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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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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유원 교수의 강연회가 있을 예정인데 참석하기 전 한 권 정도는 저서를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읽은 책이다.  강유원 교수의 많은 저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철학박사라 그런지 대다수 주제가 '철학'이었고 그의 서평집들이 두어권 출간되어 있었다.  철학 서적들은 대학교재 쯤 되어보이는 묵직함에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져 포기했고 서평집들은 패스.  결국 제일 얇고(^^;;) '책'이라는 주제를 담은 이 소책자를 선택! 

  철퍼덕.  이 무슨 소린가 하면 이 책 <책과 세계>를 다 읽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는 소리다.  아아, 이럴 수는 없어.  굉장히 어려웠다.   책은 얇을지언정 이 안에 담긴 내용은 왠만한 학술서적을 통째로 믹서기로 갈아놓은 듯한 수준이다.  이 좌절감.  간혹 이렇게 넘지 못할 산과 같은 텍스트를 만나게 되면 나는 한 동안 헤어나질 못한다.  '왜 내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가?' '어떤 것들에 더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달라지려나?'  급기야 시건방지게 저자를 원망하기도 한다.  '뭐야? 왜 이렇게 어려워? 이 자는 가독성을 살린 글쓰기가 전혀 안되는군!' 하는 것도 잠시.  곧 다시 한숨....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설명해줬는데도 이해를 못하는 내 자신은 결코 용서 못한다.  그래, 나는 이런 면에서 있어서는 스스로에게는 절대적으로 가학적이다.  그렇지만 OTL 자세는 이제 그만. 

  저자는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고 책 날개에 밝히고 있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지면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셈이다.' 라고 말이다.  와, 굉장히 기대가 돼.  안그래도 요즘 매 달 읽는 책 중에 한 두권은 반드시 고전을 읽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멋져.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니. 꺄악~ 그것도 잠시.  책장을 넘기고 나는 어리둥절 해졌다.  너무나 철학적인 문장들.  이 정도일 줄이야.  적어도 내게 저자의 첫 번째 목적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플라톤의 <국가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와 같은 고전들을 너무나도 읽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러한 것들에 완전하리만큼 몽매한 내가 과연 무엇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어라?  이거 아직까지 OTL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듯 한데?)  그러나 다른 하나의 목적은 부디 훗날 내게도 적용되길 기대한다. 

  애석하게도 이 책은 내게 '무진장 어려워 젠장' 이라는 굵고 단명한 깨닳음을 주었다.  언제까지나 내 입에 혀처럼 노는 텍스트만을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 보다 수준 높은 독서와 앎의 세계로 나를 초대할 거대한 고전들에 맞서 싸워야 함을 처절하게 깨닳았다.  책 꽤나 읽는 나의 나의 실상을 부끄러우리만치 발가벗겨 놓았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책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다.  이 안에서 안주하느냐 아니면 좀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느냐는 나의 선택에 달린 일이리라. 

  이런 중에서도 내게 인상깊은 구절은 존재했는데 그것들을 옮겨보자.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고 하여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p. 3~4)' 

  섬뜩한 글이다.  '독서는 중요하다. 이러쿵 저러쿵....  그래서 읽어야만 해' 하고 설득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무섭고 날카롭다.  '평생 그렇게 짐승처럼 살다가 죽고싶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그는 도리어 인간은 병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육체적 병이나 정신적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앎에 대한 갈망, 지적 결핍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 '앎'이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러한 '앎'의 재료들을 조합해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프리즘을 갖게 된다.  나만의 그 프리즘을 통해 내게 보여지는 세상만큼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풍부한 재료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앞에 펼쳐지는 세계란, 다를 수 밖에 없다.  쉽게 말해, 나 역시 이 텍스트들을 읽기 위한 '앎'이 부족했기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깔끔하게 집약한 것이 아닐지.  나는 항상 병들어 있기를 원한다.   '지적 결핍'을 느끼고 싶다.  그게 내게 독서와 학업에 대한 동기가 되고 크게는 삶의 핵심 키워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내게 도전이 된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가 조금은 다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배움을 위해 방황하고 어지러이 편력하고 싶다.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 이상의 일깨움을 준 책이기에 나는 이 책이 좋다.  그리고 다시 읽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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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떠난 마카롱 - 트렌드의 탄생과 확산의 미스터리
기욤 에르네 지음, 권지현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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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듯 보면 트렌드나 사회학을 다루고 있는 책 같지는 않다.  (아니 사실 여러번 봐도 그렇다)  책 표지가 비슷한 분야의 다른 책들과는 많이 다르다.  표지만 보았을 때는 한 권의 소설책 같다.  이러한 정보서들이 주로 채택하고 있는 책들에는 그 그룹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나 분위기가 있다.  그것들을 하나의 트렌드라고 본다면 이 책은 그런 트렌드를 과감하게 깬 책이 아닐까 싶다.  

