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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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 아무리 먹여도 살이 잘 안 쪄. 남조선 건달들은 덩치도 크고 피둥피둥한데 말이야. 그뿐인가. 여기 리 부장 말고는 암만 비싼 옷 갖다 입혀 놔도 티가 안 나. 땟국물이 빠지지 않는 거지. 그게 다 마음의 소치예요. 마음의 소치. 어려서부터 먹고 자란 게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이놈들 가슴속이 영 허전하고 아리아리한 거야. 이남에 내려온 우리 북조선 인민들에게는 이방인의 서러움이 알게 모르게 깊은 거라. 그래서 먹어도 살이 안 되고 입어도 멋이 안 나오는 거야. 에이, 비장하게 생각해서 좋을 것이 뭐 있겠소? 이게 다 나이가 들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야. 어서 죽어야지. 새 나라인데 헌 사람들은 얼른 죽어서 길이 돼야지. 좀 더 분투하면 이북 인민들도 언젠가는 당당하게 살 날이 오지 않갔어? 명도, 너 애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있는 거야?"-61~62쪽

오남철은 클래식광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은은하게 흘렀다. 오남철은 대책이 없는 변종 미학주의자였는데 본래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을 요소들이 그의 괴팍한 취향과 뒤섞이면 좋고 나쁨을 따지기 힘든 희한한 양상을 드러냈다. 이를테면 개고기와 포도주처럼. 대동강 단장과 고전음악의 결합도 마찬가지였다. 오남철 안에는 상극하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했다. 그는 조광조처럼 원칙을 내세우며 괴로워했지만 보들레르처럼 탐미에 미쳐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과 녹지 않는 얼음의 충돌에서 비롯된 분열이 바로 오남철이었다. 신봉하는 사상을 위한 살인을 예술 작품 감상하듯 저지르는 인간이 그였다. 사탄은 성당을 허물다가 수녀를 짝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68~69쪽

"리 부장. 자본주의는 화내는 게 아니야. 못 본 척하는 거지. 그럼 남조선에서 즐거울 수 있어."-81쪽

북조선에서는 종교가 실제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원체 세상이 어렵고 뒤숭숭하다 보니 점술 행위가 암암리에 성행했다. 어느 점쟁이가 용하다 싶으면 소문이 쫙 퍼졌다. 호위사령부의 모 중장이 신의주에 다녀오면서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중장의 삼대독자가 신장병을 앓아 군단 병원에서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는데 이 소년이 맥을 짚고 주문을 외워 감쪽같이 나았다는 거였다. 중장의 사택 앞에는 정치위원들의 마누라들이 줄을 섰다. 그녀들은 소년의 황홀한 언어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었다. 소년은 어느새 북조선의 작은 라스푸틴이 되어 있었다. 강성 대국을 목표로 하는 당의 정수들이 소년의 점괘에 따라 승진도 하고 숙청도 되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소년은 몇몇 어르신들과 함께 요덕수용소로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소년이 바로 장군도령이다.-116쪽

......통일 되기 전에는 사는 게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고통이 뭔지도 잘 모르겠어. 내가 형이 하나 있었다. 있으나 마나 한 직업이 시인이었지. 내 입에서 쏟아지는 잡소리들 때문에 행여나 날 우러러보지 마라. 대부분 형이 나한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던 것들 표절이니까. 통일되기 딱 3년 전에 죽었어. 예전 예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요즘 예수들은 지하 단칸방에서 죽지. 형은 너무 많이 알고 있었어. 그걸 다 감각하느라 힘들어하다가 죽은 거야. 너무 많이 알고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해. 힘이 없으면 말을 하면 안 되는 거고. 왜? 죽으니까. 회사원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를 중요시하거든. 형이 요절해서 부모를 잃은 것 같았는데, 늘 서럽고 가슴 아프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 더러운 꼴들 안 보고 죽은 형이 부럽다.-157쪽

"......오 단장이 장군도령을 끌고 다니는 것도 그가 과학을 잃어버린 미치광이기 때문이야. 사람은 말이야, 자기가 뭔가를 봤다고 믿잖아? 그러면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그래서 주체100년이 되는 해에 망태기를 쓴 거야. 과학이 아니라 미신이었기 때문에 망한 거라구. 상처만이 전부인 세상이 있다고 치자. 그러한 곳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는 선지자 취급을 받게 되어 있어.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문득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절망과 분노 속에서 구원할 만한 해답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홀린 듯 죄책감 없이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게 돼. 우리 대동강들의 내면이 그가 비슷하다. 너와 내가 그렇다고. 북조선판 성삼위일체가 무너진 거지. 성부, 김 주석. 성자, 김정일 장군. 성령, 주체사상. 신앙은 공포에서 나오는 거야. 삶은 죽음보다 안전하지가 않아."-181~182쪽

리강은 자신이나 윤상희나 긴장을 풀어야 했기에 말했다.

