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형벌 - 사형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성찰
스콧 터로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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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극단의 형별.  붉은 색의 표지나 고딕체로 새겨진 강경한 표제는 다분히 선동적이다.  이 책은 사형제도에 관해 기술한 책인데  나는 오래전부터 '사형제도가 정당한가?  불합리한가?'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왔다.  특히 영화 <데이비드 게일(2003)>은 이런 의문을 더욱 절절하게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이에 관해서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았지만 어떤 쪽도 명명백백하게 자신의 주장을 타당하고 설득력있게 피력하지는 못했다.  대개 한 쪽에 치우쳐 있거나 이견을 배척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을 잠시 들어 보자면, 사형제존치론자들은 '사형은 향후 악질 범죄의 유발을 억제한다' 고 믿고 있었고 사형제폐지론자들은 '사형은 또 다른 살인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사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다.  말하자면 사형불가지론자다.  다시 말해, 중립인데 이것은 '흑 아니면 백' 이라는 극단적인 양상을 비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형제에 대해 어떤 소신을 갖기에는 그에 관한 인식이 불충분하다 느끼기 때문이고 이 제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과 무익.  이 둘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형제도를 존치할 것인가, 폐지할 것인가의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양방의 입장과 견해차이에 대해 전문적으로 다룬 책을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펼쳤다.  국내에서 발간된 사형제도에 관한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개 사형수들의 수기를 담은 책이나 이것을 소재로 한 소설책이었다.  또 더러는 법에 무지한 나같은 소시민은 엄두를 내지 못할만큼의 전문서적들이었다.  그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사형제 존치냐, 폐지냐' 하는 일극의 주장으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목적의 책이라기 보다 사형제,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내 짐작과 이 책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사형제 존치냐, 폐지냐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보다는 사형제 그 자체에 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자는 사형제가 실리적인 효과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입증하기 위해 기술하지는 않고 있다.)  존치냐, 폐지냐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들과 통계자료들을 다루어 허무맹랑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해보도록 하자.

  이 책을 처음 손에 집어들고 나는, '사형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성찰'  책 표지에 새겨진 노란 활자만으로 이 책이 '사형제 폐지'에 힘을 실어주는 책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착각이자 오해였다.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비인간성이라는 활자에 사형집행을 오버랩했으며 인간적 성찰이라는 활자에 사형제 폐지를 연상했는가?  왜 사형이라는 것을 사형수 입장에만 촛점을 두어 생각했을 뿐일까?  피해자와 유가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격과 슬픔, 분노와 고통을 주었던 대상을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고 절연함으로서 그들이 남은 삶은 안도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처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형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이라고 하면서도 나는 은연중에 사형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으며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닳았다.

  그러면 책의 내용으로 조금 더 들어가보자.  이 책은 사형선고에 대한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형수들이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으며 또 누명을 쓰고 죽어가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미 죽은 자들을 말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볼 때 실제 잘못 내려지는 사형선고의 수치는 더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았고 왜 그들은 사형이라는 잘못된 혹은 지나친 형을 받게 되는 것일까?  대개 피의자의 자백으로 인한 진술이 증거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 목격자의 착각이나 혼동으로 인한 범인 오판, 경찰 검사와 같은 공권력의 남용으로 인해 그러했다.  무의식 중에 피의자는 사형선고 앞에서 주춤대다 결국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모든 것들을 시인함으로써 문제를 종결짓고 싶어하는 심리상태가 된다는 것.  경찰들 또한 수사초기 단계에서 형성되는 신념에 치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 번 선고된 유죄판정을 뒤엎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형이 집행되기 15시간 전에 무죄판정을 받게 된 한 남자의 사례도 담고 있다.  이쯤 된다면 사형선고가 그 죄가에 합당한 것인지, 또 오판한 것은 아닌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고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이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그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사형제가 실질적으로 범죄를 억제시키는데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의 예이긴 하지만 통계결과를 살펴보자면 사형제가 존치되고 있는 주와 사형제가 폐지된 주의 (사형을 언도받을만한) 범죄 수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미미한 차이지만 사형제가 폐지된 주의 범죄 수가 더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왜 그럴까?  이것은 근거없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형, 단죄, 처벌 이런 것이 만연해진 사회가 더 삭막하고 인성이 결여된 인간들을 길러내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건 이 통계는 사형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사형의 효과'에 있어서는 입을 닫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 통계라는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국한 된 것이고 역사적으로 사형이 존치되어 온 기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의 통계인지라 그 정확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또 사형존치론자들은 '그런 극악무도한 인간들을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다스림으로 사회가 그들을 부양할 책임을 안게 되는데 왜 피해자들의 세금으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나?' 하고 생각한다.  이 역시 사형수들을 관리보호하는 비용에 따른 지적이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무기징역으로 수용소에서 먹이는 것이나 사형을 집행하는데 드는 비용은 별반 차이가 없단다.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 관리 유지, 인건비 그리고 재판을 통한 절차와 과정등 통과의례의 모든 노력을 비용으로 환산해보면 사형이 무기징역보다 결코 비용의 절감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  인간의 수명을 80으로만 본다하더라도 한 사람의 사형수 앞에 하루 세 끼 식사와 그 밖의 부수적인 비용을 다 따진 것이 어찌 사형집행의 비용과 엇비슷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형은 사형수의 속죄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인간의 불완전함과 유동성을 앞에두고 '구제불능한 자' 라고 낙인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되리라고 믿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형은 사형수들의 도덕적인 감화의 순간을 완전히 꺼버린다는 것이다.  앞 서 말한 몇 가들은 어찌보면 사형의 폐지에 관해 뒷받침하고 있는 듯 하지만 스콧 터로는 이러한 문제점을 다시금 짚어보고 사형을 존치, 폐지하자기 보다는 나름의 사형 집행에 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사형.  한 번 생각해보자.  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묻고 피해자와 유가족들과 범죄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특정 다수인 국민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형벌로 미미하게나마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자 신의 권리에 대항하는 행위를 '합법적' '도덕적' 이라는 명목 아래 저지르고 사형수의 목숨을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손을 대신해 사회가 처단해주는 것, 복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일 것인가?  