  <파리로 떠난 마카롱> 나는 '마카롱'이 무엇인지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책을 펴기 전까지만 해도 '건장한 청년 이름'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프랑스 과자란다.  오오~ 맙소사.  국내에도 상륙해서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는 이 간식을....  나는 여지껏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물론 먹어본 적도 없다.  세계적 트렌드가 된 이 간식을 나는 어찌해서 한 번도 보지도, 먹지도 못했을까.  역시 나는 시대에 뒤쳐지는 사람?  집단의 취향에 무관심한 사람?  음.  나는 내가 마카롱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고 또 가급적 빠른 기회에 '마카롱'을 먹어보아야 겠다고 생각 중이다.  이것이야 말로 트렌드를 형성하는 기류가 아닐까?  그들만의 집합 속에 속하지 못함이 주는 '조급함, 불안감'이야 말로 트렌드를 발빠르게 전파하는 동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트렌드를 정의하라면 '개인이 집단에 소속하고 싶어하는 열망과 적극적인 행위 혹은 무의식적 선망이 만나 그 대상을 향한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쉽게 말해 '모두가 좋아한다는 마카롱.  나는 왜 못 먹어본거야? 어서 먹어봐야겠어' 하는 심리의 군집들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것 하지 못할 때 인간은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보자면 트렌드란 앞서 말한 것처럼 조급함과 불안함에서 시작해 안정감을 누리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트렌드를 다루고 있는 여느 책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지금까지 출간된 책들은(물론 다 읽어본 것은 아니나) 트렌드를 소개하고 알리는게 치중했는가 하면 이 책은 그러한 트렌드가 생성되는 현상과 그것을 바라보아야 할 사회학적 통찰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기에 후자에 속하는 이 책은, 어려웠다.  너무 어려웠다.  이러한 현상이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의 연구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오오~ 이전에도 후덜덜하게 만든 '피에르 부르디외' 가 곳곳에 등장하며 내게 위협을 가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이 자의 저서, 정말. 어렵다!) 전자에 속하는 책들을 잠깐 떠올려 보자면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트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이 때로는 '신생 트렌드 홍보'에 앞장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족 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 족(집단)의 다양함도 함께 제시했기 때문이다.  '맞아맞아' 도 물론 존재했지만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들이 많이 들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약간의 가십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인 이 책은 '트렌드' 자체가 아닌 이에 따른 현상들과 운용구조를 소개한 책이기에 상당히 어려웠다. 

  이 책 대로라면 트렌드는 예견이 가능하다 (실제 WGSN이라는 트렌드 컨설팅 에이전시가 운영되고 있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상업성을 목적으로 일부러 생성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트렌드를 '자본주의 모순의 해결책'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른 본문에서는 ....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의 재화를 새것으로 바꾸도록 부추김으로써 과잉생산의 위험을 낮추는 법을 찾아냈다....(p.66) 라고 말하고 있다.  그 밖의 가우스곡선과 롱테일 현상, 마태법칙 등에 연관하여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수차례 말했지만 내게는 너무나 어려웠기에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100이라면 내가 이해한 것은 불과 50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동분야의 여느 서적들과 확실히 차별되어 있다.  그렇기에 트렌드라는 것을 문화의 코드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보고 이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이보다 좋은 책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트렌드, 유행, 집단 취향, 대세....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또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관점을 전향해 준 책이다.  그나저나 나는 마카롱을 하루 빨리 먹어보고 마카롱 집단에 속함으로 인해 소외되고 도태된 듯한 이 기분을 떨쳐야만 할 것 같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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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겐 을유세계문학전집 14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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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과의 만남은 표지그림 때문이었다.  에곤 쉴레의 그림 '앉아있는 소녀'.  에곤 쉴레의 그림은 전부터 참 좋아했는데 작년 여름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을 하며 더욱 관심을 갖게 된 화가이기도 하다.  때마침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가는 곳곳마다 그의 그림으로 만든 포스터와 플랜카드가 펄럭여 한참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여행 일정상 그의 전시회는 갈 수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그의 그림을 더 찾아보게 되었고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고 무언가 이야기거리를 가진 듯한 인물들.  아무튼 나는 이 책의 표지에 눈길을 빼앗겼고 그것이 이 책을 좀 더 살펴본 계기가 되었다.   