"함경도에서는 결혼식 날 신부 집에서 신랑 밥 속에 삶은 계란을 묻어 둡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그 삶은 계란을 남겨 주는 양을 보고 신랑이 신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하는 거죠. 신랑 집에서도 그래요. 신부 밥 속에 삶은 계란을 넣어 두고 신부가 식사를 마쳤을 때 그 계란의 남은 모양을 확인한 다음에야 신랑이 식사를 시작해요."

"예쁜 풍속이네요."

"치사하죠. 계란 하나 먹는 걸 가지고 사랑하느니 마느니를 따지고."-203쪽

"거, 낯설게 미친놈일세. 그런데 왜 그러는 거냐고?"
"......애인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고 이북 여자도 아닌데......그냥, 나 같아서 그럽니다. 저 여자가 나 같아서요."
"저 여자가 너 같아? 네가 저 여자 같고?"
"네."
"아휴, 쪼다. 그럼 저 여잘 네가 사랑하고 있는 거네."
"무슨 소립니까?"
"야. 내가 너고 네가 나인 건 사랑인 거야, 사랑."-215쪽

리강은 두 죽음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려 했던 소년은 마구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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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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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2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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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구판절판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51쪽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살랑이는 물풀에 걸려 가동거리는 자디잔 은빛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가 얼마나 갸냘픈지, 바위 뒤 그늘진 곳에 누군가가 산란해놓은 구슬 같은 젖빛 알 무더기는 얼마나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굴절된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지, 물고기들의 비늘은 얼마나 영롱한 색깔이며 만지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지, 또 어떤 물고기는 만져보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우며 점착성마저 있어서 손대는 순간 그대로 빨려들어 하나가 될 것만 같은지,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는 물고기들과 자신이 서로의 살 한번 닿기만 하면 얼마나 오묘한 직감으로 영력 내지는 신앙에 가까운 몸짓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하려면 해류를 강 속으로 끌고 들어가야만 가능했다.-3~64쪽

"예쁘다."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슴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든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131쪽

엄마, 내가 인어를 봤다니까? 그 아저씨는 분명 바다 깊이 궁전에 사는 인어 왕자님일 거야. 그런데 마녀가 준 약을 먹고 두 다리가 생긴 거지. 인어 왕자님은 누구를 위해 다리를 얻은 걸까? 그러면 역시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버릴까?-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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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 이청준 동화 파랑새 사과문고 56
이청준 지음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6년 6월
절판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할머니께선 우리 곁을 떠나시더라도 할머니의 모든 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자꾸만 작아져 간 할머니의 모습 뿐,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할머니의 영혼은 옛 육신의 집을 빠져 나가 어디선가 다시 새 아기의 모습을 얻어 예쁜 갓난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된단다. 마치 나비의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고운 나비로 변하여 헌 고치를 벗고 날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더 작아지시는 걸 걱정스러워 할 일만은 아니란다. 할머니의 모습이 아주 작아져서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섭섭하고 슬픈 일이지만, 한편으론 기쁘고 다행스런 일일 수도 있잖겠니? 그것은 할머니의 영혼이 낡은 옛날의 모습을 벗고 나가 다른 새 갓난아기로 태어나실 준비의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26쪽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그 나이와 함께 지혜가 쌓이는 것은 은지도 전에 들어서 아는 일이겠지. 그런데 지혜가 마음 속에 가득 찬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지혜가 마음 속에서 삭아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 넘치고 싶은 사랑이 된단다. 사람들은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착하고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할머니께서 늘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주시고 ,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 주시고, 아픈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것, 그 모두가 할머니의 맘 속에 가득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흘러 넘쳐서 하시는 일들이란다. 그러니 할머니께서 은지를 위해 자신의 나이를 나눠주시고 지혜를 나눠 주시는 것도 다 은지에게로 흘러 넘치려는 할머니의 사랑 때문인 거지.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할머니는 자신의 키가 작아지고 몸집이 작아져서 점점 어린아기가 되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실 수가 있으신 거란다. 그러니 할머니께서 다시 어린아기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될 일이나 그 영혼이 다른 곳에서 새 아기로 태어나시게 될 일들도다그사랑때문에그렇게하실수밖에없는일이란다."-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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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지음 / 홍성사 / 2000년 11월
품절


"...육신의 눈이 멀었다고 세상이 모두 암흑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세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요, 그 두번째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밝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눈입니다. 그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의 눈으로써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그 영혼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받음이 유익이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우리에게 그 영혼의 눈을 일찍 뜨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차라리 그 육신의 암흑을 통하여 누구보다 일찍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끔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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