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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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녹슨 초록빛 곪은 상처를 미친 듯 후벼 파게 하는 사람, 당신은 헐린 가식의 벽에 부어오른 목젖 같은 소리를 내던지며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 달콤한 말조차 썩어갔던 나의 어린 사랑의 마지막을 길어 올리게 만드는 사람, 당신의 시는 항상 내 상처, 끝없이 갈라진 벽에 자랑스레 하얀 방부제처럼 독한 단어들을 뿌려버려서, 또다시 참을 수 없는 벅찬 부끄러움에, 벽 아래 그늘에 몸을 숨기도록 만드는 당신은, 백만 번 접힌 신문지 조각마냥, 별것 아닌 내 안의 아린 이야기를 항상 깊은 곳에서 발견하도록 내 손을 이끄는 당신은, 그리하여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부수는 사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한 숟가락의 밥과, 한 숟가락의 눈물이 만드는 그 어슴푸레 빛나는 안개의 조각 칼이, 당신의 시를 읽을 때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저 나를 바라봐야 하는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처참하게 부수는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멀쩡히 서있는 나는, 그리고 당신의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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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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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워낙에 머리 속이 ‘문과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라 그 동안 신문이건 잡지건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돌려버리거나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가 일쑤였다. 어렸을 적 ‘과학 동아’를 꾸준히 보지 않았던 탓인가, 과학은 내게 너무나 멀고도 먼 무엇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과학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라는 발언을 보고, ‘그것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만든 프리츠 뭐시기가 한 말과 비슷하군, 파시즘 스러워.’ 라고 한마디 중얼거려 주는 것이 지난날 내가 생각했던 ‘과학에 대해(혹은 미디어가 생산하는 과학 관련 기사에 대해) 내가 가져야할 충분한 교양 수준’이었으니 나의 무지를 설명할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어쭙잖게 미디어 관련 학문 전공자라 자신을 내세우며, 사회민주화 이후 언론의 기업화와 함께 광고 수익을 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사의 연성화가 어쩌고저쩌고, 의제설정기능을 통한 관심사의 조작이 어쩌고저쩌고, 왜곡, 선정성, 인터넷 언론의 상업성이 어쩌고저쩌고, 이러한 뻔한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언론의 비판적 독해를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언론을 통해서 유통되는 과학에 대한 이 거대한 무지를 나는 반성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일상/비일상적 판단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과학 자체 혹은 과학과 관련한 기사들에 대해 말이다. 모르니, 그게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알 리가 있나.