 

[함께 보면 좋을 영화]

데이비드 게일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6763    

그린마일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8677

나는 살고 싶다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389

교사형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6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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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 천연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새로운 냉정의 시대 세미나리움 총서 17
에리히 폴라트.알렉산더 융 지음, 김태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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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신문광고를 읽고 있던 친구가 이 책 광고를 보고 "재밌겠는데?" 한 것이 내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친구에게 주려고 이 책을 주문했고 받아서 휘뤼릭 들추어보는 과정에서 읽게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자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자원에 대해 무지하다 못해 무관심했던 내가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책이었다.  독일 시사지 '슈피겔' 기자들의 보고서들인데 세계 자원의 실태, 분쟁지역, 수요와 공급량, 생산자들에 대한 내용들이 내겐 생소했기 때문이다.  책을 다 덥고 난 지금도 내가 이 책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아마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자원에 관해 상식 상의 지식이 없던 내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었지만 은근히 재미있게 읽었다.  놀이터에 버려진 사탕 하나에 온갖 미미한 벌레들이 몰려드는 것과 같이 자원 하나를 두고 각 나라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계략, 정치 움직임 그리고 분쟁들.  왜 그토록 자원에 집착하는 것일까?  왜 욕심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자원들이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내고 고갈된다는데 있다.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될 날이 머잖았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석유와 가스 등의 자원들을 확보해 자국민에게 공급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막대한 자원을 가진 나라가 권력을 갖게 된다는 것 또한 무시못할 이유다.  이 책은 이런 나라와 나라간의 이해관계를 한 눈에 짚어볼 수 있다.  또 그 뿐 아니라 앞으로의 국제 정세를 짐작하고 예견할 수도 있다.  자원은 인류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한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나라와 나라간의 분쟁과 협력 가운데에는 반드시 실리적인 것들, 즉 자원이 놓여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자원을 이해하는 일은 국제 사회를 이해하는 일이나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운 한국, 우리나라.  돈을 내고 자동차에 주유를 하고 보일러에 기름이나 가스를 넣어 가동시키는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돈이 없어 주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기름이 없어 주유를 하지 못하고 기름이 없어 보일러가 멈추는 날이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매립된 자원의 많은 량이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최대발굴의 정점을 지나 종모양의 그래프 오른쪽 하강곡선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제 부의 여부로 자원을 취하고 그렇지 못하고의 문제는 넘어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이 증발하듯 유전이 마르고 가스가 바닥난다면 이 자원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연료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다.  문제가 꼬리의 꼬리를 무는 격이다.  새로운 연료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고갈되고 있는 이 자원들이 충분히 있어야만 가능하다.  공장도 그냥 돌아가지 않고 자동차도 그냥 구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원의 고갈은 단순히 석유와 가스, 금, 은등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대안이 그 뿐은 아니다.  어딘가에 묻혀있을, 발견되지 않은 그 보물들을 찾아나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유전을 개발하고 자원이 매장된 곳을 찾아내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큼의 돈과 인력을 투자해 개발하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남극, 북극 할 것 없이 이미 많은 나라들이 자원발굴을 진행 중이며 유조선없이 석유를 나를 수 있도록 대륙을 가로지르는 엄청관 크기의 파이프를 땅에 묻고 있다.  대한 돈과 인력을 투자해서라도 자원 매립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은 실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도 그런 투자는 계속 되고 있다.  이 책은 자원발굴을 위한 국제적인 동향을 고스란히 비춰주고 있다.  과연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책 <자원전쟁>은 석유, 가스, 석탄, 우라늄, 금, 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보크사이트, 구리등....  