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충 - 이제하 소설집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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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읽은 이제하씨의 두 번째 소설이다.  그 처음은 <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었는데 상당히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그 때, 이제하씨를 처음 알게 되었고 <독충> 역시 그런 감흥으로 읽게 된 소설이다.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어떻게 써야할지 염려스럽다.  정확히 말하면, 책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어렵다.  너무 어려워.  작가의 의도는 뒤로하고라도 무슨 내용인지 알아내기도 힘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 한숨을 쉬었고 좌절했던가.  아, 이 지리멸렬함을 간파하기 위해서라면 소위 말하는 '내공'을 더 쌓은 후 재도전해보아야 할 책이다.  먼저 읽었던 <능라도에서 생긴 일>도 그리 쉽지 않았는데 <독충>에 비하면 너무나도 쉬운 소설이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한 번 정리를 해보자.

  이 책은 단편소설집이다.  담배의 해독, 독충, 견인, 버꾹아씨 뻐국귀신, 금자의 산, 어느 낯선 별에서 이렇게 6편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단편들이 었으니 무어를 더 말 할수 있겠는가?  명확한 것은 모호하는 것일뿐.  음....  내용과 제목이 별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단편들이었다.  이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담배의 해독' 이라는 제목 아래 쓰여진 글들에는 담배가 등장하지 않는다거나 의미로서도 별 관련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하씨는 제목은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하나의 상징으로 부여했다는 뜻이다.  이제하씨가 시인이기도 해서일까?  어쩌면 그는 글의 제목에 '메타포'를(시가 대개 그러하듯) 부여했을런지도.  그리고 6편의 단편들의 내용이 모두 기이했다.  현실적이지 못한 무정형, 허상의 세계들을 담아놓은 듯 하다.  '담배의 해독'은 모파상의 괴기소설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연이어 '담배의 해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책의 처음에 위치한 단편이라 비교적 집중력을 갖고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독충>에서 그의 소설보다 더 반가웠고 후련했던 것은 바로 박혜경씨의 작품해설이었다.  등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시원함이랄까?  소설을 읽는 내내 혼잡하고 정리안된 그 무엇들을 차곡 차곡 정리해주는 듯한 느낌이었고 확실히 밝혀후려내 줌으로 속이 다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내 기분과 느낌을 정확히 진단하여 명료하게 해설해준 작품해설은 여지껏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슬슬 이제하씨의 색깔을 알 것 같다.  그의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자극적이다.  이 자극이라 함은 선정적이거나 극적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위험천만한 발상들이라고 해야하나?  이제하씨는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작가인 것 같다.  나는 작가건 화가건 영화감독이건 음악가건, 민족주의를 겨냥하거나 정치적인 발상을 그들의 창작물에 주된 골자로 사용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내가 읽기로는 <능라도에서 생긴 일> <독충> 단 두 권이었지만 이제하씨가 그러한 작가인 것 같다.  <독충>을 낸지 6년만에 <능라도에서 생긴 일>을 냈다지?  이 소설 <독충>은 이전 작이 나오고 15년이나 뒤에 나온 작품이다.  왜 작품과 작품사이에 이토록 오랜 기간의 공백이 필요한 것일까?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가 너무 많은 것들을 글 속에 담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개인적인 바램이기도 하거니와 경솔할지도 모를 뜻을 살포시 전해보자면, 나는 당신의 작품안에 담아 놓은 그 응어리들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이거 뭐, <독충>에 대한 서평이라고 보기 힘든 글이 되어버렸네.  아쉽지만 영리하지 못한 독자의 몰이해가 빚어낸 일이니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내게 매력 있는 작가다.  그의 문체가 좋다.  이지적이면서도 냉소적인 문장들.  그리고 그 대상이 사회나 독자인지,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일런지 모르겠으나 '거침없이 하이킥' 을 올려대는 그의 글이 좋다.  여전히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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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케 2007-08-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능라도에서 생긴 일.. 어떤분이 말씀하시길, 자신은 능라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침몰해 버렸다..로 감상을 축약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전 아예 이분의 작품을 포기했는데.. 반대로 도전의식을 가지시는 분도 계시군요.. 화이팅입니다..

