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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영도 ㅣ 동문선 문예신서 342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이제는 주변에서 바르트를 읽는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바르트의 책들은 꾸준히 소개되어 왔고 결국 그의 첫 번째 저작인 [글쓰기의 영도]마저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글쓰기의 영도]는 바르트의 문학론이 집약된 문학이론서이자 짧고도 준수한 프랑스 근대문학사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책이지만(개별 작품론을 담고 있는 3부는 초판에는 없고 나중에 추가된 부분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무척 까다롭고--번역의 문제도 개입되겠지만--프랑스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이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굳이 [글쓰기의 영도]를 집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종언'이라는 소문 속에서 배회하는 근대문학의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고, 나아가 이를 문학 또는 글쓰기의 일반의 문제이자 과제로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발자크부터 플로베르, 말라르메, 지드, 프루스트, 그리고 카뮈에 이르는 프랑스 시인과 소설가들을 줄곧 언급하면서 바르트가 작가에게 주어진 재료로서 대립시키고 있는 두 영역은 작가 자신이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체,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빚어지는 문체이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작가가 언어체에 기대고자 할 때 그(녀)는 소설가가 되며, 문체를 향할 때는 시인이 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언어체의 사용이 극단화될 때 소설은 역사와 사회의 질서 속에 얽매이게 되며, 문체가 절대화될 때 시는 지시대상을 잃고 자연의 폭력만을 남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양 극단으로 포섭되지 않는 중립적이고 무구한 부재의 글쓰기가 바로 '영도의 글쓰기'이다. 바르트가 영도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전범으로 예를 드는 작품이 바로 카뮈의 [이방인]인데, [이방인]은 "일종의 부정적인 양태로 귀결되며, 그 속에서 한 언어의 사회적, 신화적 특질들은 형태의 중립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어떤 상태를 위해 폐기"(70쪽)되는 중립적 글쓰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영도]는 주어진 언어체와 개성적 문체, 역사 및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좌절했던 시인과 소설가들이 선택한 글쓰기의 양상들을 문학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 바르트의 '프랑스 근대문학사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대문학의 본질인가? 바르트는 "근대성은 불가능한 하나의 문학의 추구와 더불어 시작된다"(38쪽)고 밝히고 있다. 근대문학의 딜레마는 작가가 기존의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언어에 저항하고자 하나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괴리와 좌절에서 비롯된다. "이 상황의 근본적인 애매성은 혁명이 그것 자체가 파괴하고자 하는 것 속에서 그것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의 이미지 자체를 끌어내야 한다는 점이다."(78-79쪽) 말하자면 작가는 모든 제도와 구속에서 자유로운 언어를 창조하고자 하나 그러한 언어는 이미 주어져 있는 언어 바깥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필연성으로서 그것[문학적 글쓰기]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 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다."(79쪽) 이러한 작가의 노력을 바르트는 '선택'이라고 명명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때묻고 오염된 언어 안에서 새로운 문학을 창안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불가능한 하나의 문학의 추구"라는 근대문학의 꿈이자 "언어의 유토피아"(같은 곳)로의 지향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배적 언어로부터 소외되고 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언어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무엇에도 복속되지 않는 영도의 글쓰기를 구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만간 또 다른 질서에 포획되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선택하는 글쓰기의 무한한 급진적 운동이야말로 근대문학의 기획이 갖는 본질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 바르트에게 묻는 것은 어리석다. 단지 부정의 글쓰기로서만 나타날 뿐인 언어의 유토피아는 우리가 글쓰기를 무한히 거듭해나갈 때만 순간적으로 그 단초를 내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글쓰기의 재료가 무엇인지, 우리의 꿈을 구현할 언어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사유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조차 상투어가 되어가는 듯한 지금, 우리는 문학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아니, 우리는 꿈을 꾸고 있기라도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