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 당당한 나를 위한 관계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앙드레 & 파트릭 레제롱 지음, 유정애 옮김 / 민음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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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리학에 관한 대중적인 관심이 높을 때에도, 나는 별로 관심갖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 전공으로 심리학을 택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학문적으로 바라보았다. 문학과 심리학 또는 영화학과 심리학, 이런 식으로 연결지어 보면서 더 그렇게 되었다.

 

이 책은 내가 이전에 심리학을 이해했던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라는 제목에서부터, 내가 이전에 그다지 고민해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물론 이따끔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이야 있지만, 비교적 대중 앞에서 별로 긴장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훈련하고 반복하다 보면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한편으론 지나치게 당당하고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드는 요즘의 분위기를 썩 좋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런 나였으므로,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유익은 '사람들 앞에 서면 작아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례와 심정적 표현들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많은 방식으로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것을 보는 저자의 시선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객관적인 언어와 실제적인 극복 방안의 모색이라는 점이 합리적으로 여겨졌다. 깔끔하고 차분한 편집과 구성도 진지한 독서에 한몫 했다. 사람들 앞에서 떨고, 그것 때문에 우울해하는 이들이 읽으면 좋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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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성경사전
그리스도예수안에 편집부 엮음 / 그리스도예수안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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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경사전을 몇 권 갖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문장이 선명하면서 깊이 있는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는, 좋은 사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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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 - 가장 예술적으로 돈을 벌었던 남자, 아트 윌리엄스 이야기
제이슨 커스텐 지음, 양병찬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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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소설인 줄 알았다. 나름대로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꽤 두툼한 책인데도 훌훌 넘어가고, 넘어가는 동안에는 헐리웃 영화 한편을 본듯하다. 아트가 실존인물이라는 데서 생기롭고, 뒤로 가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범죄자 이야기라고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아트라는 인물의 솔직함이 맘에 들었고, 천재적인 위조 지폐 기술과 달리 어리벙벙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재미있었고, 가족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문학적이다.

 

추운 겨울날 고구마 하나 까먹으면서 보기에 적절한, 재미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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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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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76년 전에, 조선인 혁명가 장지락(김산)과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의 두 달간의 인터뷰를 지켜본 심부름꾼 소년이 남긴 일기를 가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937년 6월 8일

  1937년도 이제 절반이 지났다. 이제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다. 지금 여기는 옌안이다. 하지만 내 고향은 조선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살기 힘들어진 우리 부모님은 중국으로 가셨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옌안으로 오셨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이 여관에 홀로 놓여졌다. 그리고 다행히 마음 좋은 여관 부부 덕택에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고 있지는 못하지만 혼자서라도 공부를 하고 있다. 이곳엔 조선인들도 많기 때문에 나도 조선말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며 선교사님으로부터 영어도 배웠다. 선교사님은 내 영어가 무척 뛰어나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 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조선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이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도 너무 많아 다들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아침부터 열심히 쓸고 닦고 한 덕분에 일찌감치 여관 일을 정리하고 도서관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여관에서 30분을 걸어가면 루쉰 도서관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종종 책을 빌려본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문제이지만, 그래도 나는 더듬더듬 읽어내려 가더라도, 책을 보기만 해도 좋다.
  도서관에서 오래간만에 미국사람을 보았다. 이목구비가 또릿하고 피부가 하얘서 눈에 엄청 띈다. 중국어를 잘 모르나 보다.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침 눈이 마주쳐서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교사님과 그의 가족들 외의 사람과 영어로 대화해보긴 처음이다. 미국사람이 보기에도 내가 똘똘해 보이나?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영어책이 잔뜩 있는 서가로 아줌마를 데려갔다. 아줌마는 영어책을 빌려간 사람들의 목록이 적힌 장부를 뚫어지게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사서 아저씨에게 좀 어색한 중국어로 물었다.
 “이렇게 많은 책을 빌려가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요?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죠?”
 “이 사람은 중화 소비에트에 파견된 조선 대표입니다. 지금은 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나고 싶다면 외교부에 가보세요.”
  아줌마는 좀 실망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며 사는 곳을 물었다. 내가 근처 여관에서 일하는 아이라고 말하자, 아줌마는 기뻐하며 내가 있는 여관에 묵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줌마는 오늘부터 우리 여관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홍군 소년병이 아줌마를 호위하게 되었다.

 
  1937년 6월 15일

  아줌마, 아니 ‘님’은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님의 이름은 ‘님 웨일즈’였다.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이곳 여관에 머무르는 사람들 중 진짜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주인 아저씨가 그랬으니까. 아무튼 아줌마는 소년병을 두고 굳이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저번에 루쉰 도서관에서 영어책을 잔뜩 빌려간 사람에게 서신을 전달하려고 벌써 세 번째 심부름을 다녀왔다. 그리고서 일주일이 지났다. 나도 나와 같은 조선인인, 영어를 잘하고, 소비에트에 일한다는 그 남자가 너무너무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탁자를 닦고 있는데 웬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그는 조선 사람치고 이목구비가 무척 크고 뚜렷했으나 서양 사람처럼 하얗지 않고 오히려 까무잡잡하고 마른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님이 계속 연락하려고 애쓰던 남자임을 알고는 바로 님의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김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있다가 그는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내게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깊은 눈동자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돌아갔다.

