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말이지 무지 더웠다. 출발하기 전에 창밖을 얼핏 보니 하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게 '오늘도 날씨가 돕는구나' 싶었는데, 걷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이 점점 걷히더니 말 그대로 햇볕이 작열하였다. 오늘은 숙소를 나오니 바로 떡집이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경단을 사서 배낭에 넣고, 수퍼에 들러 마실 물을 사서 아침 준비를 했다. 

   그래도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해서 오후 1시까지 쉬지도 않고 꼬박 걷기만 했다. 중간에 마땅히 쉴 곳이 없었던 탓이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오는 마을에는 어르신께 여쭈어도 그늘이 있는 자리가 없다는 말씀 뿐이고, 멋진 정자가 있는 마을은 도로에서 한참 들어가야 해서 포기했다. 그러다 보니, 세 시간 반 동안 15km를 꼬박 걸었다. 영광읍에서 고창군 대산면까지.

   정말, 대산면사무소를 앞둔 마지막 4km 정도는 오기로 버텼다. 하기야 버티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도 없었다. 자외선 차단크림은 진작에 땀을 타고 흘러내렸는지 피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사람을 금방 지치게 만들었다.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더,하며 암시를 걸었고, 그래도 시원한 공기가 섞여서 올라오는 아스팔트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디디며 걸었다.

   과정이 힘든 만큼 목표로 했던 곳에 이르자 짜릿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면사무소 근처의 수퍼에 들어가 생수 한 병을 사고, 수퍼 앞에 앉아 가방을 풀고, 신발을 벗고 물을 마셨다. 그늘에 앉아 지나 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아마도 나는 그 때 세상을 다 가진 자의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정해 준 목표가 있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내 몸이 기어이 꾹꾹 눌러가며 그 목표에 다가갈 때의 뿌듯함. 남들이 알아 주는 근사한 무엇도 아닌, 소박하고 보잘 것 없기에 오히려 더욱 이겨내기 어려운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여기서 버스를 타고 고창읍내까지 가야한다. 시골의 버스터미널 풍경이 참 정겨웠다. 나는 버스표를 사고 할머니들이 앉아 계신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저 말씀을 건네니, 할머니들께서 이것 저것 물으신다. 목포에서 걸어오는 길이라니까 모두 첫 말씀이, "왜? 돈이 없는겨?" 이시다. 그냥 세상 구경 다니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들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니 시간이 참 잘 갔다. 영광이 가까워서 '굴비'이야기도 하고-한 두릅 사서 집에 부칠까 생각도 했는데, 전화해보고 그만 뒀다- 외할머니댁에 놀러온 손녀딸 자랑도 듣고, 더운 날씨 이야기, 잃어버린 짐보퉁이 이야기... 정말 이야기는 저 주름살 곳곳에 살고 있다 술술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참 이야기 중에 내가 착한 일을 할 기회가 생겨, 놓치지 않고 착한 일을 하니 앉아 계신 분들이 모두 칭찬을 해 주셔서 뿌듯했다.

   고창읍내로 가는 버스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걷다 보면 버스를 타고 창밖의 도로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도 차폭은 좁은가, 길은 곧은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마을에 쉼터는 있는가, 이런 관점으로 보게 된다. 창 밖의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아득해서 내가 걸어갈 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감각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리면 오히려 무덤덤해진다고 했다.

   아무튼 오후에는 기쁜 일이 있다. 고창읍내에 도착해서 터미널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마침 광주에서 고창으로 온 버스에서 안해가 내렸다. 연수 중인데도 2박 3일의 연휴 기간에 같이 있겠다면서 고창까지 온 것이다. 서둘러, 늦은 점심을 먹으며 늘 그렇듯 집안 이야기를 했다. 아직은 고창읍내의 지리를 잘 몰라,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숙소를 구했고, 저녁에는 고창읍성을 찾아 산책을 나왔으나 읍성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도 안해와 낯선 동네를 느릿느릿 걸으니 여행 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내일은 안해가 와 있으니 여기, 고창에서도 휴가를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안해는 도보여행이 무리일 것이다. 더구나 오늘 같은 날씨라면 1시간도 못 가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선운사가 아니래도 고창에는 찾아보고 싶은 데가 참 많다. 내일까지는 안해랑 붙어다니며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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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5-08-14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간 도보로 여행할 테예요.

▶◀소굼 2005-08-1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보고..아 오늘은 사진을 보여주시려나?했답니다;
오늘도 무사히?: )

푸른나무 2005-08-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그렇게 는꼈지만 느티나무님은 참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모는 여리게 보여 거친세상 살아가기 힘든사람으로 보입니다만 조금씩 알수록 못해낼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늘 작은일을 하는 듯 하면서도 거기서 큰 힘과 열정을 느낍니다. 인자는 바다로 가고 지자는 산으로 간다는데 평지를 끝없이 걷는 사람은 지자와 인자를 다 아우르는 사람이 아닐까요?

느티나무 2005-08-1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님, 제가 지금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여름엔 도보여행을, 겨울엔 세계여행을 떠날 겁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꼭 해 보라고 권합니다. 누구에게도 강추!!

느티나무 2005-08-14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요... 사진을 찍고 있기 하지만, pc방에서 그런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네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시간이 되면 꼭 올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진은 아무래도 심심할 듯~~]

느티나무 2005-08-1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나무님은 항상 저에게 칭찬이 과하시다는 단점이 ^^;;
내일 떠나시는 여행이 즐겁고 행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푸른나무님이야 말로 지금도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듯 보이는 분이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