매우맑음 2007-08-19 22:51   좋아요 0 | URL
저는 <능라도에서 생긴 일>은 아주 훌륭한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능라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침몰해버렸다'다는 감상에 대해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 분께서는 배로 능라도를 향해가다 바다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격 아닐까요? ^^ 저는 <능라도에서 생긴 일>을 읽고 이제하씨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답니다.
 
포의 그림자 2
매튜 펄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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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의 거장 '에드가 앨런 포우' 의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소설이라는 말에 망설임없이 읽게 된 책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은 주로 중학교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에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함께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포우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저 공포소설과 괴담 따위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이 것 저것 읽었다.  지금까지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작품은 '검은 고양이' 이다.  어린나이에 내가 그의 문학성이나 문학세계를 이해했을리 만무하다.  단지, 우리 집에 여러마리의 고양이가 있었던 이유이다.  그들의 눈에 살기어린 무언가가 있나 줄곧 살폈고 어디선가 폴짝 뛰어 내 옆에 앉을때면 소르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해맑고 활발했던 어린시절은 망각 역시 활발했던 모양인지 금새 포우의 '검은 고양이' 따위는 잊어버리고 우리 고양이들에게 사랑을 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포우의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라....  '포우의 죽음이 뭔가 예사롭지 못했다는 얘기같네.  뭘까?' 하며 읽게 된 책이다.

  포우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과 망자에 대한 한없는 소문들을 잠재우고 명예를 되찾아 주려는 변호사 켄틴.(사실 변호사로서의 면모는 볼 수 없었다.)  그가 포우의 작품을 해석하며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타나는 포우에 죽음에 대한 의문점들....  음모, 추적과정에서 알게 되는 배후세력등....  추적, 믿음, 집착, 추리, 음모로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두 권의 책이지만 얼마나 빨리 읽혔는지.  포우의 죽음에 관한 켄틴의 집착은 놀라울 정도였다.  물론 그를 사랑했던 독자로서 죽음 앞에 왜곡된 사실들과 초라한 묘만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은 컸으리라 생각되었지만 약혼녀도 잃고 친구와 직장도 잃어가며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던 그의 모습은 어리석어 보였다.  그리 영특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이 켄틴이라는 인물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해 줏대가 없다고 해야할까?  이리 솔깃, 저리 솔깃 백짓장 뒤집듯 수없이 믿음과 의심을 반복하고 허둥대는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는 느낌이랄까?  차라리 뒤팽이건 뒤퐁트건 그 둘 하나가 사건을 소상히 밝혀주길 바랬다.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로 인해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또 흥미로웠던 것은 포우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는 과정에서 포우의 시나 작품들을 해석한 점, 그리고 중요한 단서들을 신문을 통해 찾아내면서 정작 그것들을 무조건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또 많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위인들의 생애라고 하는것이 과연 모두 온전한 사실일런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의심하고 의문을 던지게끔 해주었다는 점이다.  <포의 그림자>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에 입각해 쓰여진 소설이라는 사실.  물론 가상인물도 있고 사건을 세세히 기록하기 위해 작가의 상상과 창조 또한 큰 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정말 매튜 펄과 포우의 팬들이 미심쩍어하는 것처럼 포우의 죽음에는 무언가가 있었을까?  이 점에 대해 명확한 답을 알고 있는 자는 포우 자신 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한 시대의 거장 에드가 앨런 포우의 죽음에 대한 추리라는 점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다시금 '포우의 작품들을 읽어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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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초상
이갑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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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러쿵 저러퉁 하기보다는 결론부터 먼저 말하고픈 욕심이 드는 작품이다.  굉장하다!  국내에도 이런 잘 짜여진 추리소설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참, 참한 작품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문학 중에서 유독 추리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등한시되고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들의 집필욕구가 낮은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무시하며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추리소설가나 그들의 작품을 발굴해내는 안목이 부족한 출판시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취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런 기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삼박자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아들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사돈 남 말 할 일이 아니고 나 역시 이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로맨틱한 초상>은 한국 작가의 추리소설로는 처음 읽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첫 작품이 이갑재씨의 <로맨틱한 초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다행일런지도. 

