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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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 없는 소설이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까지 내리면 그러한 기분은 더욱 극심해진다.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논리로 차분히 비평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울림을 지닌 책을 만나는 것은 물론 두말 할 나위 없이 '기쁜'일이겠으나  - 돌덩이든 쇳덩이든, 쳇바퀴 같은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은 마찬가지죠(이우진식으로읽어야함) - 그것도 때와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뇌까지 스민 무기력 증에 밤새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존 쿳시’의 '추락'은 내가 세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이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에코 페미니즘 적 여성에 대한 본능적 반감으로 별 감흥이 와 닿지 않았으며, 두 번째 읽은 '페테르크부르크의 대가'는 내용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대가의 자의식에 침몰된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그라는 존재를 잊고 있다가, -책장에 꽂힌 책 두 권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 또한 '삼세번‘은 내 유년기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언명령에 가까운 원칙이 아니었던가. - 집어든 세 번째 이 책에서, 나는 끔찍한 먹먹함을 느낀 것이다.

 

일단(그리고 아마도 이 리뷰 내내), 이 책이 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남아공의 흑백 간 완전한 화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잊을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외재적 비평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내가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곳을 한번 여행해 본 적도  없으니, 몇 권의 역사책과 '호텔 르완다'(혹은 ‘부시맨’)정도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연찮게도, 나는 이 책을 지력이 아닌 감성으로 읽었기 때문에, 논리에 의한 딱딱한 리뷰를 뱉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스스로를 속이는 일임과 동시에 재미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역사를 가장 비역사적으로 그린 소설을 다시금 역사를 끌어들여 읽는 것은,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외부에 위치한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것은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 교수의 무력함이었다. 그것은 그를 교수직에서 박탈되게끔 만든 존재에 대한 무기력이 아닌(오히려 그러한 무기력 하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자존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딸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자, 자신의 창조성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다.(물론 역사에 대한 무기력이 가장 크겠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그는 때때로 못이기는 척 - 필사적으로 - 반걸음 정도 나아가 보지만 항상 커다란 장벽에 부딪친다. 그것은 그의 주체적인(동시에 배제적인) 합리성에 대한 벌이요, 그의 폭력적인 남근에 대한 벌이자, 동시에 그의 깨닫지 못했던 오만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내가 루리에게 감정이입했다는 사실이다. 대략 두 배 정도 나이가 많은 늙은이에게(그가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감정이입했다는 것은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손톱만큼이나 잃을게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어지는 의문점들, 나는 내가 저질러야 했던, 혹은 저지르게 될 죄로 고통 받은/을 사람들과 과연 화해 할 수 있을까? 동시에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루시’처럼 나는 용서하거나 계속 견뎌내며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물음이 남고, 풀리지 않는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은 아픈 거다. 그렇다, ‘루리’는 항상 꿈꾸던 오페라를 못 쓰고 헉헉대지만, 나는 이 짧은 리뷰조차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헉헉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은 그것뿐이다.

 

무척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만끽하는 가운데에서도 ‘야만인을 기다리며’부터 품게 된 하나의 껄끄러움은 여전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인 ‘설정’이다. 현실을 가득 매운 화해 불가능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어떠한 캐릭터와 설정을 사용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겠지만, 어찌되었거나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혹은 그래서 역으로 구원하는) 여성으로 귀착되는(주요한 장치인 섹스와 강간을 통해 어찌되었거나 고통 받은 성性은 무엇인가) 남성 노대가들의 소설에서 주로 보이는 설정은 역시나 껄끄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나로선 이 느낌은, 그러한 설정이 아무리 위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해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루리도 살아가고, 루시도 살아간다. 쿳시도 인세 받고 잘 살아가고, 나도 나름나름 잘 살아간다. 정형근도 잘 살아가고, 그에게 고문당한 많은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쿳시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끝이 났지만,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게 남겨진 몫이다. 삶은 역시나 언제나 고된 법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한 층 한 층 지하로 천천히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일 테지만, 이런 CM송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난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한편, 이렇게 말하는 거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즐기시지 못한 게 있으시면 자유롭게 즐기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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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8-2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한 권으로 조용히 마무리한 작가로군요. ^^;
이백오십구만층까지 추락하기, 라니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요.