  앞서 표지 이야기를 했지만, 단순히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가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니었다.  '성을 노골적으로 테마화하여 가장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란다.  과연 어떤 내용이길래.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문학에서의 프로이트' 라는 작가의 수식어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학계의 프로이트라니.  뭔가 인간의 내밀한 심리묘사나 표현들, 감정에 대한 분석들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라이겐>은 짧은 희곡들의 모음집이다.  라이겐, 아나톨, 구스틀 소위 이렇게 3가지의 큰 테마로 19가지의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이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춤의 형태로 원형으로 둘러서 추는 춤이란다.  이 중 '라이겐' 테마는 특히나 이 춤과 닮은 구성이다.  창녀, 군인, 하녀, 젊은 주인, 젊은 부인, 남편, 귀여운 아가씨, 시인, 여배우, 백작이 10개의 단막극에 등장한다.  '라이겐' 은 주로 성애가 주제가 된다.  그러나 전혀 외설적인 느낌이 든다거나 소위 말해 '야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왜냐면 '성을 테마화 한 것'이지 성행위를 테마화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직접적인 성행위에 있어서는 묘사되지 않고 있다. 작가가 성행위를 표현하는 부분은 ----------------------------------- 이렇게 긴 점선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특히나 이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인상적이었다.  여자들은 파트너로 하여금 이렇게 묻는다.  '말해봐.  나를 정말 사랑해?'  그리고  남자들은 행위가 끝난 후에는 여자들에게 전과 같이 다정하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여성들은 건전한 여성들은 아니다.  남편이 아닌 남자를 사랑하는 우뷰녀, 창녀, 십대소녀등이다.  물론 상대남성 또한 건전하지는 않겠지만 백작, 군인, 하녀를 거느리는 주인등 사회적 권위가 있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들은 대개 남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여성들은 비교적 수동적인데 당대의 분위기가 희곡 속에 녹아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아나톨' 테마의 8작품이 인상 깊었다.  아나톨은 신경쇠약증 환자 같았다.  극도로 민감하고 신경질적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는 심지어 그 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에게 각 각의 이미지에 맞는 짧은 문장들이나 단어를 부여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물건들을(머리카락, 먼지도 있음) 비닐팩에 보관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여자 친구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에게는 자신만을 바라보기를 원한다든지 이별통보를 하러 나선 자리에서 이별 통보를 당하고는 억울해 하기도 한다.  뭐랄까.  이 책은 절대, 절대 줄거리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작가의 문장들을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미치광이 이야기들처럼 느껴질 뿐이다.  '읽는' 다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위 없이 다른 어떤 걸로도 이해할 수 없는(이해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마지막 '구스틀 소위' 이 작품은 오로지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쉽게 말해, 혼자 하는 생각을 글로 옮겨둔 것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구스틀 소위는 오페라를 보러갔으나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어지러운 상태다.  그는 제빵사와 사소한 다툼을 하게 되고 그 다툼으로 인해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런데 죽음을 실행에 앞두고 그 제빵사가 뇌졸증으로 급작스레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살을 포기하고 기쁜 마음에 열심히 살기를 결심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 책은 난해하다.  하지만 희곡의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나 구스틀 소위의 속말들을 읽으며 그들의 심리상태나 관계, 감정들을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  희곡이라고는 하지만 형식이 그러할 뿐 극적인 요소도 없고 대개 잔잔하게 이어진다.  병적일 정도로 불안정하고 감정의 폭이 큰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오죽하면 이 작품을 '문학 작품이라기 보다 병원 검사 기록에 가깝다' 고 할까.  그러나 나에게는 그들 간의 대화에서 독자만이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을 즐기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아나톨'의 서곡에서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말한 문장들.  나는 마치 그것들이 이 작품을 요악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들을 여기 옮기며 마친다.  