 

  이 책은 1994년 첫 출간되었는데 13년 뒤인 2007, 올해 목차와 표지만 약간 달리해서 나온 작품이란다.  그런데 변경된 표지나 chapter의 소제목이 13년 전의 것보다 훨씬 예술적 감각을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아름다우면서 뭔가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표지,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 몽환적인 분위기.  (나는 이것이 전라의 여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중 내내, 곡의 모티브가 된 John Surman의 Portrait of Romantic이라는 곡이 궁금했다.  책장을 1/5쯤 남겨두었을 때였나?  그 때, 이 곡을 들었다.  이 곡 역시 아름다우면서 처연한, 그리고 기이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작가가 이 곡에 부여한 그 느낌 그대로가 전이되어 그리 느꼈을 런지도.  우선, 표제와 표지 그리고 내용(John Surman의 곡도 포함해서)이 서로 딱 들어맞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모든게 조화로운 느낌?  가늘고 섬세한 실들이 서로 규칙적으로 교차하여 매끈하고 보드라운 느낌을 자아내는 천을 어루만지는 느낌이랄까?

 

  내용 또한 허무맹랑하지 않고 믿을만했기에 더 실감나지 않았을까.  이런 믿음은 책 속에서 소개된 적잖은 정신분석학 이론이나 개념들이 뒷받침 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저자인 이갑재씨 본인이 간질을 앓았다는 점.  그러나 병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환자가 자신의 병을 알고 이해하는 일반적인 수준 이상이었다.  이에 의문이 드는 점은 집필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서적들을 섭렵했는지(서두에서 저자는 실제 여러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서를 읽었다고 했다.), 적을 알고 덤비자는 심산으로 자신의 병을 낱낱이 알고자 했던 의기양양한 환자의 모습인지 하는 것이다.  여하튼 그의 그런 고된 노력은 <로맨틱한 초상> 이라는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그의 '초상'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경관이라는데 이로 인해 수사과정이나 경찰들의 업무를 좀 더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으리라.  <로맨틱한 초상>은 지적이다.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렇기에 살해, 범죄라는 단어 앞에서도 꽤 겁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로맨틱한 초상>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그러는 편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아니, 벌써 범인이 밝혀지면 어쩌자는거야?  아직 책장은 많이 남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혐의를 단숨에 내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는 범인이 누구인가 추측하고 추적하기 보다는 범인의 심리와 병적상태, 그로 인한 이상행동들을 좀 더 소상히 밝히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로맨틱한 초상>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 위에 세워진 글이기에 더 완전(完全)에 가까웠다.  또한 작가의 박학다식은 작품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아, 어쩜 이리도 아는게 많아?' 하며 그를 동경과 질투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해야했다.  단 한 편의 작품으로 판단하는 일은 섣부를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내가 세상에 살았었소' 하는 고인의 족적이 이리도 훌륭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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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dhero 2007-09-0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맑은하늘님 글 정말 잘 쓰시네요. 확실히 내공이 느껴집니다.
서평 마음에 와닿게 잘 읽었습니다. 담에 또 놀러올께요~ ^^

매우맑음 2007-09-02 21:22   좋아요 0 | URL
맑은 하늘님은 뉘신지요 ㅋㅋ
저는 매우맑음인데요 ^^;;
부족한 서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뵐께요 ^^

isdhero 2007-09-0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죄송해요..매우맑음님..^^;;

매우맑음 2007-09-03 19:13   좋아요 0 | URL
하하, 별 말씀을요 ^^
그냥 웃자고 한 말이예요.
맑은 하늘도 좋아요~ *^^*
 
우피치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8
엘레나 지난네스키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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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피치 미술관?  '글쎄, 처음 들어보는 미술관이네?'  미술 문외한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나다!  절대 자랑하거나 떠벌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지만 나는, 솔직하고 싶다.  나는 '그림에 관심이 있어' 라고 말하기에는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대신 '그림을 알고싶어' 라고 말한다면, 이 것은 내게 진솔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그래, 나는 그림을 알고 싶다.  그래서 이런 책도 보고 싶은 것이고.  지금에야 어떤들 미술읽기에 출발선상에 선 내가 얼마나 무식하냐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알면서도 표지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의 표지가 바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의 비너스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Zoom 한 번 땡겼을 뿐인데....' 하고 중얼댈지도.  후훗  아, 그나저나 책을 읽으며 안 일이지만, 우피치 미술관은 내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다른 미술관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한 곳이라는 사실.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이요' 뭐 이런 말로 대충 정리하고 부끄러운 고백은 그만 하자.  가야할 곳이 있다.  지금, 우피치 미술관, 그 곳으로 가보자! 
 
