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지음 / 홍성사 / 2000년 11월
품절


"...육신의 눈이 멀었다고 세상이 모두 암흑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세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요, 그 두번째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밝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눈입니다. 그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거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의 눈으로써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그 영혼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받음이 유익이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우리에게 그 영혼의 눈을 일찍 뜨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차라리 그 육신의 암흑을 통하여 누구보다 일찍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끔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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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집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1월
품절


차례
목수의 집
날개의 집
내가 네 사촌이냐
아우 쌍둥이 철만 씨
시인의 시간
돌아온 풍금소리
뚫어
빛과 사슬
오마니
나이의 짐
작가의 말-시간 지우기의 흔적
해설-장인성 혹은 근대의 저편. 이광호-7쪽

사람의 심성과 공동선의 질서를 함께 읽어나가야 하는 소설 쓰기 일이 그에겐 늘 천형처럼 버거웠다. 그것은 그의 허약한 정신태에 대한 끊임없는 고문이자 감당하기 어려운 육신의 노역이었다. 더욱이 나이 50줄로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밀어닥친 정보화 사회의 물결과 몰개성적 가치관은 그의 창작 욕망과 세상 읽기의 의욕을 무참하게 소진시켜갔다. 유통과 대량 모방 복제 위주의 획일적 생산성은 그가 애초에 꿈꿔오던 소설 창작의 본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글쓰기의 관심사도 아니었고 능력 안의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도 그 달갑잖은 새 풍조를 뛰어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는 자기 모방, 거듭된 좌절감 속에 끊임없는 자기 마모와 소진만을 일삼고 있었다. <목수의 집> 中-13~14쪽

"한번은 영감님이 근 한 달 가까이나 종적이 없이 사라지고 말았더래요. 젊을 때는 으레 그렇거니 반포기를 하고 지냈지만 나이가 나이다 보니 식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었겠어요. 그런데 이곳 저곳 아무리 수소문해 찾아봐도 소식을 알 수 없던 양반이 한 달쯤 뒤에사 나타나선 이웃집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대수롭잖게 말하더래요. 내 참, 별 싱거운 작자들을 다 보았구먼...알고 보니 그 무렵 서슬이 시퍼렇던 신군부 사람들이 어떻게 소문을 알고 급히 영감님을 징발해간 거였더라구요. 영감님을 데려가선 저희들 높은 분의 시골 별장에다 정자를 한 채 지으라더래요. 정자를 짓는데 육모정이나 팔각정이 아니라, 자기들 권력 연대를 상징하는 오각정으로 말예요. 그렇잖아도 위인들의 마구잡이식 처사에 비위가 잔뜩 뒤틀린 영감님, 그럴 수는 없다 하신 거예요. 세상 천지에 머리털 나고 오각지붕을 인 정자는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다. 그것은 정자의 법식이 아니다, 나는 못 짓는다...하지만 그 사람들이 쉽게 영감님 말을 알아듣고 생각을 고치려 했겠어요? 법식이야 어찌 됐든 자기들은 오각 정자가 필요하니 당신은 시키는 대로 오각 정자를 지어라,-23~24쪽

오각 정자를 짓지 않고는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 결국 우리 뜻대로 따라야 할 일을 웬 쓸데없는 고집이냐...위협을 해봤다 달랬다 별 짓을 다 했지만 영감님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은 거예요. 날 잡아잡숴라, 나는 죽어도 오각집은 못 짓는다...그렇게 한 달을 버텼다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위인들을 이기고 풀려났다는 거예요. 어때요. 그 고집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 고집으로 일생 동안 나무집만 지으며 늙어왔으니?" <목수의 집> 中-24쪽

"나 이번에 또 된통으로 혼났네요. 처음에 팔당 쪽으로 집을 옮겨 지을 생각을 할 때부터 어쩌면 쓸모가 있을 듯싶어, 그때 마침 먼저 집을 부수고 나간 이웃 헌 한옥집의 들보를 하나 얻어다 미리 옮겨 놓은 게 있었어요. 그런데 영감님이 그걸 여태 본체만체 아무 말이 없더니, 며칠 전에야 비로소 그것을 처음 본 물건마냥 저건 무엇이냐는 거예요. 눈치가 심상찮아 내 깐엔 한껏 조심조심 사실을 말했더니 영감님이 처음엔 이 집도 원래 제 들보가 있으니 소용없는 물건이라면 우리 집 대청마루가 너무 헐었으니 그걸 켜서 바닥을 다시 깔면 어떻겠느냐 물어본 것이 실수였어요. 무어라? 한 집의 대들보란 그 집의 중심체요, 그것만으로 족히 한 집의 가대를 대신할 만한 물건인데, 그래 네 놈이 남의 집 한 채를 통째로 켜내서 마룻장으로 깔고 앉아? 그 집 성주님한테 천벌을 받을 이놈아! 그걸 당장에 옛 임자를 찾아 돌려주거나 그리 못하겠으면 고이 다른 사람에게라도 넘겨주어 새집을 짓게 하지 못하겠느냐! ...거기에 정말 무슨 혼령이라도 깃들인 물건인 양 전에 없이 노기를 못 찾아하는 거예요.-25쪽

