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 없는 소설이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까지 내리면 그러한 기분은 더욱 극심해진다.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논리로 차분히 비평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울림을 지닌 책을 만나는 것은 물론 두말 할 나위 없이 '기쁜'일이겠으나  - 돌덩이든 쇳덩이든, 쳇바퀴 같은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은 마찬가지죠(이우진식으로읽어야함) - 그것도 때와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뇌까지 스민 무기력 증에 밤새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존 쿳시’의 '추락'은 내가 세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이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에코 페미니즘 적 여성에 대한 본능적 반감으로 별 감흥이 와 닿지 않았으며, 두 번째 읽은 '페테르크부르크의 대가'는 내용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대가의 자의식에 침몰된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그라는 존재를 잊고 있다가, -책장에 꽂힌 책 두 권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 또한 '삼세번‘은 내 유년기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언명령에 가까운 원칙이 아니었던가. - 집어든 세 번째 이 책에서, 나는 끔찍한 먹먹함을 느낀 것이다.

 

일단(그리고 아마도 이 리뷰 내내), 이 책이 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남아공의 흑백 간 완전한 화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잊을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외재적 비평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내가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곳을 한번 여행해 본 적도  없으니, 몇 권의 역사책과 '호텔 르완다'(혹은 ‘부시맨’)정도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연찮게도, 나는 이 책을 지력이 아닌 감성으로 읽었기 때문에, 논리에 의한 딱딱한 리뷰를 뱉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스스로를 속이는 일임과 동시에 재미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역사를 가장 비역사적으로 그린 소설을 다시금 역사를 끌어들여 읽는 것은,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외부에 위치한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것은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 교수의 무력함이었다. 그것은 그를 교수직에서 박탈되게끔 만든 존재에 대한 무기력이 아닌(오히려 그러한 무기력 하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자존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딸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자, 자신의 창조성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다.(물론 역사에 대한 무기력이 가장 크겠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그는 때때로 못이기는 척 - 필사적으로 - 반걸음 정도 나아가 보지만 항상 커다란 장벽에 부딪친다. 그것은 그의 주체적인(동시에 배제적인) 합리성에 대한 벌이요, 그의 폭력적인 남근에 대한 벌이자, 동시에 그의 깨닫지 못했던 오만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내가 루리에게 감정이입했다는 사실이다. 대략 두 배 정도 나이가 많은 늙은이에게(그가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감정이입했다는 것은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손톱만큼이나 잃을게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어지는 의문점들, 나는 내가 저질러야 했던, 혹은 저지르게 될 죄로 고통 받은/을 사람들과 과연 화해 할 수 있을까? 동시에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루시’처럼 나는 용서하거나 계속 견뎌내며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물음이 남고, 풀리지 않는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은 아픈 거다. 그렇다, ‘루리’는 항상 꿈꾸던 오페라를 못 쓰고 헉헉대지만, 나는 이 짧은 리뷰조차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헉헉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은 그것뿐이다.

 

무척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만끽하는 가운데에서도 ‘야만인을 기다리며’부터 품게 된 하나의 껄끄러움은 여전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인 ‘설정’이다. 현실을 가득 매운 화해 불가능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어떠한 캐릭터와 설정을 사용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겠지만, 어찌되었거나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혹은 그래서 역으로 구원하는) 여성으로 귀착되는(주요한 장치인 섹스와 강간을 통해 어찌되었거나 고통 받은 성性은 무엇인가) 남성 노대가들의 소설에서 주로 보이는 설정은 역시나 껄끄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나로선 이 느낌은, 그러한 설정이 아무리 위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해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루리도 살아가고, 루시도 살아간다. 쿳시도 인세 받고 잘 살아가고, 나도 나름나름 잘 살아간다. 정형근도 잘 살아가고, 그에게 고문당한 많은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쿳시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끝이 났지만,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게 남겨진 몫이다. 삶은 역시나 언제나 고된 법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한 층 한 층 지하로 천천히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일 테지만, 이런 CM송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난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한편, 이렇게 말하는 거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즐기시지 못한 게 있으시면 자유롭게 즐기세요.’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5-08-2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한 권으로 조용히 마무리한 작가로군요. ^^;
이백오십구만층까지 추락하기, 라니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요.

happyant 2005-08-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포인트는 '지하'라는 것과, 한층한층 천천히 추락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