예언자 등 사람과 동물을 막론하고 니체의 저서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존재들을 통해 니체 철학을 들여다 본 짧은 소묘이고, '저작'은 니체의 저서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세 가지 정도 되는 독일어본 전집에 대해 들뢰즈가 논평을 덧붙인 글이다. 끝으로 '초록'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들뢰즈가 직접 선별한 니체의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은 아마 니체와 들뢰즈 모두를 처음 접하는 분에게 가장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 <니체와 철학>에서 다루었던 주요 논지들을 평이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간추리고 있고 그와 관련된 니체의 단편들을 골라 한데 모아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들뢰즈의 취향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할지언정 니체의 방대한 저작들에 질려 쉽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분들에게는 니체의 스타일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들뢰즈가 인용하는 부분들이 몇몇 저작에 치우치지 않고 [비극의 탄생]부터 [도덕의 계보], [선악의 피안],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르기까지 두루 걸쳐져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니체만을 논의하는 책이기 때문에 들뢰즈가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그가 늘 강조해 마지않는 '생성' '창조' '반복' '초월' 등의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도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이것들을 비롯한 들뢰즈의 여러 개념들은 니체의 흔적을 여실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와 들뢰즈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의 글을 전부 읽어보았다고 뻐길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그리 어렵지 않고 옮긴이의 해설도 무난히 씌어 있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책의 무게도 가볍고 글자마저 큼지막해서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다만 본문에서 니체의 책 제목 가운데 [즐거운 학문]과 [즐거운 지식]이 통일되지 않은 채 오락가락 쓰이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결격사유다. 별 하나가 깎여도 할 말 없을 무성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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