들보 대신 당장 내 머리통을 켜버릴 듯 톱날을 바싹바싹 들이대오면서 말예요. 그 바람에 혼비백산 영감님 눈앞에서 그 들보를 치우느라 나 혼자 얼마나 홍역을 치렀는지." <목수의 집> 中-25쪽

"내게 왜 집이 없어! 게다가 내가 왜 남의 집만 지었어! 내가 그동안 남의 집 짓는다는 생각으로 지은 집 한 채도 없어. 일평생 내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집을 지어왔어. 그걸 모두 내 집으로 알고 살아왔어. 세상 천지가 그런 내 집이여." <목수의 집> 中-28쪽

김승조 씨가 새 고향을 삼으려 찾아 헤맨 땅이 그런 곳이고, 최봉수 노인의 마음속에 집이 숨겨져 있었다면 그런 비슷한 집을 꿈꿨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땅은 애초에 정의(情誼)로운 곳이 아니었고,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었다. 척박하고 궁벽한 곳에 사람의 마음을 심어 세운 집이었다. 우록과 동천과 계산 들이 긴 세월 서로 함께 간절한 소망과 삶으로 세워 가꾼 집이었다. 쓰레기 매립장이 생기든 말든 그의 고향마을을 찾아 집을 짓는 일도 그 앞엔 별뜻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김승조 씨의 헤매임으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땅, 평생을 목수로 늙어온 최 노인조차 손쉽게 지어올릴 수 없는 집, 스스로 찾아 가꾸고 지어올려야 하는 마음의 집-, 거기 함께 머물기에도 넘치고 버거웠던 그런 큰 집을 세훈 씨는 언감생심 엄두조차 내볼 수 없었다. 그는 다만 그런 집을 부러워하며 자기 집을 그 비슷이 간절한 꿈으로나 지녀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렇듯 현실 속의 고향집 설계가 깨어진 그로서는 그의 그 마지막 집에 대한 꿈이 더한층 깊이 사무쳐올 수밖에 없었다. <목수의 집> 中-37쪽

그러면서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다름아니라 그동안 아버지가 그에게 그토록 바라온 소망의 정체가 비로소 어느 정도 확연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아직도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지, 이 무렵엔 세민의 꿈이 이미 엿장수도 우체부도 아닌 형사 아저씨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 중에 아버지가 정작 무엇을 바라는지 구체적인 것까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 마지막 형사 노릇까지를 포함해서 어느것도 썩 탐탐스럽게 여기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아버지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데가 있었다. 세민이 세 가지 중 어느것이 되든 안 되든, 그 세 가지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무엇이 되려 하든, 그가 우선 당신 곁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민은 어느 날 그 나무 위에서 자꾸만 조그맣게 작아진 말을, 더욱이 끝간데 없이 아득해져가는 마을 밖 풍경들에서 차츰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도 필경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야릇한 충동 속에 하루하루 그 아버지의 숨겨진 소망에 대한 확신을 더해갔다. <날개의 집> 中-64쪽

"서두를 것 없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 전체로 그리는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고 싶은 것이 자라오르면 손은 그것을 따라 그리는 것뿐이다. 손 공부가 급한 것이 아니라 마음 공부, 사람 공부, 세상일 공부가 더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손 공부보다도 더 큰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손 공부에 조급하게 마음이 매달릴 것 없다." <날개의 집> 中-86쪽

기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일테면 유당이 그 땅이나 흙이나 사는 일들에 대한 참사랑을 배우는 길이라 뒤늦게 일깨워온 그 아픔이란 것의 본색일시 분명했다. 그래서 그것을 몸으로 배우자고 긴 세월 텃밭 산밭 흙손일을 익히고도 세민에겐 끝내 별 가망이 없었던 그 아픔, 그것은 필시 그림이나 삶의 방편으로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배울 수도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세민이 그 아픔도 사랑도 끝내 다 포기하고 유당을 떠나온 지금, 그림이나 삶의 법식을 다 포기하고 그의 절핍한 생존의 마당으로 돌아와 허덕허덕 지친 지금, 그것이 성큼 증상을 깃들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번 둥지를 틀기 시작한 그 증상은 날이 갈수록 또렷해져 여름과 가을까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혀댔다. <날개의 집> 中-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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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도둑 - 이청준의 흙으로 빚은 동화
이청준 지음, 우승우 그림 / 디새집(열림원) / 2003년 12월
품절


