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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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녹슨 초록빛 곪은 상처를 미친 듯 후벼 파게 하는 사람, 당신은 헐린 가식의 벽에 부어오른 목젖 같은 소리를 내던지며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 달콤한 말조차 썩어갔던 나의 어린 사랑의 마지막을 길어 올리게 만드는 사람, 당신의 시는 항상 내 상처, 끝없이 갈라진 벽에 자랑스레 하얀 방부제처럼 독한 단어들을 뿌려버려서, 또다시 참을 수 없는 벅찬 부끄러움에, 벽 아래 그늘에 몸을 숨기도록 만드는 당신은, 백만 번 접힌 신문지 조각마냥, 별것 아닌 내 안의 아린 이야기를 항상 깊은 곳에서 발견하도록 내 손을 이끄는 당신은, 그리하여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부수는 사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한 숟가락의 밥과, 한 숟가락의 눈물이 만드는 그 어슴푸레 빛나는 안개의 조각 칼이, 당신의 시를 읽을 때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저 나를 바라봐야 하는 나를 부수는 항상 그대로의 나를, 처참하게 부수는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멀쩡히 서있는 나는, 그리고 당신의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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