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가끔씩, 아니 자주, 이 나라는 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기회주의가 소명인 듯한 정치인들이나, 부패가 주식인 듯한 고급관리들이나, 양심은 엿 바꿔 먹은 듯한 부유층들이나, 상아탑의 벽돌을 팔아 끼니를 구걸하는 지식인들이나, 마녀사냥에 재미 들린 키보드 워리어 들이나, 그리고 항상 현실에 굴복하는 스스로를 볼 때면 막연하게 총체적인 개념으로서의 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이 도저히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부정적인 모습만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컨대, 치안유지법이 아직 남아있다든가, 신자유주의 정당이 빨갱이로 몰린다든가, 하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지금껏 몇 종의 한국사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속 시원하게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은 없었다. 물론 여러 차례 한국전쟁의 기록들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화 투쟁들의 기록들에 가슴 두근거려 보기도 했지만, 불만스럽게도 대부분의 책들 속에서 좋은 것들은 당연히 좋은 것이었고, 나쁜 것들은 당연히 나쁜 것이었으며, 그러한 이분법 아래에서, 대중(이든, 이념적 언어인 민중이든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사람)은 이념에 의해 어떤 때에는 혁명적 투사로, 어떤 때는 반동적 소시민으로, 또는 어떤 때에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공란으로 일관성도 없이 그저 몇 마디의 말로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뜨거운 이념들과 멋진 규정들은 보았으나, 엉터리 지도자와 가여운 민중을 막론하고, 생활을 살아가는 그들 사람들의 냄새는 맡지 못하였던 것이다.

관점 없는 역사(책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용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그리웠다.(물론 무엇보다 자료를 찾는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이러저러한 대한민국 대중의 특성을, 혹은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케 한, 절대적으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요인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솔직하고 쉽게 설명한 글들이. 바로 생각보다 약하고 예상보다 어리석은 존재인 인간들과 그들을 억압한 사건들 간의 연계로서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글들 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아야만,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쉽사리 신나하거나, 쉽사리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를 상당부분 채워준다는데 장점 이 있다. 저자는 그의 '최대의 무기인 성실함'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복원해낸다. 곳곳에 인용된 증언들은 오래전에 박제된 인물들과 사건들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건들에는 기본적으로 두세 가지 관점에 의한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된다. 예컨대, 419혁명의 과실을 취한 사람들이 '가장 실천이 늦었던 서울의 명문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국민 개조 작업이 결과적으로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응시함으로써, 왜 명문대 학생 노동운동가 출신의 국회의원이 이따위 비정규직 법안을 내놓고 그것의 정당성을 조선일보를 통해 홍보하고 있는지, 또는 마치 가미카제가 자폭하듯 수많은 여성들이 황교주에게 난자를 제공하겠음을 선언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객관을 지향하는 역사관은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형태로서 그것 자체로 보수적 역사관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을 향한 강준만의 노력이 양비/양시론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우선 첫째로, 한국사회가 그동안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문화에 익숙했다는 점과, 둘째로 한국 현대사를 통해 진정한 대중의 민주주의나 혹은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진 적이 전무했다는 사실에 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쓰인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오늘 날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인간성과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보수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보통'이기 위해선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은, ‘우와 정말 새로운데?’보다는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에 가깝다. 그리하기에 열다섯 권의 압박이 극심하기는 하지만(그래서 조금 빼곡히 내용을 채워서 두꺼운 책 다섯 권 정도로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 책은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읽어야만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보수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내용이 여기에 있다. 나아가, 지피지기면 승률이 조금 오르기는 할 터이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에게도 이 책이 꽤나 유용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419나 518에 대한 책을 읽음으로써도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품을 수 있겠지만, 그 점은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금껏 이토록 꿋꿋하게 살아왔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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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동춘 교수가 자신의 책 <전쟁과 사회>를 50만명에게 읽히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변할 것이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 책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진달래와 무궁화가 깔린 사진을 보고 기막혀하던 참이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님의 글은 여전히 반갑습니다. ^^

happyant 2005-12-0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편이 허락된다면,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리고 싶은 책입니다. 십년치씩 선물하려 했으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가격인지라, 좌절.;;;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려진 무궁화에 한번 놀라고, 방송계의 조선일보 에스비에수의 집중과 왜곡에 또 한번 놀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