"그것은 진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무엇을 기억하는 힘이 차츰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실제 있었던 일과 생각 속의 일들이 뒤섞이는 일이 생기게 된다. 요즘 이야기 중에 자꾸 실제의 일에서 옛날 기억 속으로만 빠져들어 가시려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께도 차츰 그런 일이 생기시는 것 같다. 할아버진 아마 나이를 더해가실수록 그런 현상도 더해가실 게다. 그래서 나중엔 아예 실제 일과 기억 속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때가 올 수도 있다.할아버지께서 영영 옛날 기억 속으로 빠져 들어가시면, 그런 이야기 속엔 참다운 즐거움도 온전한 삶도 얻을 수 없는 거다. 우린 힘을 합쳐 그걸 막아드려야 한다.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남의기억을 자신의 일로 말씀하시는 것을 말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이다. 아빠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만류하고 드는 것은 그 때문이야." <이야기 서리꾼> 중-121~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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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 - 나의 삶 나의 문학 시리즈
이청준 지음 / 문학과의식사 / 1999년 4월
품절


돌아다보면 지난 33년 동안 내가 소설을 써 온 일도 그와 비슷한 노릇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우리의 삶도 혼자 어두운 밤 눈길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앞을 잘 알 수 없는 밤눈길처럼 이런저런 장애와 위험이 많은 삶의 길에서 누구나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의지를 삼아 갈 만한 동행자를 찾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앞서간 선행자의 발자국을 찾지 못해 그의 위로나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경우에도 혼자서 이리저리 그것을 꾸며 좇는 가운데에 우리 삶은 중단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허구 속의 선행자뿐 끝끝내 동행자의 부재 속에 종착지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그 허구를 허황하고 어리석은 희망으로 허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의 선행자(그래서 동행자가 되는)를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소설의 몫이기보다 현실의 몫에 더 가까우리라는 점에서 그 밤길의 허구는 실재의 선행자(혹은 동행자)보다 훨씬 소설의 영역에 근접해 있고, 그 유용성도 더 소설적인 터이므로.

<작가의 말_밤길의 선행자 좇기> 中-18쪽

한양대는 86년까지, 2년 가까이 있었죠. 그 과정은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고 내가 할 수가 없어서.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것도 있지만 창작하는 입장에서 강의란 나한테 방해가 되더라구요. 나는 책을 읽어도 메모를 안 해요. 잊어버려야 돼요. 잊어버려야 되는 얘기들을 번호 붙여서 메모하고 판서하고...... 어떤 면에서는 체험들이 모두 녹아 없어져야 되는데, 뭘 쓰려고 하면 아는 체하는 잡지식들이 자꾸 나오니까.

<대담_이청준의 생애연표를 통해서 본 인문주의적 사유와 새로운 교육문화를 위한 이야기들> 中-146-147쪽

그 당사자들이야 우리들하고는 해석이 아주 다르죠. 7~80년대 오면서부터는 의식 자체가 집단화되잖아요. 저쪽이 워낙 집단적인 힘이 강하니까......, 그래서 양면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힘의 비밀에 대한 변화상이 있을 수 있겠고......, 상호 자존심, 존엄성이랄까 원초적인 존엄성이라고 부를 그런 인격을 모두 깔아뭉개 놓고 잘 살게 해 줬으니 되지 않았느냐고 큰 소리들을 쳤지요. 그 뒤 80년대 후반으로 가면 민주화를 해도 될 것 같았는데 잘 안 돼서...... 아까 정 선생이 말한 IMF 이야기는 그런 허세 속에서 싹튼 거겠지요.

<대담_이청준의 생애연표를 통해서 본 인문주의적 사유와 새로운 교육문화를 위한 이야기들> 中-152쪽

소설의 힘과 생명은 무엇보다 쉼없이 살아 움직이는 눈앞의 생생한 삶의 현실 가운데서 얻어지는 게 일반적 상식이다. 현실 부정과 관념 지향의 측면이 강한 추상적 본질 세계에의 탐구는 그 나름의 덕목을 부인해서도 안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영역의 소설 이전 단계이지 총체성과 구체성을 함께 요구하는 소설 미학의 표현 단계에는 이르기 어려운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생각을 다시 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내게 소설을 쓰게 한 보다 크고 결정적인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생각을 더듬어 찾아낸 것이 내가 어린 시절을 농촌 마을에서 보낸 시골내기라는 점이었다.

<문학 자서전_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 왔나> 中-190쪽

대량 정보의 고속 유통 현상은 우리의 삶과 말에 더할 수 없는 정확성과 공리성[+확정성]을 확보해 준 듯싶어 보인다[공리적 언어].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럴 법해 보이는 것뿐 실제로는 갖가지 폭력과 소외를 낳고 있다. 한 예로, 세상 읽기 공부삼아 전자통신망으로 잠시 정보의 양과 속도의 싸움터라 할 수 있는 주식시장엘 들어가 갖가지 정보와 주가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예측불허로 불합리하고 부도덕하게 움직이는가를 알 수 있다. 대량 고속 정보의 정확성과 공리성은 은행이나 대기업 투자기관들에게 일방적으로 선점, 좌지우지 되어 가게 마련이고, 개미군단이라는 대다수 개인들은 허겁지겁 그 기관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하위 정보에나 매달리다 종당엔 자기 주가의 무참한 학살을 겪게 된다. 그 보이지 않는 정보조직(정보언어)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만 개인들(개인언어)의 광범하고 무기력한 소외현상, 그리고 그 소외된 말들.

<문학 자서전_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 왔나> 中-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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