 

....(상략)....  자 우리 연극을 하자, 우리 자신의 작품들을 공연하자,
일찍 성숙했고 부드러우며 비극적인, 우리 영혼의 비극, 우리 감정의 오늘과 어제,
사악한 것들의 아름다운 형식, 매끄러운 말들, 화려한 그림들, 절반의, 비밀스러운 느낌,
죽기 전에 몸부림, 에피소크......  몇몇 사람은 귀를 기울인다, 모두는 아니리...... 
몇몇 사람은 꿈을 꾸고, 몇몇은 웃는다.  몇몇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그리고 또 몇몇은 매우 도색적인 것들을 이야기 한다.....(하략).... p.123,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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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류의 아이 러브 베이스볼 - 초보가 베테랑이 되는 상큼한 야구 다이어리
김석류 지음 / 시공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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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는 내 취미 중 하나다.  물론 관람이다.  내가 야구에 빠진 것은 2006년경인 것 같다.  우연히 찾아갔던 야구장.  경기를 볼 줄 몰라도 재미있었다.  모든 관중들이 해설위원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응원하는 팀에게 유리한 경기가 펼쳐지면 열광을 한다.  모두다 뛸 때 나도 뛰고 모두가 심통해 할 때는 나도 그냥 가만히 앉아 쉬면 되었다.  더욱 웃긴건....  그 날 나는 처음 야구장에 갔고 열심히 응원한 탓에 응원단장이 주는 피자 한 판을 받아서 앞뒤좌우 관객들과 나누어 먹었다.  나의 야구 사랑은 이것이 시작이었다. 

  야구장을 다녀오고 한 껏 응원을 하고 온 날이면 승패와 상관없이 내게서 박하향이 나는 것 같았다.  시원하고 알싸하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건 사람에 대한 고민이건, 한 줌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점점 야구장을 가는 일이 잦아졌고 천천히 야구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김석류씨와(그녀가 2007년에 스포츠 아나운서로 모 방송국에 입사했다니까) 같이 야구에 입문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나의 연고는 대구이고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보는 일이 많았기에 나는 삼성팬이다.  내 응원유니폼의 등번호는 45.  내가 좋아하는 선수는 권오준 선수다.  이 역시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고 나는 더 줄기차게 야구장을 찾았다.  몇 해 전부터는 주말 원정경기도 다닐 정도로 누가봐도 야구광팬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나도 처음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우연히 친구와 야구장을 찾을 당시, 나의 직장동료들은 야구를 정말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극구 같이 야구장에 가자는 권유를 에둘러 핑계됐다.  "선생님은 몰라. 홈런 한 방에 시원한 맥주 한 잔과 그 닭 맛을...."  나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술맛도 관심없고 야구도 관심없고 빨리 퇴근해서 책이나 읽는게 내겐 최고' 였다.   

  그런데 김석류 아나운서가 말했더니 야구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석류 아나운서의 경우는 일로부터였고 나에게는 응원으로부터 시작됐다.  흥겨운 관중들이 좋았다.  신나는 응원도 재미있었고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하는 스탠딩(공격 할 때, 경기 잘 풀릴 때는 자연스럽게 스탠딩 됨.  그래서 항상 블럭의 맨 뒷 줄에 앉는다)에 대구구장에서 나누어 주던 그 파란 풍선과 불꽃놀이는 또다른 묘미였다.  지금은 그때의 직장동료들보다 내가 야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김석류 선수의 <아이 러브 베이스볼>은 참 많은 공감이 갔다.  야구의 매력은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보는게 제일이다.  나처럼 경기 룰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야구의 매력은 경기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분식집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단다.  그렇게 직접 찾아가 봤던 야구는 나를 야구와 아주 친숙하게 해 줌은 물론 경기 룰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런 내게 <아이러브 베이스볼>은 경기를 좀 더 즐길 줄 아는 눈을 선물해 준 것 같다.  야구를 좋아만 했지, 야구공이 왜 그런 모양이지 108개의 솔기(스티치)의 의미도 알지 못했고 그렇게나 다양한 볼 쥐는 법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명색이 투수를 좋아한다는 팬이 말이다.  

  또 <아이 러브 베이스볼>는 선수들에 대해서도 아주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어떤 선수는 공을 어떻게 던지고 어떤 선수는 어떤 성격인지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야말로 온통 야구 얘기뿐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전혀 몰랐던 것들에 대한 '아하' 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좀 부끄럽기도 했다.  '이러면서 그동안 내가 야구팬이라 할 수 있었나?' 싶었다.  양준혁 선수의 말이 딱 맞다.  (어쩜 양신 책을 요약하는 능력까지 있다냐? 호호.)  이 책은 '야구 초보자에게는 훌륭한 참고서가, 야구 마니아에게는 따뜻한 에세이가 될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야구 마니아에게도 수준에 따라서는 훌륭한 참고서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월드컵이 개막했다.  하지만 야구장의 관중들은 줄지 않는다.  두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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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을유세계문학전집 1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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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어본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으로는 <변신> 뒤 <소송>이 두 번째다.  그의 많은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카프카'의 냄새를 알 것도 같다.  이 소설은 <변신>만큼이나 흡인력있었던 소설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지 않고 왜 '소송'을 당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가운데서도 이 책은 묘하게도 집요하게 나의 눈길을 놓지 않았다.  

