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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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하기 어려워 그냥 형용하지 않아버릴 정도의 못생긴 외모를 가진 여자의 아픔과,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었던 잘생기고 순수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외모가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천박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또 그로 인해 한 사람이 얼마나 크게 상처받고 망가질 수 있는지 알게 한다. 그리고 그 망가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더 큰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이야기 속에는 잘 살아보겠다고 뻔뻔하게 살아가는 이들 앞에 때로는 툭툭 던지고 때로는 뻥뻥 차버리는 말들이 흘러넘친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라던가,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라는 말들은 유머와 함께 진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단순한 재치의 수준이 아니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 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 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위의 대목과 같은, 이 책에 가득한 사람과 사랑을 향한 고민은 공감되는 바가 많다. 같은 생각이라도 다르게 표현될 때, 그리고 적실하게 표현될 때 더 새롭고 깊게 다가오는 것임을 깨닫고 감탄한다. 뉘우친다. 생각을 바꾸게 한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 힘은 관념적인 사유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정직한 부딪힘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인간의 본질을 향한 물음은, 사회 전반에 흐르는 인식의 문제와 인간적 고통의 서글픔,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처절한 아름다움과 잘 어우러져 깊은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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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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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견으로는,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다 용서해 주고 싶다. 나는 벨라스케스를 엘 그레코보다 훌륭한 화가로 보지만 그는 너무 인습적이어서 칭찬하려면 맥이 빠진다. 그에 비해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저 그리스인은 제 영혼의 비밀을 마치 산 제물을 바치듯 우리에게 바치고 있다. 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을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도 기이하고, 복잡하고, 고뇌에 가득 찬 개성을 보여준다.-8쪽

예술이란 정서의 구현물이며, 정서란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9쪽

신비주의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정신병리학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을 알아내는 법이다.-15쪽

어떤 책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봐야 한철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 책을 산 독자에게 그저 몇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또는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애를 썼으며,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하였고,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서평들을 통해 판단해 보건대, 이들 책 가운데에는 심혈을 기울려 쓴 좋은 책들이 많다. 구상에 고심한 책도 많다. 심지어는 평생의 노고를 바친 책들도 있다.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16~17쪽

예술가에게는 보통 사람들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 친구들의 외모나 성격뿐 아니라 작품까지 풍자의 제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22쪽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56쪽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있소. 당신 참 멍청한 사람이오"-65쪽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70쪽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는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77쪽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102쪽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 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191쪽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 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 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 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신령한 힘을 어쩌다 한번 체험하고선 그것을 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돌팔이 의사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192쪽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202~203쪽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의 정신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줄 몰라. 약해서 지배욕이 강하지. 지배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해. 여자는 마음이 좁아요.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추상적인 것에는 화를 내는 버릇이 있어. 마음을 쓰는 건 물질적인 것뿐이야. 관념적인 것은 시기나 하고.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내 아내 생각나오? 블란치도 차츰 같은 수작을 쓰려고 하더란 말야. 자기 딴엔 무한한 참을성을 발휘해서 나를 함정에 몰아넣고 올가미를 씌울 작정을 하고 있었어. 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던 거지. 나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 내가 자기 것이 되어주기만 바랐지. 하기야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오. 난 혼자 있기를 바랐거든."-203~204쪽

"당신은 자신의 확신에 용기가 없군. 목숨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블란치 스트로브는 나한테 버림을 받아서 자살한 게 아냐. 어리석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인간이라 그랬지. 자, 이제 그만하면 그 여자 이야기는 충분하오. 전혀 중요할 것 없는 사람이니까. 갑시다. 내 그림을 보여줄 테니."-205쪽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단편적인 것들뿐이다. 나는 이미 소멸해 버린 동물을 뼈 하나만 가지고 그 형상뿐 아니라 습성까지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물학자와도 같은 입장에 있다.-246쪽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한시도 평안하지 않았지요. 그 열정이 그 사람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녔으니까요. 그게 그를 신령한 향수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그의 마음속에 들어선 마귀는 무자비했어요. 세상엔 진리를 얻으려는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갈구하는 나머지 자기가 선 세계의 기반마저 부셔버리려고 해요. 스트릭랜드가 그런 사람이었지요. 진리 대신 미를 추구했지만요. 그 친구에게는 그저 한없는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276~277쪽

방바닥에서 천정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원시적인 무엇, 무서운 어떤 것이 있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따.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293쪽

<달과 6펜스>도 광적인 천재를 소재로 하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기본 패턴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편이다. 순진 세계와 체험 세계, 자연과 도시의 대조, 거기다 저주의 병을 통해 낙원의 비전이 깃들인 위대한 예술이 탄생한다는 이야기는 낭만적 환상을 자극한다._작품 해설. 송무, <예술에 사로잡힌 예술> 中-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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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절판


누구였더라? 스페인, 아니 아르헨티나 작가였나. 이젠 작가 이름 따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누군가의 소설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작가가 강변을 산책하다가 한 젊은이를 만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강변에서 만난 그 젊은이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21쪽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42쪽

모르긴 해도 6.25나 월남전에서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놈들이 다 밤잠을 설치고 있을까? 아닐 거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44쪽