happyant 2005-08-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포인트는 '지하'라는 것과, 한층한층 천천히 추락한다는 거죠.;;;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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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녹슨 초록빛 곪은 상처를 미친 듯 후벼 파게 하는 사람, 당신은 헐린 가식의 벽에 부어오른 목젖 같은 소리를 내던지며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 달콤한 말조차 썩어갔던 나의 어린 사랑의 마지막을 길어 올리게 만드는 사람, 당신의 시는 항상 내 상처, 끝없이 갈라진 벽에 자랑스레 하얀 방부제처럼 독한 단어들을 뿌려버려서, 또다시 참을 수 없는 벅찬 부끄러움에, 벽 아래 그늘에 몸을 숨기도록 만드는 당신은, 백만 번 접힌 신문지 조각마냥, 별것 아닌 내 안의 아린 이야기를 항상 깊은 곳에서 발견하도록 내 손을 이끄는 당신은, 그리하여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부수는 사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한 숟가락의 밥과, 한 숟가락의 눈물이 만드는 그 어슴푸레 빛나는 안개의 조각 칼이, 당신의 시를 읽을 때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저 나를 바라봐야 하는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처참하게 부수는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멀쩡히 서있는 나는, 그리고 당신의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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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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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워낙에 머리 속이 ‘문과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라 그 동안 신문이건 잡지건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돌려버리거나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가 일쑤였다. 어렸을 적 ‘과학 동아’를 꾸준히 보지 않았던 탓인가, 과학은 내게 너무나 멀고도 먼 무엇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과학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라는 발언을 보고, ‘그것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만든 프리츠 뭐시기가 한 말과 비슷하군, 파시즘 스러워.’ 라고 한마디 중얼거려 주는 것이 지난날 내가 생각했던 ‘과학에 대해(혹은 미디어가 생산하는 과학 관련 기사에 대해) 내가 가져야할 충분한 교양 수준’이었으니 나의 무지를 설명할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어쭙잖게 미디어 관련 학문 전공자라 자신을 내세우며, 사회민주화 이후 언론의 기업화와 함께 광고 수익을 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사의 연성화가 어쩌고저쩌고, 의제설정기능을 통한 관심사의 조작이 어쩌고저쩌고, 왜곡, 선정성, 인터넷 언론의 상업성이 어쩌고저쩌고, 이러한 뻔한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언론의 비판적 독해를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언론을 통해서 유통되는 과학에 대한 이 거대한 무지를 나는 반성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일상/비일상적 판단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과학 자체 혹은 과학과 관련한 기사들에 대해 말이다. 모르니, 그게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알 리가 있나.

제왕절개, 우울증, 혁신적인 기술들, 유전자 조작 식품들, 편도선, 흡연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언론이 쏟아내는 상투적인 기사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주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는가. 이것은 “근대 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따위의 한, 두 마디 당위적인 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개별 사안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과 세부 사항에 대한 논리적인 판단력이 요구되는 구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사회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과학을 바라보고 가치판단 할 수 있는 ‘시선’이자, 과학과 관련한 텍스트를 제대로 독해해 낼 줄 아는 ‘실력’이다. 이것을 체득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학과 관련한 서적들을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읽어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과학이 현실에서 유통되는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는 것이다. 이충웅의 저서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후자의 방안을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재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알게 모르게, 첫 번째의 방안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책은 다양한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현실 적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잘 설명된 포토샵 책 펼쳐놓고 바로바로 사진 수정하듯 개별 기사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인 비판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학섹션의 기사를 읽을 때의 시야가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논리학 서적처럼, '실험 과정상의 추론의 타당성', '균형적인 시선', '신비화', '오역' 등등 신문 기사를 읽을 때 머릿속에 담고 한번씩 고민해봐야 하는 원칙들이 각각의 단락 속에 예시문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책의 마지막 한 장을 아예 황우석 박사와 관련한 근래의 줄기 세포 연구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근래 언론에 가득한 상찬이 뿜어내는 빛을 걷어내고 주어진 사건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시류에 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황우석 신드롬에는 사실 이 정도 고민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흔히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진 책을 보면 딱딱하다는 생각에 지겨워지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러한 위험을 다행스럽게도 피해간다. 일단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지겹지 않은 것은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일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콩, 바퀴벌레, 날씨, 저자는 첫 번째 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다룬다. 암, 흡연, 우울증, 저자가 두 번째 장에서 다루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과학은 우리의 일상과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유명 철학자들의 말이 이데올로기로서(누구의 이데올로기이든) 우리의 일상에 작용한다면, 과학은 우리가 살을 맞대는 현실 그 자체, 혹은 우리 몸의 생체 기관 자체에 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세 번째 장에서 ‘미래’와 관련된 이슈로 나아가는데, 그가 다루는 속도, 민족, 굶주림 등등의 개념은 흡사 사회과학에 더 어울리는 문제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까의 깨달음과 더불어, ‘삶’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인문학도 물론) 오늘 날의 분과학문체계처럼 구분된 형태가 아닌,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지루해지지 않는 또 다른 큰 이유는, 이 책이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과학 기사에(혹은 과학 자체에) 접근하면서도, “학문 간의 '장벽'을 깨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공은 외부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역설하는 저자의 소개 글에서 언뜻 스쳐지나가는 '저자다움'이 책의 곳곳에 박혀서 생동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사의 분석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하되, 스스로의 관점에서 문제제기 해야 할 부분에는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이러한 ‘저자다움’은 책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이 책이 무색무취한 논리학 서적의 한계에 갇히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수십억 달러 규모의 바퀴벌레 퇴치 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 퇴치 업체들이 바퀴벌레 멸종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인간에게 해롭다고 알려진 바퀴벌레 종류는 몇 종 안 되기 때문이다.'(80p), '과거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영역들을 의학적으로 ‘규정’하고, 의료적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114p) '인체의 자기 조절 능력에 대한 불신은, 조급하고 과도한 의료적 개입 속에서 강화되어 왔다.'(128p) '굶주림은 저급한 기술력 보다는 지배자의 피지배자에 대한 착취나 환경 파괴와 더 연관성이 깊다는 증거도 많다'(183P) '관계의 문제는 사회에서의 ‘권력’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에, ‘예측’의 공표는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종 그것은 선전과 선동의 수단이 된다. 혹은, 현실을 잊는 ‘마취제’일 때가 있다.(205p)

