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검은책' 이라는 제목만큼이나 범상찮은 기운의 띠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국적의 작가 신간이라고.  오르한 파묵에 대해 그간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사람의 책을 읽기로는 이 <검은책>이 처음이다.  도서발간정보를 보아하니 1994년작인데 국내에서 발간되기까지는 무려 13년이나 걸렸다.  신간하니 생각나는데 얼마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여럿과 '과연 신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도서의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의견은 실로 다양했는데 출간된지 2, 3개월이내의 책, 1년이내 혹은 2년이내의 책이다 등등.  대개 개인적인 기한에 따라 다양한 답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답변은 '작가가 마지막으로 펴낸 책이 신간' 이라는 의견이었다.  즉, 5년이고 10년이고 작가가 후기작을 내놓지 않는다면 최후 작품은 여전히 신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주장이었고 신선한 답변이었다.  그나저나 왠 신타령이냐고?  글쎄 그게 띠지를 보고 생각이 난지라 이야기 해보았을 뿐이다.  오르한 파묵의 신간이라기에.  역시 신간이다.  그래, 신간이지! 
 
  와~  이처럼 집중안되는 책, 정말 오랫만이다!  아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음이 아닐까 싶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잡생각이 났다.  분명 눈은 활자를 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에서 인식하고 떠올리는 영상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를 거듭, 또 거듭.  오호호~  나의 뇌가 드디어 멀티를 뛰게 된 것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건 그런게 아니었다.  눈으로, 입으로 맴돌았던 단어들은 그냥 스쳐지나갔을 뿐 나는 의미를 전혀 모른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몇번 머리를 털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아,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의 고비에까지 치닫자 나는 책을 덮어버렸다.  그러다....  다시 폈다! ^^;;;  한 번 편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덮지 않는 신조?  구태여 지키려고 노력한 적은 없지만 나는 여태껏 그렇게 해왔다.  꾸역꾸역 읽을지언정 중도에 포기하지는 않는다.  아, 신이 나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했던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술술 넘어가는게 아닌가?  나의 '막힘'은 오르한 파묵, 그의 문체 때문이었다.  아, 대체 한 문장안에 몇 개의 문장이 들어있는거야?  쉼표와 마침표는 절대 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는 그걸 유독 아끼는 듯 했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이 만연체(蔓衍體)가 그의 글의 특징이라니 못난 스스로를 질책할 밖에.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순간은 내가 그의 문체에 적응하기 시작했을즈음이라 생각된다.
 
  이 책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아내 뤼야가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자 남편 갈립은 아내의 행방을 추적하게 되는데 사촌이자 칼럼리스트인 제랄 또한 행방이 묘연해져 결국을 그 둘을 찾아 나서게 된다.  제랄과 아내 뤼야를 추적하는 끝에 갈립은 결국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갈립이 자신 스스로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무엇의 상징인가?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들이며 명확하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타인이 규정하는 나로 존재할 뿐이다.  책 속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 숱하게 등장하는데 결국 어느 누구도 자신 그대로의 자신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와 당신 역시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로 존재하고 있다.  나 자신도 규명할 수 없는 '나'를 어느 누구가 정확히 말해줄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 세계사]가 떠올랐다.)   결국은 인간은 완연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모든 것이 닮아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흉내내고 모방하며 산다는 것이다.  
 
  또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파묵은 모방에 있어 관대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이 모방이며 서로 닮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방에 걸린 여러개의 벽시계을 비유로 이야기 했는데 1) 방에 있는 시계중 하나만 시간이 맞고 나머지는 틀리하고 할 수 없으며 2) 방에 있는 시계 중 하나가 다른 것 보다 다섯시간 빠르다고 할 수 없으며 3) 즉 한 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른 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모방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논리를 설명이라도 하는 듯 급기야 갈립은 제랄을 흉내내는 삶을 살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모방의 실체들을 곳곳에서 찾아보여주려했는데 마네킹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인간형상의 모방이자 또 다른 표상으로 존재하는 마네킹.  그리고 마네킹제조업자가 터키인(소설속 배경이 터키이다)의 생김새로 마네킹을 만들자 서양인의 모습으로 만들어 내길 바라는 대목을 찾을 수 있는데 결국 파묵은 인간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 이상일 수 없다고 말한다.  거듭 말하고 거듭 말하고 있다.  제랄을 흉내내는 갈립을 통해, 터키인 스스로가 서양인 마네킹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제랄의 독창적인(상당부분 다른 저작물을 인용했으며 가상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칼럼을 통해, 그리고 그의 건실한 독자를 통해....  모든 것은 닮았으며 모방이며 흉내내기이며 서로 포함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 갑갑증을 느낀다.(물론 나 역시 정확히 백퍼센트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파묵 역시 이러한 쉽지않은 무언가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 1, 2권 합이 약 650이나 되는 페이지를 할애하여 이야기 했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방대한 '말할거리'에 비하면 이 정도의 분량도 상당히 축약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그 외 몇 작품에서 역시)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씌여졌다.  어떤 부분에서 그러하냐면 <개미>에서도 개미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었으며 그리고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가상의(개미 출간 이후 이와 같은 이름의 책을 출간했지만) 사전을 인용하여 개괄적으 담았다.  이 책 <검은책> 역시 갈립의 관점(전지적 작가시점)과 제랄의 칼럼(1인칭 주인공 시점)을 순차적으로 실었다.  결국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면들이 만나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각기 다른 관점의 개별적인(멀리서 보면 서로 충분히 관련이 있다)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뿐 아니라 이 책은 역시 이국적이라는 점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랍학자들과 이슬람제국의 이야기들.  생소한 그들의 이름과 철학과 이론들을 소개한 주석을 통해 '이 나라 훌륭한 지성과 지적)내세울거리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오르한 파묵은 노벨상의 영광을 조국에 돌렸다고 했듯이 나 역시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그리고 그들의 우수한)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소설보다는 사상서 내지는 철학서적 한 권을 읽은 듯 했다.  파묵은 이 책에서 에고(ego)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철학적인 고찰을 한 것이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한 권의 책이 이렇게 깊은 의미와 메세지를 담고 있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더불어, 노벨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칭호앞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다.  끝으로, 당신에게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