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밖은 흐릿한 듯 하다. 나는 무슨 일인지 밤새 잠을 설쳐 일어나는 게 힘들다. 이럴 때 마냥 퍼지지 않게 동행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오늘은 다시 도보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아무래도 동행자의 체력이 걱정이다. 어깨 수술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보충수업이 끝나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바로 오기도 했고, 걸으면 첫날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달리 힘든 내색 없이 신고 있는 샌들이 잘 맞을지 모르겠다는 한마디만 툭 던진다. 오늘 걸어야할 거리는 김제에서 익산까지 20km 정도! 무리하지 않고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다.

   숙소를 나오니 흐릿하던 날씨가 햇볕을 쏟는다. 맞은편 김밥집에 들러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김제시의 변두리를 한바퀴 돌아 나와 본격적으로 국도변에 올라섰다. 동행자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걸으니 지루하지 않고, 한결 여유가 있었다. 익산가는 도로는 4차선이라 차들이 쌩쌩 달렸지만, 거기에 지지 않고 우리는 씩씩하게 걸었다.

   적당한 시간이 되면 걷고 있던 가까운 마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으나, 점심을 사 먹을 수 있는 마을은 나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도로 갓길에서 파는 복숭아 두 개를 사서 나눠 먹으며 기분 좋게 걸었다. 햇볕은 여전히 뜨겁지만 혼자서 걸을 때보다는 훨씬 좋았다. 이야기의 소재도 무궁무진해서 거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오후 1시쯤 더위를 피해 근처의 벽성대학으로 들어갔다. 이왕 들어선 거 해가 좀 기울어 더위가 한풀 꺾이면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대학은 꽤 넓은 캠퍼스였지만 우리의 예상대로, 여느 시골 마을보다도 더 조용했다. 과연 이곳에 대학이 들어설 만큼 수요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도 들었으나, 몸이 더 지친 우리들은 텅 비어 있어서 더 좋은 도서관 옆의 휴게소에 진을 쳤다. 먼저 음료수와 물을 마시고는 신문지를 깔고 눕고, 간이 의자를 끌어다 누워 더위를 식혔다.

   세 시가 좀 넘어서 다시 길을 나섰다. 햇살은 아직도 맹렬한 기세였으나, 이건 허장성세임이 틀림없다. 오늘의 저 태양은 이제 곧 우리의 발밑으로 먼저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뜰테니 그건 내일 생각하면 될 문제다. 오전보다 발걸음이 훨씬 가볍다.

   벽성대학을 나오면서 예정이 없던 도로로 들어서고 말았다. 드문드문 차들이, 걷는 사람이 심심하지 않게 다니는 옛날길이었다. 엉뚱한 길로 들어선 것이 오히려 우리에겐 더 좋았다. 걸어가고 있는 정면에는 저 멀리 익산의 시가지가 눈에 들어오고, 길 양쪽으로는 탐스러운 포도밭이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걸었다. 사실, 포도밭으로 불쑥 들어가 몸을 숨기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 무척 힘들었다.

    익산터미널에 도착한 게 오후 5시쯤이었나 보다. 유달리 으리으리한 모텔들에 조금은 주눅들어 있던 우리들의 눈에 숙박 2만원이란 펼침막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반신반의하며 찾아가니 정말 그랬따. 인터넷이 되는 방을 2만 5천원에 구했다. 들어가서는 이어지는 감탄사! "우와!', "우와!"

   익산까지 왔으니 미륵사지를 빼놓을 수 있으랴 싶어서 서둘러 다녀오기로 했다. 버스타기가 왜 그렇게 힘들던지... 정류장을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타려던 버스의 기사님께서 미륵사지는 반대편 정류장에서 타야한다고 말씀하시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다시 반대편에서 또 한참을 기다려 탄 버스! 한참을 달려 미륵사지에 도착했으나, 이미 어둑어둑해서 제대로 구경할 수도 없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때쯤, 저 앞에 아슴프레하게 서 있는 미륵사지 서탑이 그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륵사지탑은 2001년부터 해체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지금껏 기약도 없이 계속되고 있어서 볼 수도 없었다. 안타까웠다.

   허탈한 마음만 가득 안고 밤늦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동행자의 끈질긴 노력으로 익산까지 오는 승용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제대로 점심도 못 먹은 우리는 익산역 부근에서 뜻하지 않게 훌륭한 저녁을 먹은 것으로 행복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방안에 인터넷이 있다는 핑계로 늦게까지 지금껏 밀린 여행기를 적었다. 내일은 군산을 거쳐, 충청남도의 장항읍, 보령시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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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1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느티나무님! 지금 익산이신 건가요? 우오우오우오, 쫙쫙쫙! 환영합니다!!

푸른나무 2005-08-1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들게 한 여행은 그 이상의 가치와 보람과 삶의 의미도 가져다줄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 우리집의 편안함을 다시 한 번 만끽하는 중..강아지도 먼 여행에 지친듯 오자마자 늘어져 쉬고 있네요.
지유인이 되어 누빌 먼 길에 가벼운 발걸음과 축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