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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 "과학 시대"를 사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 기사 읽기
이충웅 지음 / 이제이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워낙에 머리 속이 ‘문과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라 그 동안 신문이건 잡지건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돌려버리거나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가 일쑤였다. 어렸을 적 ‘과학 동아’를 꾸준히 보지 않았던 탓인가, 과학은 내게 너무나 멀고도 먼 무엇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과학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라는 발언을 보고, ‘그것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만든 프리츠 뭐시기가 한 말과 비슷하군, 파시즘 스러워.’ 라고 한마디 중얼거려 주는 것이 지난날 내가 생각했던 ‘과학에 대해(혹은 미디어가 생산하는 과학 관련 기사에 대해) 내가 가져야할 충분한 교양 수준’이었으니 나의 무지를 설명할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어쭙잖게 미디어 관련 학문 전공자라 자신을 내세우며, 사회민주화 이후 언론의 기업화와 함께 광고 수익을 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사의 연성화가 어쩌고저쩌고, 의제설정기능을 통한 관심사의 조작이 어쩌고저쩌고, 왜곡, 선정성, 인터넷 언론의 상업성이 어쩌고저쩌고, 이러한 뻔한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언론의 비판적 독해를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언론을 통해서 유통되는 과학에 대한 이 거대한 무지를 나는 반성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일상/비일상적 판단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과학 자체 혹은 과학과 관련한 기사들에 대해 말이다. 모르니, 그게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알 리가 있나.
제왕절개, 우울증, 혁신적인 기술들, 유전자 조작 식품들, 편도선, 흡연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언론이 쏟아내는 상투적인 기사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주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는가. 이것은 “근대 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따위의 한, 두 마디 당위적인 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개별 사안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과 세부 사항에 대한 논리적인 판단력이 요구되는 구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사회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과학을 바라보고 가치판단 할 수 있는 ‘시선’이자, 과학과 관련한 텍스트를 제대로 독해해 낼 줄 아는 ‘실력’이다. 이것을 체득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학과 관련한 서적들을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읽어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과학이 현실에서 유통되는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는 것이다. 이충웅의 저서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후자의 방안을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교재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알게 모르게, 첫 번째의 방안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책은 다양한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현실 적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잘 설명된 포토샵 책 펼쳐놓고 바로바로 사진 수정하듯 개별 기사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인 비판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학섹션의 기사를 읽을 때의 시야가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논리학 서적처럼, '실험 과정상의 추론의 타당성', '균형적인 시선', '신비화', '오역' 등등 신문 기사를 읽을 때 머릿속에 담고 한번씩 고민해봐야 하는 원칙들이 각각의 단락 속에 예시문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책의 마지막 한 장을 아예 황우석 박사와 관련한 근래의 줄기 세포 연구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근래 언론에 가득한 상찬이 뿜어내는 빛을 걷어내고 주어진 사건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시류에 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황우석 신드롬에는 사실 이 정도 고민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흔히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진 책을 보면 딱딱하다는 생각에 지겨워지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러한 위험을 다행스럽게도 피해간다. 일단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지겹지 않은 것은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일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콩, 바퀴벌레, 날씨, 저자는 첫 번째 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다룬다. 암, 흡연, 우울증, 저자가 두 번째 장에서 다루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과학은 우리의 일상과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유명 철학자들의 말이 이데올로기로서(누구의 이데올로기이든) 우리의 일상에 작용한다면, 과학은 우리가 살을 맞대는 현실 그 자체, 혹은 우리 몸의 생체 기관 자체에 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세 번째 장에서 ‘미래’와 관련된 이슈로 나아가는데, 그가 다루는 속도, 민족, 굶주림 등등의 개념은 흡사 사회과학에 더 어울리는 문제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까의 깨달음과 더불어, ‘삶’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인문학도 물론) 오늘 날의 분과학문체계처럼 구분된 형태가 아닌,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지루해지지 않는 또 다른 큰 이유는, 이 책이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과학 기사에(혹은 과학 자체에) 접근하면서도, “학문 간의 '장벽'을 깨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공은 외부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역설하는 저자의 소개 글에서 언뜻 스쳐지나가는 '저자다움'이 책의 곳곳에 박혀서 생동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사의 분석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하되, 스스로의 관점에서 문제제기 해야 할 부분에는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이러한 ‘저자다움’은 책의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이 책이 무색무취한 논리학 서적의 한계에 갇히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수십억 달러 규모의 바퀴벌레 퇴치 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 퇴치 업체들이 바퀴벌레 멸종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인간에게 해롭다고 알려진 바퀴벌레 종류는 몇 종 안 되기 때문이다.'(80p), '과거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영역들을 의학적으로 ‘규정’하고, 의료적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114p) '인체의 자기 조절 능력에 대한 불신은, 조급하고 과도한 의료적 개입 속에서 강화되어 왔다.'(128p) '굶주림은 저급한 기술력 보다는 지배자의 피지배자에 대한 착취나 환경 파괴와 더 연관성이 깊다는 증거도 많다'(183P) '관계의 문제는 사회에서의 ‘권력’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에, ‘예측’의 공표는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종 그것은 선전과 선동의 수단이 된다. 혹은, 현실을 잊는 ‘마취제’일 때가 있다.(205p)
말하자면 이 책은 말 그대로 대체로 ‘엉망’인 한국의 과학을 주제로 한 기사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저자가 자기 스스로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과정이다. 분과학문간 배타적 장벽을 깨는 것이 그 운동의 하나이며, 미디어가 쏜 ‘열광’의 빛에 가려진 과학에 ‘성찰’을 부여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이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저자가 과학을 다루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과학을 향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가다듬어 본다. 어찌 보면 좋은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방안은 뻔하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비판적이 되고, 더 많이 세상과 부딪칠 것. 한편, 이 책의 결론은 하나다. 과학기사든 또 다른 어떤 기사든, 믿지 마라. 스스로의 손과 머리로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