 

 

  1937년 7월 1일

  보름 만에 그가 나타났다. 더 놀라운 것은 님과 그가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인데,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야 뭔가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차와 과자를 들고 그 방에 오늘부터 들어갔다. 김산은 조금은 더듬었지만 영어로 이야기를 해나갔다. 내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님은 엄청나게 많은 공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백지이지만, 김산이 해주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인인 내가 현실을 바로 알고 기억해서 꼭 조선을 품고 자라나는 사람이 되길 김산이 바랐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흥분되고 떨리면서도 걱정이 된다. 나는 영리하다는 소리는 제법 듣지만, 옌안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고 모르는 것도 너무 많다. 하지만 김산의 말을 들으며 꼭 내가 지켜야할 부담을 느꼈다.
  김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김산은 1905년에 태어나 어딜 가든 울부짖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땅, 조선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꼭 지금 나보다 두 살 어린 같은 나이인 11살 때부터였다. 그는 그때부터 집에서 살지 않았다. 그에게도 어린 아이 같았던 때가 있긴 했었을까 싶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던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온 가족이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서 만든 학교에서 공부를 배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기쁨이 차 보였으나 이내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어려운 조국의 현실 속에서 과연 신앙의 힘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신앙의 보답은 눈물뿐이었다고. 그러던 중에 정말 실질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1919년에 3.1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민족운동의 기독교적 평화시위였다고 말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한 달에 걸쳐 거리로 장터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런데 일제는 많은 사람들을 총칼로 무참히 내쳤다고. 그 때를 시작으로 김산은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지금 내가 갖게 되는 것도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김산은 3.1운동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 동무들을 잃은 데다가, 외국인 선교사들이 서툰 말로 “한국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벌을 받은 것”이라는 말에 깊이 좌절해서 더 이상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 후에 제법 잘 살던 작은 형이 가족에게 부쳐준 돈을 몽땅 들고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그런데 길이 막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신흥무관학교!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김산은 너무 어려서 입학할 수 없음에도 한 달 동안 걸어서 간 그 길을 돌아갈 수 없었기에 학교 측에서 배려를 해주어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그는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땅에 묻고 자고, 아침이면 돈을 꺼내어 계속 계속 걸어왔다고 한다.

 

 

  1937년 7월 14일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그 동안에도 김산은 매일 매일 와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젠 영어로 이야기를 술술 한다. 그는 진짜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가끔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때마다 그는 내게 조선말로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모르는 내용이 많았고 여관 일에도 지쳐서 그 내용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님이 잘 적고 있으니까 다행이다. 그런데 님이 적는 것은 다 영어다. 언젠가 님이 쓴 글을 내가 보아 주어야 할텐데, 그러려면 영어공부도 지금보다 더 해야겠다.
  그 동안 김산이 해준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온 어떤 이야기보다도 흥미진진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이었다. 김산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사에 식자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에게 정치를 가르쳐준 안창호와 이광수를 만났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매우 유명한 독립운동가라 나도 들어본 기억이 난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민족주의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집단을 의열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사가 아닌 ‘군인’이었다는 이동휘 장군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해주었다. 그는 프랑스 원수처럼 보이는 체격과 콧수염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레닌으로부터 50만 루블을 지원받았지만 결국 한 푼도 제대로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어렸기 때문에 실제로 테러를 시작하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그의 친한 친구인 김약산과 오성륜을 만나서 계속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붉은 승려라는 별명의 김충창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김산과 오성륜, 김약산. 이 세 사람은 정말이지 놀랄 정도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겨 지금은 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는 톨스토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였지만(그의 말로, 톨스토이적 이상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거쳐 마르크스주의자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광둥코뮌의 이야기를 들었다. 손님들도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이유는 광둥코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김산은 한없이 지쳐보였다. 그의 훌륭한 동지 200명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의 혁명을 누구보다도 지지했던 200명의 우리 조선인들은 김산의 말에 의하면 ‘너무 열정적인 조선청년들, 앞으로 전진하는 법만 알지 후퇴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몰랐던 청년들’은 무려 6천여 명의 중국민중과 함께 김산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하인츠 노이만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는 지금은 큰 힘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광둥코뮌을 지휘한 사람이었고, 코뮌에 참가한 유일한 서양인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님은 하인츠 노이만이 자신과 자신의 남편을 매우 싫어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로 님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산은 그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김산과 님은 무엇보다도 기록을 남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27일

