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04년 11월
평점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 하먼은 자신의 역사관을 표지에서부터 명시하고 있다. 이어서 책 서문의 시작을 장식하는 브레히트의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은 이 책을 이끌어 가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를 아주 잘 보여준다. 두말 할 필요 없이 그것은 바로 맑스주의 역사관이다. 특정한 관점에 의한 역사의 파악은 세상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애초에 세상의 모든 단면을 포괄할 수 있는 역사관이 어디있겠는가. 이러한 한계를 감안한다면, 이 책은 기존의 그 어떤 역사서 보다도 의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책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는 존재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보다도, 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동원한 병사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서를 읽는 까닭은 ‘내’가 잘 살기 위함이지, 노무현이나 이건희를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정치경제학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과 결합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과점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런 관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책 전체가 그런 관점에 입각해서 역사를 해석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427p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파악의 핵심을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사적 유물론의 바탕 위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며, 그 흐름 안에서 필연적으로 촉발되는 민중의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자본주의 분석의 측면에서 그다지 세밀한 접근방식을 보여주고는 있지 않다.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 관련한 수치나 도표 등의 자료들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이것에는 크리스 하먼이 경제학자보다는 활동가에 가깝다는 점이 필연적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이 책은 크리스 하먼이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소화시킨 자료들을 바탕으로 역사의 면면에 이어져 내려오는 민중의 '투쟁'을 ‘소개’하고 ‘설명’하는데 주력한다. 따라서 책 자체의 학적 엄밀성이 좀 떨어지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물론 객관적 자료와 주관적 자료의 차이란 것이 백지장 한 장의 두께보다 크다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같은 내용일지라도 구성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이 전달되는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넓은 시간적 범위와 서양과 동양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공간적 범위를 다룬다는 점과, 그 모든 것을 책 한권에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러한 한계는 불가피한 것이다. 어차피 이 책의 목표는 크리스 하먼의 말처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지, 그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구체적인 사료의 인용을 피하는 서술방식은 이 책의 일관적인 구성과 어울린다고 까지 할 수 있다. 이 책은 애초부터 과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전제를 두지 않는다. 민중의 투쟁이 비록 시대의 극히 일부분일 지라도, 하먼은 그 조각에, 미래의 거대한 투쟁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히도 신석기 혁명 이후로 세계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다시 확인하자. 이 책의 제목은 ‘민중의’ 역사이다.(‘맑스주의 철학자들의 역사’ 또한 물론 아니다. 그가 호의적으로 소개하는 맑스주의자들은 레닌, 로자, 트로츠키, 칼리프크네이트 등 격동의 20세기에 파시즘과 싸우다가 진 몇몇 별들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연원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의 이유는 노동계급 혁명의 실패이며, 스탈린 체제 소련의 파시즘의 뿌리 또한 노동계급 혁명의 실패 - 로 인한 맑스/레닌 주의의 변질 - 이고, 20세기 후반의 ‘신세기 무질서’ 또한 노동자 계급 투쟁의 실패 때문인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니, 이것을 명제로 만들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은 민중의 투쟁이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라는 얘기가 될 터인데, 이래서야 책의 목적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양한 시선 중의 하나’로 이해함을 전제로, 이러한 관점이 신자유주의의 세뇌장치들이 온 미디어를 휘젓고 다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야가 열리도록 해 주는 점화장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대로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머러스한 크리스 하먼의 문체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또한 건조한 문체 만큼이나 뜨거운 문체 또한 그것을 구사하는 ‘인물’이 받쳐준다면 상당히 괜찮은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서 클래식 음악은 '비교적 발이넓은 착취 계급을 위한'것이며 기독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준 종교였지만, 초창기부터 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영국은 "중국 관리들이 아편유입을 금지하려 하자 마약 중독을 확신시킬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1839년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문체가 뜨겁다’라는 말이,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거짓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개 더 들어 보자.
철학자들은 유럽의 커피하우스에서 평등권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신 커피를 생산한 사람들은 아프리카 서부에서 총구에 떠밀려 배에 실리고 끔찍한 환경에서 대서양을 건너(도중에 10명중 1명 이상이 죽었다) 경매 시장에서 팔린 다음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면서 하루에 15시간, 16시간, 심지어는 18시간 노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 326p
인종차별은 아프리카 노예제에 대한 변명에서 한 층 더 발전해 지구의 모든 사람을 '흰색, '검은색', '갈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성숙했다. 비록 많은 유럽인들의 피부가 연분홍이고,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갈색이며, 많은 남아시아 출신 사람들의 피부색이 유럽인들 못지 않게 옅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피부는 분명히 붉은색이 아니며, 중국인과 일본인은 전혀 노랗지 않는데도 말이다! - 332p
"....그러나 임시정부해체 후 독일과의 강화 이후 소비에트, 볼셰비키당, 적군은 더는 살아있는 노동계급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최신판 자코뱅주의와 비슷했다. 1790년대의 자코뱅주의가 부르주아지의 급진 분파의 이상에 따라 움직였다면 최신판은 노동계급 사회주의와 세계 혁명이라는 이상에 따라 움직이기 했지만 말이다. - 546p
세계 지배자들은 선조들이 지난 5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죽을 힘을 다해 그런 시도를 분쇄하려 들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신성한 권력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만 세계를 끝없는 야만에 빠뜨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 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조직화된 인간 생활의 종말 초래하더라도 말이다. - 783p
역사연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나아가 현재를 움직이는 행위다. 그것이 보수적 사관이든, 진보적 사관이든, 실증주의적 사관이든, 상대주의적 사관이든, 미시사든, 거시사든 모두 마찬가지다. ‘객관성’ 혹은 ‘사실성’은 ‘태도’의 형태로 추구되는 이상으로서 왜곡에 대항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근본적 목적으로서 연구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며(그러한 태도 자체가 현실 속에서 특수한 이데올로기로서 구체적 작용을 하기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는 저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솔직하며,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듯, 민중은 대체로 지배계급에 대항한 싸움에서 패배했으며, 간혹 승리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지배계급에게 배신당했고, 어쩌다가 배신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이내 스스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니 남은 것은 독자의 선택 뿐이다. 여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의 영원한 패배의 기록이 있다. 기록을 읽은 당신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