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몸의 여러 곳이 결렸다. 도보여행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 일찍 눈을 떴다가 곧바로 잠이 혼곤히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깨고나니 밖은 환히 밝은데, 정신은 약간 멍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나 이렇지'하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늦었다. 씻고 밖을 나오니 흐릿한 날씨. 반갑다기보다는 고맙다. 빵집에서 빵 두 개를 샀다. 나의 오늘 아침이다.

   오늘은 여유있게 걸을 생각이다. 함평까지는 채 15km가 안 되는 거리다. 무안읍내를 느릿느릿 걸어서 빠져나오니 국도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이런 도로는 위험하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앞을 똑바로 보면서 걸었다. 도로 주변 곳곳에서 무화과, 쨈을 팔고 있다. 저게 좀 팔릴까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데, 심심치 않게 차들이 선다. 나는 무화과를 싫어해서 눈인사만 하고는 그 많은 가게를 그냥 지나쳐 왔다.

  내처 걸어서 함평군으로 금방 들어왔는데, 이제 점점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다. 함평에 들어오니 온통 '나비'와 관련된 광고물 뿐이다. 엄다면의 어느 마을 앞에 정말 근사한 정자가 있어서 앉았다. 바람도 시원스럽게 불어오고, 눈 앞은 싱싱하게 익어가는 벼로 꽉 찬, '함평천지' 들판이다. 또 쏟아지는 잠! 세상 모르고 자다가 시끄러운 아이들 목소리에 깼다. 3남매에다 서울에서 외할머니댁에 놀러온 아이들로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놀이터는 없다는 듯 마을 앞 정자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한참 후에 동네 어르신 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나 나비 축제에 대한 이야기, 농사 지으신 이야기, 시골 동네의 풍성한 인심 이야기들이다. 정자에서 보낸 시간이 두 시간도 넘었다. 이제 서둘러 가야할 때! 함평 읍내까지는 두 시간만에 들어왔다.

   시골 읍내를 한바퀴 돌아본다. 고만고만한 동네다. 이런 시골 동네를 지날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여기서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아마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동네를 이 세상의 대부분이라고 여기며 살지 않았을까? 나는 꼭 농부가 되었을 것만 같다. 그러면 내 삶은 행복했을까?

   숙소를 정해 두고 내일 걸을 거리를 생각해서 조금 더 걷기로 했다. 가방이 두고 나오니 금방 뛰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몇 번 걸어본 경험에 따르면 여기서 무리하면 내일 무척 고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도 한결 여유롭다. 조금 발목이 아플 때까지만 걷지, 뭐! 한 시간 정도 더 걸었지 싶다. 이제 슬슬 해가 지는 것 같다.

   함평읍으로 바로 내려 오지 않고, 아침에 들르려고 마음 먹었던 고막다리 근처로 향했다. 여기서 지도를 챙기지 못한 헛점이 바로 드러나 버렸다. 함평군 학교면. 그래서 농협이름도 학교농협이고, 소방서도 학교소방서, 학교장의사, 학교철물점, 학교식당, 학교상회...지금 생각해 보니 동네의 학교 이름은 무엇인지 못 보고 나온 게 아쉽다.- 학교초등학교? 학교중학교?

   그러나 고막다리까지는 못 갔다. 거리도 꽤 먼 데다가 지도 없이 찾아갈 자신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들어오려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니 퇴근하시는 아저씨께서 부러 차를 세우셨다. 공무원이신 듯 하셨는데, '전라도 사람, 이렇게 친절하다'고 자랑하셨다. 아, 내일쯤에나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 봐야겠다.

   생각보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다 자전거 뒤에 짐을 잔뜩 싣고 둘이나 셋이서 가면서 즐거운 표정들이다. 그런데 자전거도 엄청 빠르다. 걷는 속도에 비할 때 자전거만 탄다면 세상 어디라도 다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빠른 것은 강한 것. 그래서 나는 자전거 탄 사람도 부럽다. 

   그러나 이번 여행길, 나는 누군가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내가 앞질러간 사람은 없다. 앞질러 가지는 않았으되 가기는 갈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이다. 내일은 영광이다.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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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5-08-12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으실 것 같아요. 부럽네요.

비로그인 2005-08-1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박수, 박수! 쫙쫙쫙! 전남의 풍경은 느티나무가 쓴다!! 와, 대단하심돠. 저보다 훨씬 생산적인 휴가를 보내고 계시는군요. 멋있으심돠! 다리 잘 챙기시구요, 마지막까지 평화로운 일주 되시길 바랍니다.

그루 2005-08-1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질러 가지 않아도 가기는 갈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이다.
멋지세요~ ^^

느티나무 2005-08-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가 좀 있어야 하는데, 제가 워낙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요,,ㅎㅎ 그치만 다리가 불편하신 우주님의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도~ 얼른 나으세요 ^^

느티나무 2005-08-1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놀고 먹는 한량 같아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평화로운 일주라... 거 멋진 말씀이시군요. 늘 평화롭게, 평화를 위해 살아야지요.

느티나무 2005-08-1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루님, 끝까지 읽어보셨군요.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