말하자면 이 책은 말 그대로 대체로 ‘엉망’인 한국의 과학을 주제로 한 기사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저자가 자기 스스로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과정이다. 분과학문간 배타적 장벽을 깨는 것이 그 운동의 하나이며, 미디어가 쏜 ‘열광’의 빛에 가려진 과학에 ‘성찰’을 부여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이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저자가 과학을 다루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과학을 향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가다듬어 본다. 어찌 보면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방안은 뻔하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비판적이 되고, 더 많이 세상과 부딪칠 것. 한편, 이 책의 결론은 하나다. 과학기사든 또 다른 어떤 기사든, 믿지 마라.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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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2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기엔, 역시 지식이 너무 없습니다. 과학이라니, 쩝.

happyant 2005-07-2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저도 이 책을 읽고 뒤늦게 띵-해서, 쉬운 교양서적부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어차피 한계야 명확하지만서도, 어찌어찌하면 '주체적으로 과학기사 읽기'의 수준 정도에는 근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009-01-1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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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출근하고, 일 끝나면 퇴근하고 tv보다가 다시 잠이 들면, 어느새 다음날 아침, 그렇게 수십 년. 이처럼 일상은 대체로 안전하다. 바로 며칠 전 유럽의 한 나라에서는 끔직한 동시다발 폭탄테러가 있었고, 크고 작은 온갖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위험한 한국 사회'이지만, 어쨌거나 위험은 그것을 직접 겪기 전에는 결국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실, 기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텍스트 위에 구성된 이러한 안전한 일상의 사이사이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툭 던지듯 급작스럽게, 혹은 탑을 쌓듯 차분히 배치함으로서 대부분의 공포물이 성립한다. 공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로부터 찾아온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부엌, 익숙한 거리, 익숙한 집 등등의 복제된 일상의 조각이 낯선(주로 잔혹한) 이미지와 마주치는 순간,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고, 침이 마르고, 소변이 마려워 오는 등, 우리는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일상의 틈입에 공포를 끼워 넣는 것이 호러가 성립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을 뒤집음으로써 공포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단순한 조건반사적인 과정(그리고 그  와중에 온갖 상품을 팔아먹는 페스티벌의 과정)을 넘어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회학적 시선으로 승화된다. 즉 우리가 공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일상'으로 만들면, 그것은 대체로 현실의 이면을 파헤치는 탁월한 괭이질이 되는 것이다. 바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처럼 말이다.

책을 낸 출판사는 몇몇 공포 영화 흥행작들의 설정상의 기원으로서 이 작품의 강점을 밀어붙이고 있는 듯 하나 이 책의 진가는 ‘무엇의 원류’라는 기원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대체로 어떤 작품의 가치를 기원적인 측면에만 둘 경우, 그것은 존경할 만한 것이 되는 반면, 읽기에는 별로인 것이 되기 쉽다) 오히려 이 책의 진가는, 공포를 일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공포의 극복조차 또 다른 공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그의 ‘문장과 구성’에 있다.