"봐요, 다들 재밌어하시잖아요."
은희는 내게 말했다. 은희는 모른다. 내가 추구하던 즐거움에 타인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쁘을 얻어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이들이 햄스터를 사들이듯이, 내 안의 괴물도 늘 먹이를 필요로 했다. 타인은 그럴 때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 노인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웃는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무방비로 내준다는 뜻이다. 자신을 먹이로 내주겠다는 신호다. 그들은 힘이 없고 저속하고 유치해 보였다.-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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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202
너대니얼 호손 지음, 곽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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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와 즐거움과 어린아이의 환희 사이에는 외견상 많은 공통점이 있다. 심오한 유머 감각도 마찬가지지만, 지성 또한 즐거움과 별 상관이 없다. 늙은이에게나 어린아이에게나 즐거움은 겉에서 반짝거리고, 푸른 가지든 썩어 가는 잿빛 줄기든 밝고 유쾌하게 보이게 하는 섬광과도 같다. 그러나 한쪽이 진짜 빛이라면, 다른 쪽은 썩어 가는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광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23쪽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 환영들이야말로 가엾은 목사가 지금 상대하는 가장 진실되고 실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목사의 삶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거짓되어 우리 주위의 현실이 어떠하든 하늘이 영혼의 기쁨과 양식이 되도록 해놓으신 현실로부터 그 정수를 빼앗겨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말할 수 없이 비참할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온 우주가 거짓이어서, 만져도 모르고 손으로 쥐면 오그라들어 없어지고 마는 법이다. 그리고 목사 자신이 거짓의 빛 속에 있는 한 그는 한낱 그림자, 혹은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딤스데일 목사를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그의 영혼에 깃든 고뇌와 그의 얼굴에 나타난 거짓 없는 표정뿐이었다. 만약 그가 미소를 짓고 즐거운 표정을 지을 줄 아는 힘을 찾아냈더라면 딤스데일이란 사람은 진작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183쪽

가장 대담한 사색을 하는 이들이 종종 가장 조용히 사회의 형식적인 규범을 따른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들은 사상에만 안주한 채 그 사상을 피와 살을 갖춘 행동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 헤스터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듯했다. 그러나 만약 어린 펄이 영적 세계로부터 그녀에게 오지 않았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헤스터는 앤 허친슨과 손을 잡고 어떤 종파의 시조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예언자로 자신의 위상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청교도의 토대를 뒤엎으려 했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준엄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당연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의 사상적 열의는 아이의 교육에서 어떤 돌파구를 발견했다. 하늘은 이 아이의 기질로부터 여성의 싹과 꽃을 피우는 일을 헤스터의 손에 맡기고서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소중히 키우게 했다.-205쪽

"내겐 용서할 힘이 없소. 당신이 말한 그런 힘 따윈 내게 없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지난날의 믿음이 되살아나 우리의 모든 행동과 괴로움을 설명해 주는구려. 첫발을 잘못 디뎌 당신은 악의 씨를 뿌렸소. 그러나 그 악의 씨가 이후로는 어두운 필연이 되어 버렸지. 내게 잘못을 저지른 당신을 세상 사람들은 죄받을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착각이오. 악마의 손에서 그 임무를 낚아채긴 했지만 나 또한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니오. 이건 우리의 운명이오. 검은 꽃은 피는 대로 그냥 두시오! 이제 당신은 가던 길을 계속 가고, 그 자에 대해서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216~217쪽

사랑과 증오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찰하고 연구해 볼 만한 흥미로운 주제이다. 사랑과 증오가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면 극도의 친밀감과 마음의 이해를 요구하게 된다. 사랑과 증오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른 인간에게 애정과 영적인 삶의 양식을 의존하게 만든다. 사랑과 증오는 그 상대가 없어지고 나면 죽도록 사랑하는 자나 죽도록 증오하는 자 모두를 쓸쓸하고 황폐하게 만든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랑과 증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같다. 다만 하나는 천국의 광채 속에서 보이고, 다른 하나는 어스레하고 섬뜩한 불빛 속에서 보인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비록 서로가 희생자이긴 했지만 이승에서 쌓인 증오와 반감이 영적 세계에서는 황금빛 사랑으로 변해 있는 것을 늙은 의사와 젊은 목사는 뜻밖에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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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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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농가의 친구들은 이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시체가 실린 머스탱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물론 우려할 만한 일이었지만, 알란은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며,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190~191쪽

영국령 인도는 벌써 균열이 가고 있었다.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틈만 나면 싸웠고, 그 중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 빌어먹을 마하트마 간디는 뭔가 못마땅한 게 있으면 먹는 걸 중단했다. 세상에 무슨 그따위 전략이 다 있는가? 윈스턴 처칠은 간디를 나치의 폭탄이 쏟아지는 영국 땅에 데려다 놓고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고 싶었다.-235쪽

-뭐? 정말로 당신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셨소? 백 살이나 된 양반이?
-아니, 내가 미쳤소? 이 나이에 히말라야를 넘게? 내가 항상 이렇게 백 살이었던 건 아니야,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
-아, 그래서요?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 가는 법이지.

알란은 철학자처럼 말했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자, 그 어린 정일이를 예로 들어 보자고.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엉엉 울어 대던 그 불쌍한 녀석이 이제는 자라서 일국의 우두머리가 되었고......-441~442쪽

-어떻게 무게가 5톤이나 되는 코끼리를 비행기에 싣고 갈 생각이죠?

베니가 힘없이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긍정적인 사고를 발휘한다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거야.
-그리고 우리 중 대부분에게 유효 여권이 없는 문제는요?
-그것도 긍정적으로 사고해 보라고!
-내 생각에 소냐는 5톤이 넘지 않을 거야. 많아야 4.5톤 정도?

예쁜 언니가 말했다.

-이것 보라고, 베니! 이게 바로 긍정적인 사고야! 우리 문제의 무게가 벌써 0.5톤이나 줄었잖아?

알란이 말했다.

-어쩌면 좋은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해!

예쁜 언니가 말을 이었다.

-나도 그래! 전화 좀 쓸 수 있을까?-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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