제왕절개, 우울증, 혁신적인 기술들, 유전자 조작 식품들, 편도선, 흡연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언론이 쏟아내는 상투적인 기사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주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는가. 이것은 “근대 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따위의 한, 두 마디 당위적인 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개별 사안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과 세부 사항에 대한 논리적인 판단력이 요구되는 구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사회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과학을 바라보고 가치판단 할 수 있는 ‘시선’이자, 과학과 관련한 텍스트를 제대로 독해해 낼 줄 아는 ‘실력’이다. 이것을 체득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학과 관련한 서적들을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읽어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과학이 현실에서 유통되는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는 것이다. 이충웅의 저서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후자의 방안을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재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알게 모르게, 첫 번째의 방안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책은 다양한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현실 적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잘 설명된 포토샵 책 펼쳐놓고 바로바로 사진 수정하듯 개별 기사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인 비판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학섹션의 기사를 읽을 때의 시야가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논리학 서적처럼, '실험 과정상의 추론의 타당성', '균형적인 시선', '신비화', '오역' 등등 신문 기사를 읽을 때 머릿속에 담고 한번씩 고민해봐야 하는 원칙들이 각각의 단락 속에 예시문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책의 마지막 한 장을 아예 황우석 박사와 관련한 근래의 줄기 세포 연구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근래 언론에 가득한 상찬이 뿜어내는 빛을 걷어내고 주어진 사건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시류에 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황우석 신드롬에는 사실 이 정도 고민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흔히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진 책을 보면 딱딱하다는 생각에 지겨워지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러한 위험을 다행스럽게도 피해간다. 일단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지겹지 않은 것은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일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콩, 바퀴벌레, 날씨, 저자는 첫 번째 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다룬다. 암, 흡연, 우울증, 저자가 두 번째 장에서 다루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과학은 우리의 일상과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유명 철학자들의 말이 이데올로기로서(누구의 이데올로기이든) 우리의 일상에 작용한다면, 과학은 우리가 살을 맞대는 현실 그 자체, 혹은 우리 몸의 생체 기관 자체에 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세 번째 장에서 ‘미래’와 관련된 이슈로 나아가는데, 그가 다루는 속도, 민족, 굶주림 등등의 개념은 흡사 사회과학에 더 어울리는 문제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까의 깨달음과 더불어, ‘삶’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인문학도 물론) 오늘 날의 분과학문체계처럼 구분된 형태가 아닌,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지루해지지 않는 또 다른 큰 이유는, 이 책이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과학 기사에(혹은 과학 자체에) 접근하면서도, “학문 간의 '장벽'을 깨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공은 외부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역설하는 저자의 소개 글에서 언뜻 스쳐지나가는 '저자다움'이 책의 곳곳에 박혀서 생동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사의 분석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하되, 스스로의 관점에서 문제제기 해야 할 부분에는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이러한 ‘저자다움’은 책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이 책이 무색무취한 논리학 서적의 한계에 갇히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수십억 달러 규모의 바퀴벌레 퇴치 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 퇴치 업체들이 바퀴벌레 멸종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인간에게 해롭다고 알려진 바퀴벌레 종류는 몇 종 안 되기 때문이다.'(80p), '과거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영역들을 의학적으로 ‘규정’하고, 의료적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114p) '인체의 자기 조절 능력에 대한 불신은, 조급하고 과도한 의료적 개입 속에서 강화되어 왔다.'(128p) '굶주림은 저급한 기술력 보다는 지배자의 피지배자에 대한 착취나 환경 파괴와 더 연관성이 깊다는 증거도 많다'(183P) '관계의 문제는 사회에서의 ‘권력’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에, ‘예측’의 공표는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종 그것은 선전과 선동의 수단이 된다. 혹은, 현실을 잊는 ‘마취제’일 때가 있다.(205p)

말하자면 이 책은 말 그대로 대체로 ‘엉망’인 한국의 과학을 주제로 한 기사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저자가 자기 스스로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과정이다. 분과학문간 배타적 장벽을 깨는 것이 그 운동의 하나이며, 미디어가 쏜 ‘열광’의 빛에 가려진 과학에 ‘성찰’을 부여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이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저자가 과학을 다루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과학을 향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가다듬어 본다. 어찌 보면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방안은 뻔하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비판적이 되고, 더 많이 세상과 부딪칠 것. 한편, 이 책의 결론은 하나다. 과학기사든 또 다른 어떤 기사든, 믿지 마라.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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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2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기엔, 역시 지식이 너무 없습니다. 과학이라니, 쩝.

happyant 2005-07-2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저도 이 책을 읽고 뒤늦게 띵-해서, 쉬운 교양서적부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어차피 한계야 명확하지만서도, 어찌어찌하면 '주체적으로 과학기사 읽기'의 수준 정도에는 근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009-01-1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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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출근하고, 일 끝나면 퇴근하고 tv보다가 다시 잠이 들면, 어느새 다음날 아침, 그렇게 수십 년. 이처럼 일상은 대체로 안전하다. 바로 며칠 전 유럽의 한 나라에서는 끔직한 동시다발 폭탄테러가 있었고, 크고 작은 온갖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위험한 한국 사회'이지만, 어쨌거나 위험은 그것을 직접 겪기 전에는 결국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실, 기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텍스트 위에 구성된 이러한 안전한 일상의 사이사이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툭 던지듯 급작스럽게, 혹은 탑을 쌓듯 차분히 배치함으로서 대부분의 공포물이 성립한다. 공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로부터 찾아온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부엌, 익숙한 거리, 익숙한 집 등등의 복제된 일상의 조각이 낯선(주로 잔혹한) 이미지와 마주치는 순간,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고, 침이 마르고, 소변이 마려워 오는 등, 우리는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일상의 틈입에 공포를 끼워 넣는 것이 호러가 성립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을 뒤집음으로써 공포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단순한 조건반사적인 과정(그리고 그  와중에 온갖 상품을 팔아먹는 페스티벌의 과정)을 넘어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회학적 시선으로 승화된다. 즉 우리가 공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일상'으로 만들면, 그것은 대체로 현실의 이면을 파헤치는 탁월한 괭이질이 되는 것이다. 바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처럼 말이다.