  이 책은 이 미술관의 역사, 이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들, 그림에 대한 해석....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올컬러로 이 방대한 량을 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다.  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자에게나 나처럼 문외한인 자들에게나. 
 
  마에스타, 수태고지, 피에타에서부터 초상화들과 신화를 담은 다양한 회화작품까지 담고 있는데 그림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림을 '전체와 부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인 실루엣에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림 속 대상의 눈빛과 손동작, 머리칼의 움직임과, 주름진 천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은 사뭇 이질적이다.  그런 것들을 가아만히 보고 있노라니 그린 이의 영혼까지 읽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태리에 있는 이 '우피치' 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데에는 한 여인의 지혜로움이 아니었나 싶다.  이 여인은 바로 우피치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이다.  그녀는 '첫째, 미술품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영예'를 위해 양도되어야 하고, 둘째, 미술품들이 피렌체 시민들의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하며, 셋째 그것들이 외국인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p.9) 했다.  그녀의 혜안()이야말로 우피치를 지켜낸 힘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나에게 우피치 미술관만 소개해준 것이 아니다.  그 곳에 소장된 그림들을 통하여 미술작품의 구석구석을 보는 눈을 깨워 주었다.  나는 그 동안 그림이나 조각 이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만 보았으며 그들의 배열, 갖춰진 모양새를 통해 이것들을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조개 위에 올라서 가슴과 음부를 가리고 있는 비너스를 그린 그림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인 줄은 알지만 비너스의 얼굴만 보고는 이것이 그것과 같은 것인지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든 한 번 보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이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그런렇게 보자면 이 책은 더 가치있는 책이다.  급하게 (그림을) 읽어낼 필요가 없다.  천천히 천천히 미술에 한 발작, 한 발작 다가가면 될 것이다.  미술에 한 걸음 다가갈 용기을 준 책?  이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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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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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검은책' 이라는 제목만큼이나 범상찮은 기운의 띠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국적의 작가 신간이라고.  오르한 파묵에 대해 그간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사람의 책을 읽기로는 이 <검은책>이 처음이다.  도서발간정보를 보아하니 1994년작인데 국내에서 발간되기까지는 무려 13년이나 걸렸다.  신간하니 생각나는데 얼마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여럿과 '과연 신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도서의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의견은 실로 다양했는데 출간된지 2, 3개월이내의 책, 1년이내 혹은 2년이내의 책이다 등등.  대개 개인적인 기한에 따라 다양한 답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답변은 '작가가 마지막으로 펴낸 책이 신간' 이라는 의견이었다.  즉, 5년이고 10년이고 작가가 후기작을 내놓지 않는다면 최후 작품은 여전히 신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주장이었고 신선한 답변이었다.  그나저나 왠 신타령이냐고?  글쎄 그게 띠지를 보고 생각이 난지라 이야기 해보았을 뿐이다.  오르한 파묵의 신간이라기에.  역시 신간이다.  그래, 신간이지! 
 
  와~  이처럼 집중안되는 책, 정말 오랫만이다!  아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음이 아닐까 싶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잡생각이 났다.  분명 눈은 활자를 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에서 인식하고 떠올리는 영상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를 거듭, 또 거듭.  오호호~  나의 뇌가 드디어 멀티를 뛰게 된 것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건 그런게 아니었다.  눈으로, 입으로 맴돌았던 단어들은 그냥 스쳐지나갔을 뿐 나는 의미를 전혀 모른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몇번 머리를 털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아,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의 고비에까지 치닫자 나는 책을 덮어버렸다.  그러다....  다시 폈다! ^^;;;  한 번 편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덮지 않는 신조?  구태여 지키려고 노력한 적은 없지만 나는 여태껏 그렇게 해왔다.  꾸역꾸역 읽을지언정 중도에 포기하지는 않는다.  아, 신이 나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했던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술술 넘어가는게 아닌가?  나의 '막힘'은 오르한 파묵, 그의 문체 때문이었다.  아, 대체 한 문장안에 몇 개의 문장이 들어있는거야?  쉼표와 마침표는 절대 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는 그걸 유독 아끼는 듯 했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이 만연체(蔓衍體)가 그의 글의 특징이라니 못난 스스로를 질책할 밖에.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순간은 내가 그의 문체에 적응하기 시작했을즈음이라 생각된다.
 