  이 소설은 미완성이란다.  그의 친구 브로트가 카프카의 명을 어기고 출간하게 됨으로 세상에 알려졌단다.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지만 내게는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걷는 듯한 이야기 전개에 독자로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아주 집중력있게 읽혔다.  다시 말해, 스토리나 기법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면이 나에게는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많은 여자에게 쉽사리 흔들리는 듯한 K 그리고 마치 그를 오래 알아온 것처럼 K를 대하는 여자들(뷔으스너터, 세탁부, 레니, 엘자),  그림보다 법원 일에 밝은 화가,  피고를 위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듯한 변호사,  유부녀와 바람난 법대생, 음란도서를 즐기는 예심판사, 성당 신부,  하숙집 여주인 등.  이 처럼 많은 등장인물들 역시 모호하다.  이 뿐 아니라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들 역시 의아한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K의 하숙집 방에서 심문을 하고 가정집과 법정이 연결되어 있고 다락방이 법원 사무처이다.  이것 역시 의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것들이 왜 그러할 것이라는 유추를 거부하고 단순히 그냥 그 사실을 독자로 하여금 받아 들이게 한다. 

  K가 소송에 휩싸였고 독자는 그의 소송 내용이라든지 누구로부터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K가 서서히 소송에 집착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일상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자는 K는 소송을 게의치 않고 법원 출두 명령도 무시하지 않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K가 소송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고 그 긴장의 상태들을 여자들을 통해 풀어버리곤 하는 것 같았다.(여자들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들과의 '정사'는 전혀 없었다.  이 역시 의문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K는 왜 그토록 그녀들에게 집착하는지)  그가 신경질을 부리며 분노하지만 않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소송으로 인해 아주 불안한 상태임을 여러 곳에서 보여준다.  이는 K 뿐만 아니라 소송을 당한 다른 자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니다.  또 다른 소송중인 상인 블로크를 보면 이 불안의 상태가 더욱 극대화된 것을 알 수가 있다.  블로크는 변호사를 여럿두고 있다.  K가 해당 변호사로부터 변호를 중지하기 위해 그 곳을 갔을 때 블로크는 거의 정신병자와 같은 정도의 행동을 한다.  K 앞에서는 무력한 변호사를 힐책하고 나무라더니 변호사 앞에서는 거의 개처럼 엎드려 굽신거린다.  이는 권력에 대한 소시민들의 무조건 적인 복종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지. 

  뿐만 아니라 K 주변의 모든 이들이 법원과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제조업자나 부지점장(확실친 않지만 그렇다고 본다.  법원 신부에게 K를 보낸 것으로 봐서) 그리고 법원 신부, 화가 등.  그리고 화가는 가장 이와 같은 인간관계 형성에 대해 아주 적절한 변을 길게 늘어 놓았다.  이런 인맥이 실제 소송사건에서 판정을 보류하거나 가상적 무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프란츠 카프카는 법학을 전공했단다.  그렇기에 법원의 구조나 소송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한 부조리한 면이나 환멸을 느낄 법한 것들을 열거함으로 이 사회 권력에 대한 부조리, 법원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욱 기이한 것은 K는 채석장에서 두 사나이로부터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된다.  어떤 소송이 피고를 무참히 살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일까?  이를 보았을 때 K는 아주 큰 법적 세력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렇게 피고를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의 권한 밖(사형집행이 아닌)에서 죽게 한 것이 아닐지 싶다.  이처럼 이 소설은 모든 것이 불명확하다.  알베르 카뮈는 "모든 것을 제시하지만 아무것도 확증하지 않는 것이 <소송>의 운명이자 위대함이다" 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카프카가 왜 그가 소송을 당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주력하는 이야기로 풀어갔다면 그것은 법정소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소설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쓰여졌다.  카프카는 소설의 시작과 결말을 미리 써 둔채 가운데 이야기들로 살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쓰다 미완성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대개 작가들이 죽음으로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름) 그렇기에 인물에 대해 묘사(수염색깔등) 가 바뀌기도 한다.  어찌보면 완전무결한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오늘날까지 그 명을 이어오는 것을 보면 바로 카프카만의 매력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카프카의 작품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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