이런 귀한 자원들이 어느 나라에서 주로 생산되며 그 생산률이 세계 생산량의 어느 정도인지 부터 어떤 나라간의 이해관계와 분쟁이 있어왔는지 또 국제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자원이 고갈됨과 동시에 세계 변화의 추세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 책은 자원에 관해 혹은 국제적 이슈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몇 몇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또 그러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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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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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으로는 <일요일들>에 이어 두 번째다.  <일요일들>을 읽고 참 감각적인 글을 쓴다고 생각되었던 작가다.  그러던 중 두 번째로 읽게 된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악인>  사실 책의 띠지는 곧이 곧대로 믿지 않지만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새겨진 요시다 슈이치의 말은 이 책에 대해 큰 기대와 호기심을 부르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자신의 여러 작품들 중 과감히 대표작으로 꼽고 싶을만치 애정어린 작품은 과연 어떨까?  대체 어떻기로서니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솔직히 <악인>은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였다.  일회성 만남, 우발적인 살인, 복잡한 남자관계의 여주인공.  이것은 '타살' 이 등장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요시다 슈이치는 왜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이 소설을 통하여 메말라가는 감성, 사랑을 잃은 사람들, 책임을 떨쳐내려는 사람들, 일회용품과 같은 인간관계, 악랄함, 비열함, 잔혹함을 이야기 속 인물들을 통해서 담아냈다.  단순히 누군가로부터 살해된 자와 그 죽음 사이의 음모 따위를 들추어내는 스릴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병든 마음과 정신을 낱낱이 캐밝아냈다.  어쩌면 그는 이 사회의 병든 곳을 진단하고 고발하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이 글을 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진실한지 아닌지부터 따져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의도가 뭐지?' '나에게 무얼 원하지?' '내게 남는건 뭐지?' '진심일까?' 모든 것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 다음에야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물론 요즘같은 세상에 사람을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진심과 믿음이 통하지 않는 시대, 거짓으로 한 꺼풀 덮인 인간관계의 본질을 꾸역꾸역 밝혀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 애석할 뿐이다.  푼 돈을 벌기위해 아버지와 같은 남자에게 몸을 주는 소녀들, 하룻밤 껴안고 돌아서는게 쿨하다고 말하는 젊은이들....  그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감정이 없다.  아니, 이런 일들에 도리어 상대를 향한 감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걸리적거릴 뿐일테지.  이렇게 병들어버린 사회와 젊은이들의 만남, 팽배한 불신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이것을 집어내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만들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본디부터 인간의 선과 악은 양립되어 왔다.  본디 선하다는 성선설과 본디 악하다는 성악설, 그것도 아니면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들 한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여주인공 요시노는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긴 했다.  그러나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그녀 뒤에 있는 부모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 할지라도 결코 한 순간도 내 자식의 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부모.  그 아버지의 눈물, 그 어머니의 한숨때문이었다. 

  유이치.  신문기사에서 유이치를 만났다면 어떤 동정도 개입될 틈이 없어 '죽일 놈' 하며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상처받은 어린시절과 평온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보노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흔히들 끔찍한 범죄와 비인간적인 행위를 두고 우리는 '사회가 이렇게 만든게야.  몹쓸 세상' 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스스로 자위해왔다.  그러나 '정말 그렇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한 인물이었다.

  마스오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어쩜 이리도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고 잔인한지....  마스오의 행동은 누군가의 목을 조른 그 손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의 악의와 살기로 그득한 말과 행동은 정말 소름 끼쳤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마스오 부분에서 번역이 참 매끄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일어와 국어 단어 사이의 갭이 분명 존재했을 것인데 화자의 느낌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잘 캐취해 현시대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 같다. 