책을 낸 출판사는 몇몇 공포 영화 흥행작들의 설정상의 기원으로서 이 작품의 강점을 밀어붙이고 있는 듯 하나 이 책의 진가는 ‘무엇의 원류’라는 기원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대체로 어떤 작품의 가치를 기원적인 측면에만 둘 경우, 그것은 존경할 만한 것이 되는 반면, 읽기에는 별로인 것이 되기 쉽다) 오히려 이 책의 진가는, 공포를 일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공포의 극복조차 또 다른 공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그의 ‘문장과 구성’에 있다.

로버트 네빌이 흡혈좀비를 막아내는 - 집안을 수리하고 취미를 즐기는 - 과정은 매우 익숙한 일상적인 그 무엇이다. 문밖의 흡혈좀비들이 네빌의 ‘인간다움’을 갉아먹기 위해 고함지르고 공격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그 무엇이다. 네빌이 전설이 되고 난 이후에 펼쳐질 미래도 여전히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공포가 결코 특별하지 않은 어디에나 잠재된 것이라는 사실과, ‘현재’의 정상적인 모든 것의 종말이 결국 ‘끝’이 아닌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와 마주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로버트 네빌의 익숙함, 그것은 지금 세상을 사는 우리의 익숙함과 무엇이 다르지? 라고 말이다. 한번 물어보자. 모두가 개인이라는 철벽같은 울타리에 갇힌 사이에 밖에서는 한명씩 굶어 죽어 나가고, 어느새 ‘인간다움’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설이 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은 로버트 네빌이 살아간 그의 세상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고문 총 책임자를 대표자로 모시며 함께 사는 이 세상(여기에서 민중이 역사적 범죄의 공범이라는 몇몇 학자들의 지적은 너무나 쉽게 증명된다. 물론 이것이 막가파보다도 백만 배 더 나쁜 초대형 범죄자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민중에 의한 진보를 차갑게 회의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살자를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함께 사는 이 세상, 살 빼서 드디어 잘 팔리는 몸을 소유하게 된 연예인을 스스로를 초월한 ‘깨달은 자’(무얼 깨달은 게지? 자본주의의 생리?)로 모시고 숭배하는 이 세상, 돈 버는 것만이 - 그래서 그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구입하는 것만이 -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이 세상. 과연 흡혈좀비로 가득 찬 로버트 네빌의 공포스러운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흡혈좀비 바이러스에 적응한 또 다른 무엇으로 가득 찬 세상(로버트 네빌이 전설이 된)과 무엇이 다른가?(역의 역은 본래의 것?) 우리를 잡아먹는 진짜 무서운 것은 종이 위에도, 스크린 안에도 없다.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 괴물이 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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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애 - Behind Time [재발매] - 1925-1955, A Memory Left At An Alley
한영애 노래 / 윈드밀미디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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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좋은 음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야 어떠한 답을 내 놓든 '개인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에겐 베토벤의 ‘아우라’가 예술일 것이며, 또 어떤 사람에겐 핑클의 '뽕'끼가 예술일 터이니,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구분은 차라리 그것에 ‘내게’라는 두 글자를 붙여 개인의 취향에 맡겨 버리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물론, 하나의 생산품으로서의 작품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바탕으로 그것의 가치를 특정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러한 기준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규정만큼이나 다양할 터이니, 절대적인 기준을 세운 다는 것 또한 결국 불가능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모호함을 감수하고,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한 조건을 ‘작품-사회-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상호 작용을 중심에 놓고 마련해 본다면, ‘과거를 구원함으로써 현재를 이야기하고 현재를 이야기함으로써 미래를 구원하는 음악,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진정 밀접한 음악’이 그 조건들 중 주요한 하나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얼마 전 그러한 음악으로 가득한 음반 하나를 만났는데, 그것은 바로 한영애의 [Behind Time]이다. 이 앨범에 담긴 곱디고운 14개의 트랙에서 현재의 한영애는 과거와 소통하고 그것을 새로이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절규하고, 때로는 흐느끼고, 또 때로는 중얼거린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추억’으로 되살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로 되살리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대체로 '상품'일 수  밖에 없지만, 상품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전자의 경우는 대체로 가진 자들의 배만 채우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생산되는 사회를 바꾸어 낸다.(물론 그 ‘바꾸어 냄’의 방식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한영애의 이 앨범은 비교적 후자에 가까운데, 그녀는 13개의 어제의 파편을 오늘 날 다시-만듦으로서 분절되지 않은 '오늘'을 이야기 하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내일의 가능성을 되살리고 있다. 