로버트 네빌이 흡혈좀비를 막아내는 - 집안을 수리하고 취미를 즐기는 - 과정은 매우 익숙한 일상적인 그 무엇이다. 문밖의 흡혈좀비들이 네빌의 ‘인간다움’을 갉아먹기 위해 고함지르고 공격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그 무엇이다. 네빌이 전설이 되고 난 이후에 펼쳐질 미래도 여전히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그 무엇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공포가 결코 특별하지 않은 어디에나 잠재된 것이라는 사실과, ‘현재’의 정상적인 모든 것의 종말이 결국 ‘끝’이 아닌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와 마주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로버트 네빌의 익숙함, 그것은 지금 세상을 사는 우리의 익숙함과 무엇이 다르지? 라고 말이다. 한번 물어보자. 모두가 개인이라는 철벽같은 울타리에 갇힌 사이에 밖에서는 한명씩 굶어 죽어 나가고, 어느새 ‘인간다움’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설이 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은 로버트 네빌이 살아간 그의 세상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고문 총 책임자를 대표자로 모시며 함께 사는 이 세상(여기에서 민중이 역사적 범죄의 공범이라는 몇몇 학자들의 지적은 너무나 쉽게 증명된다. 물론 이것이 막가파보다도 백만 배 더 나쁜 초대형 범죄자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민중에 의한 진보를 차갑게 회의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살자를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함께 사는 이 세상, 살 빼서 드디어 잘 팔리는 몸을 소유하게 된 연예인을 스스로를 초월한 ‘깨달은 자’(무얼 깨달은 게지? 자본주의의 생리?)로 모시고 숭배하는 이 세상, 돈 버는 것만이 - 그래서 그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구입하는 것만이 -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이 세상. 과연 흡혈좀비로 가득 찬 로버트 네빌의 공포스러운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흡혈좀비 바이러스에 적응한 또 다른 무엇으로 가득 찬 세상(로버트 네빌이 전설이 된)과 무엇이 다른가?(역의 역은 본래의 것?) 우리를 잡아먹는 진짜 무서운 것은 종이 위에도, 스크린 안에도 없다.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 괴물이 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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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애 - Behind Time [재발매] - 1925-1955, A Memory Left At An Alley
한영애 노래 / 윈드밀미디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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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좋은 음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야 어떠한 답을 내 놓든 '개인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에겐 베토벤의 ‘아우라’가 예술일 것이며, 또 어떤 사람에겐 핑클의 '뽕'끼가 예술일 터이니,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구분은 차라리 그것에 ‘내게’라는 두 글자를 붙여 개인의 취향에 맡겨 버리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물론, 하나의 생산품으로서의 작품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바탕으로 그것의 가치를 특정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러한 기준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규정만큼이나 다양할 터이니, 절대적인 기준을 세운 다는 것 또한 결국 불가능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모호함을 감수하고,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한 조건을 ‘작품-사회-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상호 작용을 중심에 놓고 마련해 본다면, ‘과거를 구원함으로써 현재를 이야기하고 현재를 이야기함으로써 미래를 구원하는 음악,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진정 밀접한 음악’이 그 조건들 중 주요한 하나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얼마 전 그러한 음악으로 가득한 음반 하나를 만났는데, 그것은 바로 한영애의 [Behind Time]이다. 이 앨범에 담긴 곱디고운 14개의 트랙에서 현재의 한영애는 과거와 소통하고 그것을 새로이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절규하고, 때로는 흐느끼고, 또 때로는 중얼거린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추억’으로 되살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로 되살리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대체로 '상품'일 수  밖에 없지만, 상품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전자의 경우는 대체로 가진 자들의 배만 채우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생산되는 사회를 바꾸어 낸다.(물론 그 ‘바꾸어 냄’의 방식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한영애의 이 앨범은 비교적 후자에 가까운데, 그녀는 13개의 어제의 파편을 오늘 날 다시-만듦으로서 분절되지 않은 '오늘'을 이야기 하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내일의 가능성을 되살리고 있다. 

지난날 민중이 겪었던 고통과 좌절은 오늘 날 민중이 겪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다르지 않음이 끊임없이 현재를 복제해내는 현대사회에서 인식 가능한 것이 되려면 ‘장인의 전투’가 필요하다. 특정 시대의 감수성을 보편적 삶의 진리로서의 애환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발휘되는 전투 말이다. 그 힘이 낳은 애환이 청자로 하여금  나른한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숙명적 아픔을 깨닫게 한다. 반세기 전에 유행한 이 음반의 오래된 많은 곡들이 오늘 날 TV를 가득 채운 수많은 '대중가요'보다도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의 마음에 더 와 닿는 이유다. 

이 시대의 수많은 금순아(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으로 굴절된 가족사에 매일 질질 짜는 그 금순이 말고 진짜 금순이), 부디 이 거친 타향살이에서 굳세어다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에, 비 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언젠가 해방의 그날이 오면, 손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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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7-0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클의 '뽕'끼요? ㅋㅋㅋ
한영애는 중고등학교 때 많이 들었는데, 그러고보니 10년쯤 잊고 살았습니다. 다시 생각나게 해 주셔서 감사.
글을 보고 나이가 좀 든 분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으시네요.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이라구요. 아무튼 좋은 글 쓰는 분 알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happyant 2005-07-05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십니다;;;.참고로 '뽕'끼는 박성봉 교수라는 분께서 대중문화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나름의 '개념'으로 즐겨 쓰시는 표현입니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