  일본이라는 나라.  그들의 자유분방함과 친절함과 정교한(?) 국민성은 늘 칭찬하고 싶은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난잡함과 문란함을 이면에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되어진다.  물론, 이 작품이야 인간의 악랄함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두운 구석을 들추긴 했겠지만.  그러나 일본 작품에서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면모는 비단 이 작품에서만이 아닌 것 같다.  이 역시 일본 젊은이들의 교제방법에 대한 일면을 볼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끝으로, 하나만 생각해보자.  '악인' 은 누굴까?  요시노일까?  유이치일까?  마스오일까?  아니면 이 모두일까?  어떤 답을 찾았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방관하고 관망하는 나 또한 이들과 같은 한 패가 아닐까?  '나쁜 인간들' 하며 혀를 차는 나 자신은 진정 선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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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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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집>  전경린의 새 작품이 나왔다는 말에 망설임없이 읽은 책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이 책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족.  이것은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최소단위이자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도 가족과 함께이고 앞으로도 가족이라는 덩어리는 삶의 커다란 영역임에 변함없을 것이다.  이렇듯 '가족' 이라는 소재는 많은 작가들의 화두가 되어오곤 했다.  역대 베스트 셀러들에서 살펴보자면 김정현의 아버지, 조창인의 가시고기등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작품들이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일깨우고자 했다면 전경린의 <엄마의 집>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다르다.  가족이 무엇인지, 가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고 또 가족 (여기서는 엄마, 아빠, 그리고 배다른 동생, 나) 의 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들의 각기 다른 삶을 이해하라고 하고 있다. 

  전경린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엄마를 바라보게 했다.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맡겨진 아빠의 재혼녀의 딸, 승지.  승지를 데리고 엄마를 찾아가는 '나'  그 곳에서 '나' 는 그제서야 엄마를 알게 된다.  그저 나를 이 땅에 있게 한 남성과 여성 중 여성이었을 뿐인 엄마가 아니라 여자인 엄마를....  무능한 한 남자의 아내였던 여자를.  다른 남자와 동거 중인 여자를.  그리고 그런 그 여자도 그녀의 엄마에게는 '딸' 인 여자를.

  어린 나에게 엄마는 그저 엄마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별이 마치 남자, 여자, 엄마인 마냥 엄마는 그저 엄마일 뿐이었다.  내게 그 여자의 희생과 봉사는 당연한 것이었다.  왜?  엄마니까.  그런데 언제였을까?  아이이던 내가 여자가 되면서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그 여자를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엄마는 그저 '굳세야 해, 흔들려서도 안되고 무조건 강해야 해' 하고 믿어왔던 나의 어린시절로 인해 그녀는 위로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엄마가 되면서 동시에 버려진 그녀의 이름을, 스스로를 가족에게 제물처럼 바친 그녀를....  그것을 당연히 여겨온 내가 몹시 미웠던 적이 있다.  이제는 엄마를 이해한다.  아니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녀를 모를지도 모른다.  그저 이해한다고 믿고 싶은 것일지도.  

  엄마.  그녀는 여전히 사랑을 알고, 거울 속 자신이 예쁘길 바라며, 강하고 용감해보이지만 약하디 약한 여자이며 작은 변화를 눈치 챈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웃음을 머금고 밥을 짓고 설거지와 빨래를 할 그런 여자다.  그런데 세상 모든 남편들과 자식들은 그녀도 여자라는 것을 뼛 속 깊이 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여자가 엄마가 되어버리며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남자도 남편이 되고 가장이 되면서 포기하는게 많다구, 이거 왜 이래?'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엄마, 여자를 이야기 하고 있다)  왜 모든 엄마들은 왜 여성이라는 성을 잃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까?  아무도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 그 시선들을 당연한 채 감당하면서 말이다.