  이 책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아내 뤼야가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자 남편 갈립은 아내의 행방을 추적하게 되는데 사촌이자 칼럼리스트인 제랄 또한 행방이 묘연해져 결국을 그 둘을 찾아 나서게 된다.  제랄과 아내 뤼야를 추적하는 끝에 갈립은 결국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갈립이 자신 스스로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무엇의 상징인가?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들이며 명확하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타인이 규정하는 나로 존재할 뿐이다.  책 속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 숱하게 등장하는데 결국 어느 누구도 자신 그대로의 자신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와 당신 역시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로 존재하고 있다.  나 자신도 규명할 수 없는 '나'를 어느 누구가 정확히 말해줄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 세계사]가 떠올랐다.)   결국은 인간은 완연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모든 것이 닮아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흉내내고 모방하며 산다는 것이다.  
 
  또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파묵은 모방에 있어 관대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이 모방이며 서로 닮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방에 걸린 여러개의 벽시계을 비유로 이야기 했는데 1) 방에 있는 시계중 하나만 시간이 맞고 나머지는 틀리하고 할 수 없으며 2) 방에 있는 시계 중 하나가 다른 것 보다 다섯시간 빠르다고 할 수 없으며 3) 즉 한 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른 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모방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논리를 설명이라도 하는 듯 급기야 갈립은 제랄을 흉내내는 삶을 살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모방의 실체들을 곳곳에서 찾아보여주려했는데 마네킹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인간형상의 모방이자 또 다른 표상으로 존재하는 마네킹.  그리고 마네킹제조업자가 터키인(소설속 배경이 터키이다)의 생김새로 마네킹을 만들자 서양인의 모습으로 만들어 내길 바라는 대목을 찾을 수 있는데 결국 파묵은 인간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 이상일 수 없다고 말한다.  거듭 말하고 거듭 말하고 있다.  제랄을 흉내내는 갈립을 통해, 터키인 스스로가 서양인 마네킹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제랄의 독창적인(상당부분 다른 저작물을 인용했으며 가상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칼럼을 통해, 그리고 그의 건실한 독자를 통해....  모든 것은 닮았으며 모방이며 흉내내기이며 서로 포함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 갑갑증을 느낀다.(물론 나 역시 정확히 백퍼센트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파묵 역시 이러한 쉽지않은 무언가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 1, 2권 합이 약 650이나 되는 페이지를 할애하여 이야기 했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방대한 '말할거리'에 비하면 이 정도의 분량도 상당히 축약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그 외 몇 작품에서 역시)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씌여졌다.  어떤 부분에서 그러하냐면 <개미>에서도 개미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었으며 그리고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가상의(개미 출간 이후 이와 같은 이름의 책을 출간했지만) 사전을 인용하여 개괄적으 담았다.  이 책 <검은책> 역시 갈립의 관점(전지적 작가시점)과 제랄의 칼럼(1인칭 주인공 시점)을 순차적으로 실었다.  결국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면들이 만나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각기 다른 관점의 개별적인(멀리서 보면 서로 충분히 관련이 있다)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뿐 아니라 이 책은 역시 이국적이라는 점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랍학자들과 이슬람제국의 이야기들.  생소한 그들의 이름과 철학과 이론들을 소개한 주석을 통해 '이 나라 훌륭한 지성과 지적)내세울거리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오르한 파묵은 노벨상의 영광을 조국에 돌렸다고 했듯이 나 역시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그리고 그들의 우수한)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소설보다는 사상서 내지는 철학서적 한 권을 읽은 듯 했다.  파묵은 이 책에서 에고(ego)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철학적인 고찰을 한 것이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한 권의 책이 이렇게 깊은 의미와 메세지를 담고 있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더불어, 노벨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칭호앞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다.  끝으로, 당신에게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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