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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형벌 - 사형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성찰
스콧 터로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극단의 형별. 붉은 색의 표지나 고딕체로 새겨진 강경한 표제는 다분히 선동적이다. 이 책은 사형제도에 관해 기술한 책인데 나는 오래전부터 '사형제도가 정당한가? 불합리한가?'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왔다. 특히 영화 <데이비드 게일(2003)>은 이런 의문을 더욱 절절하게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이에 관해서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았지만 어떤 쪽도 명명백백하게 자신의 주장을 타당하고 설득력있게 피력하지는 못했다. 대개 한 쪽에 치우쳐 있거나 이견을 배척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을 잠시 들어 보자면, 사형제존치론자들은 '사형은 향후 악질 범죄의 유발을 억제한다' 고 믿고 있었고 사형제폐지론자들은 '사형은 또 다른 살인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사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다. 말하자면 사형불가지론자다. 다시 말해, 중립인데 이것은 '흑 아니면 백' 이라는 극단적인 양상을 비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형제에 대해 어떤 소신을 갖기에는 그에 관한 인식이 불충분하다 느끼기 때문이고 이 제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과 무익. 이 둘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형제도를 존치할 것인가, 폐지할 것인가의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양방의 입장과 견해차이에 대해 전문적으로 다룬 책을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펼쳤다. 국내에서 발간된 사형제도에 관한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개 사형수들의 수기를 담은 책이나 이것을 소재로 한 소설책이었다. 또 더러는 법에 무지한 나같은 소시민은 엄두를 내지 못할만큼의 전문서적들이었다. 그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사형제 존치냐, 폐지냐' 하는 일극의 주장으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목적의 책이라기 보다 사형제,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내 짐작과 이 책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사형제 존치냐, 폐지냐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보다는 사형제 그 자체에 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자는 사형제가 실리적인 효과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입증하기 위해 기술하지는 않고 있다.) 존치냐, 폐지냐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들과 통계자료들을 다루어 허무맹랑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해보도록 하자.
이 책을 처음 손에 집어들고 나는, '사형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 성찰' 책 표지에 새겨진 노란 활자만으로 이 책이 '사형제 폐지'에 힘을 실어주는 책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착각이자 오해였다.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비인간성이라는 활자에 사형집행을 오버랩했으며 인간적 성찰이라는 활자에 사형제 폐지를 연상했는가? 왜 사형이라는 것을 사형수 입장에만 촛점을 두어 생각했을 뿐일까? 피해자와 유가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격과 슬픔, 분노와 고통을 주었던 대상을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고 절연함으로서 그들이 남은 삶은 안도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처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형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이라고 하면서도 나는 은연중에 사형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으며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닳았다.
그러면 책의 내용으로 조금 더 들어가보자. 이 책은 사형선고에 대한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형수들이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으며 또 누명을 쓰고 죽어가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미 죽은 자들을 말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볼 때 실제 잘못 내려지는 사형선고의 수치는 더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았고 왜 그들은 사형이라는 잘못된 혹은 지나친 형을 받게 되는 것일까? 대개 피의자의 자백으로 인한 진술이 증거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 목격자의 착각이나 혼동으로 인한 범인 오판, 경찰 검사와 같은 공권력의 남용으로 인해 그러했다. 무의식 중에 피의자는 사형선고 앞에서 주춤대다 결국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모든 것들을 시인함으로써 문제를 종결짓고 싶어하는 심리상태가 된다는 것. 경찰들 또한 수사초기 단계에서 형성되는 신념에 치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 번 선고된 유죄판정을 뒤엎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형이 집행되기 15시간 전에 무죄판정을 받게 된 한 남자의 사례도 담고 있다. 이쯤 된다면 사형선고가 그 죄가에 합당한 것인지, 또 오판한 것은 아닌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고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이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그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사형제가 실질적으로 범죄를 억제시키는데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의 예이긴 하지만 통계결과를 살펴보자면 사형제가 존치되고 있는 주와 사형제가 폐지된 주의 (사형을 언도받을만한) 범죄 수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미미한 차이지만 사형제가 폐지된 주의 범죄 수가 더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왜 그럴까? 이것은 근거없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형, 단죄, 처벌 이런 것이 만연해진 사회가 더 삭막하고 인성이 결여된 인간들을 길러내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건 이 통계는 사형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사형의 효과'에 있어서는 입을 닫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 통계라는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국한 된 것이고 역사적으로 사형이 존치되어 온 기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의 통계인지라 그 정확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또 사형존치론자들은 '그런 극악무도한 인간들을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다스림으로 사회가 그들을 부양할 책임을 안게 되는데 왜 피해자들의 세금으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나?' 하고 생각한다. 이 역시 사형수들을 관리보호하는 비용에 따른 지적이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무기징역으로 수용소에서 먹이는 것이나 사형을 집행하는데 드는 비용은 별반 차이가 없단다.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 관리 유지, 인건비 그리고 재판을 통한 절차와 과정등 통과의례의 모든 노력을 비용으로 환산해보면 사형이 무기징역보다 결코 비용의 절감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 인간의 수명을 80으로만 본다하더라도 한 사람의 사형수 앞에 하루 세 끼 식사와 그 밖의 부수적인 비용을 다 따진 것이 어찌 사형집행의 비용과 엇비슷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형은 사형수의 속죄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인간의 불완전함과 유동성을 앞에두고 '구제불능한 자' 라고 낙인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되리라고 믿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형은 사형수들의 도덕적인 감화의 순간을 완전히 꺼버린다는 것이다. 앞 서 말한 몇 가들은 어찌보면 사형의 폐지에 관해 뒷받침하고 있는 듯 하지만 스콧 터로는 이러한 문제점을 다시금 짚어보고 사형을 존치, 폐지하자기 보다는 나름의 사형 집행에 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사형. 한 번 생각해보자. 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묻고 피해자와 유가족들과 범죄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특정 다수인 국민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형벌로 미미하게나마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자 신의 권리에 대항하는 행위를 '합법적' '도덕적' 이라는 명목 아래 저지르고 사형수의 목숨을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손을 대신해 사회가 처단해주는 것, 복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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