지난날 민중이 겪었던 고통과 좌절은 오늘 날 민중이 겪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다르지 않음이 끊임없이 현재를 복제해내는 현대사회에서 인식 가능한 것이 되려면 ‘장인의 전투’가 필요하다. 특정 시대의 감수성을 보편적 삶의 진리로서의 애환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발휘되는 전투 말이다. 그 힘이 낳은 애환이 청자로 하여금  나른한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숙명적 아픔을 깨닫게 한다. 반세기 전에 유행한 이 음반의 오래된 많은 곡들이 오늘 날 TV를 가득 채운 수많은 '대중가요'보다도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의 마음에 더 와 닿는 이유다. 

이 시대의 수많은 금순아(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으로 굴절된 가족사에 매일 질질 짜는 그 금순이 말고 진짜 금순이), 부디 이 거친 타향살이에서 굳세어다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에, 비 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언젠가 해방의 그날이 오면, 손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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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0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클의 '뽕'끼요? ㅋㅋㅋ
한영애는 중고등학교 때 많이 들었는데, 그러고보니 10년쯤 잊고 살았습니다. 다시 생각나게 해 주셔서 감사.
글을 보고 나이가 좀 든 분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으시네요.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이라구요. 아무튼 좋은 글 쓰는 분 알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happyant 2005-07-05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십니다;;;.참고로 '뽕'끼는 박성봉 교수라는 분께서 대중문화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나름의 '개념'으로 즐겨 쓰시는 표현입니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ㅎㅎ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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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 하먼은 자신의 역사관을 표지에서부터 명시하고 있다. 이어서 책 서문의 시작을 장식하는 브레히트의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은 이 책을 이끌어 가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를 아주 잘 보여준다. 두말 할 필요 없이 그것은 바로 맑스주의 역사관이다. 특정한 관점에 의한 역사의 파악은 세상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애초에 세상의 모든 단면을 포괄할 수 있는 역사관이 어디있겠는가. 이러한 한계를 감안한다면, 이 책은 기존의 그 어떤 역사서 보다도 의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책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는 존재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보다도, 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동원한 병사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서를 읽는 까닭은 ‘내’가 잘 살기 위함이지, 노무현이나 이건희를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정치경제학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과 결합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과점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런 관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책 전체가 그런 관점에 입각해서 역사를 해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427p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파악의 핵심을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사적 유물론의 바탕 위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며, 그 흐름 안에서 필연적으로 촉발되는 민중의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자본주의 분석의 측면에서 그다지 세밀한 접근방식을 보여주고는 있지 않다.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 관련한 수치나 도표 등의 자료들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이것에는 크리스 하먼이 경제학자보다는 활동가에 가깝다는 점이 필연적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이 책은 크리스 하먼이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소화시킨 자료들을 바탕으로 역사의 면면에 이어져 내려오는 민중의 '투쟁'을 ‘소개’하고 ‘설명’하는데 주력한다. 따라서 책 자체의 학적 엄밀성이 좀 떨어지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물론 객관적 자료와 주관적 자료의 차이란 것이 백지장 한 장의 두께보다 크다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같은 내용일지라도 구성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이 전달되는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넓은 시간적 범위와 서양과 동양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공간적 범위를 다룬다는 점과, 그 모든 것을 책 한권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러한 한계는 불가피한 것이다. 어차피 이 책의 목표는 크리스 하먼의 말처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지, 그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구체적인 사료의 인용을 피하는 서술방식은 이 책의 일관적인 구성과 어울린다고 까지 할 수 있다. 이 책은 애초부터 과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전제를 두지 않는다. 민중의 투쟁이 비록 시대의 극히 일부분일 지라도, 하먼은 그 조각에, 미래의 거대한 투쟁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히도 신석기 혁명 이후로 세계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다시 확인하자. 이 책의 제목은 ‘민중의’ 역사이다.(‘맑스주의 철학자들의 역사’ 또한 물론 아니다. 그가 호의적으로 소개하는 맑스주의자들은 레닌, 로자, 트로츠키, 칼리프크네이트 등 격동의 20세기에 파시즘과 싸우다가 진 몇몇 별들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연원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의 이유는 노동계급 혁명의 실패이며, 스탈린 체제 소련의 파시즘의 뿌리 또한 노동계급 혁명의 실패 - 로 인한 맑스/레닌 주의의 변질 - 이고, 20세기 후반의 ‘신세기 무질서’ 또한 노동자 계급 투쟁의 실패 때문인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니, 이것을 명제로 만들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은 민중의 투쟁이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라는 얘기가 될 터인데, 이래서야 책의 목적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양한 시선 중의 하나’로 이해함을 전제로, 이러한 관점이 신자유주의의 세뇌장치들이 온 미디어를 휘젓고 다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야가 열리도록 해 주는 점화장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대로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머러스한 크리스 하먼의 문체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또한 건조한 문체 만큼이나 뜨거운 문체 또한 그것을 구사하는 ‘인물’이 받쳐준다면 상당히 괜찮은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서 클래식 음악은 '비교적 발이넓은 착취 계급을 위한'것이며 기독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준 종교였지만, 초창기부터 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영국은 "중국 관리들이 아편유입을 금지하려 하자 마약 중독을 확신시킬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1839년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문체가 뜨겁다’라는 말이,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거짓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개 더 들어 보자.