  소설에서 '나'의 '엄마'는 그녀의 '엄마(할머니)' 집으로 간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  '나'가 엄마를 찾아가듯 엄마도 해결하지 못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그녀의 엄마를 찾는 모습을 통해 엄마는 모든 문제의 답이자 쉼과 같은 존재이다.  그녀들이 찾아갔던 엄마의 집.  그 곳은 자궁과도 같은 공간이다.  인간은 엄마의 주먹만한 집 안에서 일생에 누릴 수 가장 평온한 10개월을 누린다고 한다.  그처럼 엄마의 집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쉼의 공간이고 평온한 휴식을 안겨주는 곳이다.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힘겨운 문제에 부닥친 '나'와 '엄마'.  그녀들은 각기 서로의 엄마를 찾아갔다.  어쩌면, 엄마는 귀소본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집>에서는 엄마를 조명하고 붕괴되어버린 가정(더 나아가 사회) 을 들여다 보게 하고 있다.  가족이지만 세상을 향하는 사고와 방식이 모두 틀릴 수 있으며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허황된 소신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무능한 남자인 아빠, 다른 남자의 사랑이 된 여자인 엄마, 둘 사이에서 딸로 존재하는 나, 또 가족이라 인정해야만 할 아이, 승지.  이들의 이야기다.  나와 승지의 Mp3 플레이어에 서로 다른 노래가 담겨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머릿 속과 가슴 속에는 서로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다.  가족이기에 그 모든 것의 영역을 허물고 공유해야 하는 것은 치기어린 발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게 아닐까?  서로간의 몰이해는 이해와 소통의 부재를 낳고 결국 불신을 낳고 무너지고 마는 것처럼.  그렇다면 역시 가정에서도 내가 아닌 타인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충분히 수용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음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소설 <엄마의 집>은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을 보고하고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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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말 워쇼 사진, 이진 옮김 / 이레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몇 해 전이었을까?  나는 티뷔에서 아주 특이한 광경의 죽음을 보았다.  그 영상이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나의 죽음의 순간도 저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눈물이 없는 임종이었다.  대개 소중한 이의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울게 되어 있다.  마치 큰 소리로 울기라도 하면 죽을 사람이 영영히 가지 않을 것처럼.  혹은 '내가 당신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고 있어요' 하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곳에서는 떠나는 이나 보내는 이나 평온한 모습으로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이 나의 인생에서 함께여서 참 많은 힘이 되었어.  잘가~" 라고 인사를 건네고 자녀들은 "엄마가 나의 엄마라서 자랑스러웠어요" 하며 인삿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눈물을 없었고 입가에 고인 그들의 미소는 내게 경이롭기까지 했다.  과연 저럴 수 있을까?  죽음을 어찌 저리 초연한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죽음의 순간을 평온함 속에 맞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너무 짧게 보았던 탓인지 나는 그 독특한 임종의 순간 뿐 다른 것은 전혀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 관해서는 더 들을수도, 알아볼수도 없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지금,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토록 궁금해했던 죽음의 광경에 대해 잘 다룬 책이라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경이롭기까지 했던 그들의 죽음, 호기심이 일었던 임종의 순간들을 이 책에서 말 워쇼의 사진을 통해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읽는 내내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은 무엇인지,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소중한 것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죽음을 단지 슬픔과 두려움, 고통의 순간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이 땅에 왔다가 다시 어디론가 돌아가는 그 순간을 오로지 비통함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죽음 또한 우리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왜 부정하며 발버둥치고만 있는 것일까?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겁에 질린 눈을 하고서 말이다.  왜 숨 한포기 억척스레 뱉어내고 손목을 떨구면 일제히 '완전히 갔음' 에 통복하고 오열하는 것일까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아쉬움과 미련의 발로가 아닐까?  떠나는 자는 하지 못한게 더 있어서, 아직 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아서....  마찬가지로 보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보낼 준비가 안되어서 등의 이유로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죽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자들에게(아니 한 번은 죽음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남은 생을 미련없이, 아쉬움 없이 모조리 살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존재에 두려워 몸을 움츠리고 온갖 의술과 약에 치료에 끌려 그 앞에 가기보다는 내 앞에 당도한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은 삶을 좀 더 많이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별인사의 시간으로 삼으라고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막무가내로 의술과 치료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생, 회복, 치료라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혹자는 이를 희망을 져버리는 포기가 아니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것은 수용이자, 받아들임이다.  

  죽음 또한 인생의 한 과정으로,  탄생과 같이 기쁨으로 맞이할 수는 없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때의 소중한 기억들과 추억들로 가슴을 채우고 아낌없이 살아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것일까?  미련없이, 후회없이, 아쉬움없이 오늘을 살아버리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있는 일일까?  우리 모두 언젠가는 한 번 맞이하게 될 죽음 앞에, 잔잔한 마음으로 겁내지 않고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지금 내게 주어진 일 분, 일 초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나를 다해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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