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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 전후 - 1940-1949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보면,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덤블도어 교장이 나온다. 살아온 세월을 반영하듯 얼굴이 온통 옥수수수염 같은 흰 털로 수북이 덮여있는 그는, 때때로 머릿속의 기억들을 회오리치는 물 같은 형태로 뽑아내어 교장실의 은쟁반 안에 담아 두곤 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해리포터를 그 기억 안으로 들어가게 해, 시뮬레이션 형태로 자신이 보고 느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를 보면서, 이 은쟁반이 자전적 에세이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숱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남겠다고, 혹은 떠나겠다고 경쟁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막연히 마법의 은쟁반이 있어서 다 풀어놓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일기를 쓰곤 하는데, 확실히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기억을 그러안고 있던 부담도 내려놓아진다. 나중에 다시 글을 보면 여전히 서글플 때도 있고, 우습고 허탈할 때도 있지만, 훗날 ‘객관적 정황은 기억하지 못한 채 당시의 감정만 남아 정체 없이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의 해방 전후』를 읽으며, 가장 유익했다고 느낀 점은, 해방 전후를 살아야 했던 세대의 그 ‘정체 모를’ 정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록과 교환을 통해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고자’(29) 했던 작가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고생했지’라는 상투적인 한 문장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던, 식민지 시기의 어린이 강제 노동, 창씨개명, 학교 교육과 교사들, 학생 간의 집단적 움직임, 문학에 목마른 소년의 눈에 띄던 몇몇 문학잡지 등을 풍속화 보듯 세세히 관찰하고 나니 조금 속이 후련해진 기분도 든다. 더불어 그저 주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일상’이, 생기롭게 다가왔다.

 

  책에서는 자기 자신보다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훗날에라도 아름답게 여겨질 법한 그리운 것들에 대한 서술이 워낙 없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당시 교사들의 야만적인 태도나 “기상천외한”(153) 내용을 가르치는 무지함에 관한 토로가 많은데, 그렇게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유형화되어 있으면서도 “했는지 모른다”(147) 라거나 “별 수 없었다”(155)라는 식의 사족으로 유년의 이해에 대한 한계를 덧붙이고 있다. 한숨짓고 눈물 흘리고 욕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때문에 덧붙이는 자신 없어 보이는 말들이 껄끄러웠는데, 또 한편으론 가까운 과거를 쉽게 단정함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거나 스스로 경망스럽지 않고자 노력한 것인가 싶다. 그래도 좀 더 자기 기억 속으로 단호하게 들어가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썼더라면 독자의 공감을 더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기억의 닳은 흔적에서 비롯되는 변형이나 왜곡은 이미 머리말을 통해 독자가 감안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시 작가의 말마따나 “유년기 활동사진의 최고 서정시”(50)로 언급하고 있는 증평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오기하라 선생의 “검정 외투 차림으로 함박눈 속에 서 있던”(50) 모습은 마음에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것이라곤 느끼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추운 겨울의 기억이라 더 따뜻하게 기억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서정시 때문에 나는 많은 것을 불문에 부칠 수 있었다”(50)는 작가의 고백은,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어준 고마운 기억들을 돌이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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