철학자들은 유럽의 커피하우스에서 평등권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신 커피를 생산한 사람들은 아프리카 서부에서 총구에 떠밀려 배에 실리고 끔찍한 환경에서 대서양을 건너(도중에 10명중 1명 이상이 죽었다) 경매 시장에서 팔린 다음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면서 하루에 15시간, 16시간, 심지어는 18시간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 326p

인종차별은 아프리카 노예제에 대한 변명에서 한 층 더 발전해 지구의 모든 사람을 '흰색, '검은색', '갈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성숙했다. 비록 많은 유럽인들의 피부가 연분홍이고,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갈색이며, 많은 남아시아 출신 사람들의 피부색이 유럽인들 못지 않게 옅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피부는 분명히 붉은색이 아니며, 중국인과 일본인은 전혀 노랗지 않는데도 말이다! - 332p

"....그러나 임시정부해체 후 독일과의 강화 이후 소비에트, 볼셰비키당, 적군은 더는 살아있는 노동계급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최신판 자코뱅주의와 비슷했다. 1790년대의 자코뱅주의가 부르주아지의 급진 분파의 이상에 따라 움직였다면 최신판은 노동계급 사회주의와 세계 혁명이라는 이상에 따라 움직이기 했지만 말이다. - 546p

세계 지배자들은 선조들이 지난 5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죽을 힘을 다해 그런 시도를 분쇄하려 들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신성한 권력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만 세계를 끝없는 야만에 빠뜨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 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조직화된 인간 생활의 종말 초래하더라도 말이다. - 783p


역사연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나아가 현재를 움직이는 행위다. 그것이 보수적 사관이든, 진보적 사관이든, 실증주의적 사관이든, 상대주의적 사관이든, 미시사든, 거시사든 모두 마찬가지다. ‘객관성’ 혹은 ‘사실성’은 ‘태도’의 형태로 추구되는 이상으로서 왜곡에 대항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근본적 목적으로서 연구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며(그러한 태도 자체가 현실 속에서 특수한 이데올로기로서 구체적 작용을 하기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는 저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솔직하며,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듯, 민중은 대체로 지배계급에 대항한 싸움에서 패배했으며, 간혹 승리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지배계급에게 배신당했고, 어쩌다가 배신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이내 스스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독자의 선택 뿐이다. 여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의 영원한 패배의 기록이 있다. 기록을 읽은 당신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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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1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립니다.
역시, 잘 쓴 리뷰라고 생각했어요. ^^

happyant 2005-07-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칭찬 감사합니다.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는데;;;하하. 다시 정신차리고 힘내서 미뤄두었던 리뷰를 써야 겠네요.^^

돌바람 2005-07-13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솔직하고 어렵지 않으며 공감을 형성하는 리뷰네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의 영원한 패배의 기록'을 조만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happyant 2005-07-1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 감사합니다. 네에. 꼭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