  아, 날씨가 정말 많이 더워졌다. 김산과 님의 만남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조용히 듣고 있다. 아니다, 오늘은 조용히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산과 함께 님에게 우리의 노래를 들려 주었다. ‘아리랑’이었다. 나는 옌안에서 자랐지만 아리랑만은 잘 부를 수 있었다. 많은 조선인 손님들이 취할 때면 슬픈 얼굴로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자꾸 서글퍼지는, 이상한 노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이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김산은 이 노래가 어떠한 노래인지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역마다 다른 가락으로 이런 노래가 있고, 우리 조선인들의 영혼이 담긴 노래라고 했다. 그리고 수많은 조선 독립운동가들, 혁명가들이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질 때도 이 노래만큼은 부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마지막 고개를 막 넘어갔다고 자랑스럽게, 결연하게 말했다. 김산은 늘 피곤해 보였고, 대화를 길게 하면 아주 피곤해할 정도로 몸이 약해 보였지만 이 이야기를 할 때는 평소보다 더욱 눈에 빛이 난다. 그는 언제나 알 수 없는 힘으로 가득찬 사람이다.
  그는 일본경찰에 붙들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중국에 있는 일본경찰들은 무척 예의 있고 성실하고 정직하다고 하면서, 조선에 있는 일본경찰들은 매우 무지하고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김산을 이송하던 일본경찰은 아리랑을 좋아해서 그가 불러주기를 겸손하게 부탁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옌안에 있는 많고 많은 중국 사람들이 모두 같지 않은 것처럼, 일본 사람들도 다 똑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는 심한 고문을 견뎌내며 다행스럽게도 석방되었지만 동지들에게 심한 배반을 당했다고 한다. 더 이상 동지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모동지가 특히 그를 미워했다고 한다. 사실 그 이전에 김산도, 실수로 많은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몬 한씨를 매우 미워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응보였을 거라고 말했다. 정말 그는 한씨나 자신 중에 한 명이 죽자고, 그를 찾아갔다고 한씨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는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민족끼리의 오해와 갈라짐 때문에 그는 매우 힘들어했다. 그를 괴롭힌 것은 민생단 사건보다도 민족끼리의 분열이었다.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그를 성숙시켰고, 그는 스스로에게 승리했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조선인으로, 조선이 승리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승리했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한없이 빛나 보였다.

 

 

  1937년 8월 15일

  김산이 특별한 이야기를 했다. 주로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놀라웠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지만, 가족을 대한 깊은 정과 연민을 보였다. 어쩌면 그 깊은 정을 제대로 풀어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자신에게 집중되어 살 여유조차 없었기에 행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결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의대에 다니던 때에(그는 의학까지도 공부한 사람이었다.) 약혼녀가 있었지만, 자신은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혁명운동에 바칠 것이며 어떠한 속박에도 얽매일 수 없다고 솔직히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안창호는 그에게 일찍 결혼하지 말고 우정을 나눌 것을 늘 강조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함께 당의 동지이던 류링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태어나 처음으로 건강한 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놀랍게도 그 여인과 ‘혁명적인’사랑을 하고 있었으며 동거하는 사람끼리도 너무나 이상적으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김산의 말이 그렇고, 님의 말이 그렇다. 결국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본질 속에 행복이라는 것이 없으며 행복을 찾는 것조차도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맙소사, 그는 너무나 진지하고 이성적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 심각하고 진지하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그의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아내를 만나 ‘정식적으로 찬란한’시기를 보냈다. 세 명의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살다가, 다시금 혁명에 뛰어나가게 되었다. ‘미스리’라는 매혹적인 여인의 유혹도 있었지만 너무도 그답게, 그는 아내에 대한 정절을 지켰다. 그리고 만주로 떠나면서, 그의 아내도 그에게 정절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항일전선에 뛰어들었으며, 작년 8월에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서북에 있는 중화소비에트 지구에 파견될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지금은 이렇게 우리와 두 달간 마주해 책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가 떠나자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몸도 마음도 무겁다.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 두 달 전에 나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는데. 그저 막연하던 나의 조국을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많은 나라들 사이에서 조선인들은 참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김산과 같은 이가 많을 것이다. 물론 압제 속에서 흐르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고, 일제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말 다시 보게 되었다. 일본인, 중국인, 독일인, 미국인, 그리고 조선인. 많은 사람들이 국적을 떠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
  김산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를 부둥켜안고 그는 또다시 그 깊은 눈동자와 흔들림 없는 입술을 열어 마지막으로 이야기 해 주었다. ‘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자’가 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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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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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페꼼마에서 구입, 두 번째로 읽은 엘릭시르 추리소설.

 

2. 표지 그림으로 오드아이를 가진 아이의 얼굴이 독특하다. 주근깨, 살짝 지푸린 왼쪽 눈썹.

 

3. 한국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이 독특하게 느껴질 정도로, 뉴욕이란 공간이 잘 그려져 있다. 가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인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잘 녹아들어 있다.

 

4. 독서 후에도 여러 가지 사유가 겹쳐진다. <불평등의 대가>에서 다루었던 정의와 분배, 세계화 등.

 

5. 달라이 라마 으뜬 갸초의 이야기는 눈물겹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내겐 결정적 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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