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202
너대니얼 호손 지음, 곽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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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와 즐거움과 어린아이의 환희 사이에는 외견상 많은 공통점이 있다. 심오한 유머 감각도 마찬가지지만, 지성 또한 즐거움과 별 상관이 없다. 늙은이에게나 어린아이에게나 즐거움은 겉에서 반짝거리고, 푸른 가지든 썩어 가는 잿빛 줄기든 밝고 유쾌하게 보이게 하는 섬광과도 같다. 그러나 한쪽이 진짜 빛이라면, 다른 쪽은 썩어 가는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광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23쪽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 환영들이야말로 가엾은 목사가 지금 상대하는 가장 진실되고 실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목사의 삶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거짓되어 우리 주위의 현실이 어떠하든 하늘이 영혼의 기쁨과 양식이 되도록 해놓으신 현실로부터 그 정수를 빼앗겨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말할 수 없이 비참할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온 우주가 거짓이어서, 만져도 모르고 손으로 쥐면 오그라들어 없어지고 마는 법이다. 그리고 목사 자신이 거짓의 빛 속에 있는 한 그는 한낱 그림자, 혹은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딤스데일 목사를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그의 영혼에 깃든 고뇌와 그의 얼굴에 나타난 거짓 없는 표정뿐이었다. 만약 그가 미소를 짓고 즐거운 표정을 지을 줄 아는 힘을 찾아냈더라면 딤스데일이란 사람은 진작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183쪽

가장 대담한 사색을 하는 이들이 종종 가장 조용히 사회의 형식적인 규범을 따른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들은 사상에만 안주한 채 그 사상을 피와 살을 갖춘 행동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 헤스터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듯했다. 그러나 만약 어린 펄이 영적 세계로부터 그녀에게 오지 않았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헤스터는 앤 허친슨과 손을 잡고 어떤 종파의 시조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예언자로 자신의 위상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청교도의 토대를 뒤엎으려 했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준엄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당연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의 사상적 열의는 아이의 교육에서 어떤 돌파구를 발견했다. 하늘은 이 아이의 기질로부터 여성의 싹과 꽃을 피우는 일을 헤스터의 손에 맡기고서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소중히 키우게 했다.-205쪽

"내겐 용서할 힘이 없소. 당신이 말한 그런 힘 따윈 내게 없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지난날의 믿음이 되살아나 우리의 모든 행동과 괴로움을 설명해 주는구려. 첫발을 잘못 디뎌 당신은 악의 씨를 뿌렸소. 그러나 그 악의 씨가 이후로는 어두운 필연이 되어 버렸지. 내게 잘못을 저지른 당신을 세상 사람들은 죄받을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착각이오. 악마의 손에서 그 임무를 낚아채긴 했지만 나 또한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니오. 이건 우리의 운명이오. 검은 꽃은 피는 대로 그냥 두시오! 이제 당신은 가던 길을 계속 가고, 그 자에 대해서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216~217쪽

사랑과 증오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찰하고 연구해 볼 만한 흥미로운 주제이다. 사랑과 증오가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면 극도의 친밀감과 마음의 이해를 요구하게 된다. 사랑과 증오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른 인간에게 애정과 영적인 삶의 양식을 의존하게 만든다. 사랑과 증오는 그 상대가 없어지고 나면 죽도록 사랑하는 자나 죽도록 증오하는 자 모두를 쓸쓸하고 황폐하게 만든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랑과 증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같다. 다만 하나는 천국의 광채 속에서 보이고, 다른 하나는 어스레하고 섬뜩한 불빛 속에서 보인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비록 서로가 희생자이긴 했지만 이승에서 쌓인 증오와 반감이 영적 세계에서는 황금빛 사랑으로 변해 있는 것을 늙은 의사와 젊은 목사는 뜻밖에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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