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유원 교수의 강연회가 있을 예정인데 참석하기 전 한 권 정도는 저서를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읽은 책이다.  강유원 교수의 많은 저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철학박사라 그런지 대다수 주제가 '철학'이었고 그의 서평집들이 두어권 출간되어 있었다.  철학 서적들은 대학교재 쯤 되어보이는 묵직함에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져 포기했고 서평집들은 패스.  결국 제일 얇고(^^;;) '책'이라는 주제를 담은 이 소책자를 선택! 

  철퍼덕.  이 무슨 소린가 하면 이 책 <책과 세계>를 다 읽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는 소리다.  아아, 이럴 수는 없어.  굉장히 어려웠다.   책은 얇을지언정 이 안에 담긴 내용은 왠만한 학술서적을 통째로 믹서기로 갈아놓은 듯한 수준이다.  이 좌절감.  간혹 이렇게 넘지 못할 산과 같은 텍스트를 만나게 되면 나는 한 동안 헤어나질 못한다.  '왜 내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가?' '어떤 것들에 더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달라지려나?'  급기야 시건방지게 저자를 원망하기도 한다.  '뭐야? 왜 이렇게 어려워? 이 자는 가독성을 살린 글쓰기가 전혀 안되는군!' 하는 것도 잠시.  곧 다시 한숨....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설명해줬는데도 이해를 못하는 내 자신은 결코 용서 못한다.  그래, 나는 이런 면에서 있어서는 스스로에게는 절대적으로 가학적이다.  그렇지만 OTL 자세는 이제 그만. 

  저자는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고 책 날개에 밝히고 있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지면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셈이다.' 라고 말이다.  와, 굉장히 기대가 돼.  안그래도 요즘 매 달 읽는 책 중에 한 두권은 반드시 고전을 읽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멋져.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니. 꺄악~ 그것도 잠시.  책장을 넘기고 나는 어리둥절 해졌다.  너무나 철학적인 문장들.  이 정도일 줄이야.  적어도 내게 저자의 첫 번째 목적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플라톤의 <국가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와 같은 고전들을 너무나도 읽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러한 것들에 완전하리만큼 몽매한 내가 과연 무엇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어라?  이거 아직까지 OTL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듯 한데?)  그러나 다른 하나의 목적은 부디 훗날 내게도 적용되길 기대한다. 

  애석하게도 이 책은 내게 '무진장 어려워 젠장' 이라는 굵고 단명한 깨닳음을 주었다.  언제까지나 내 입에 혀처럼 노는 텍스트만을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 보다 수준 높은 독서와 앎의 세계로 나를 초대할 거대한 고전들에 맞서 싸워야 함을 처절하게 깨닳았다.  책 꽤나 읽는 나의 나의 실상을 부끄러우리만치 발가벗겨 놓았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책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다.  이 안에서 안주하느냐 아니면 좀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느냐는 나의 선택에 달린 일이리라. 

  이런 중에서도 내게 인상깊은 구절은 존재했는데 그것들을 옮겨보자.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고 하여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p. 3~4)' 

  섬뜩한 글이다.  '독서는 중요하다. 이러쿵 저러쿵....  그래서 읽어야만 해' 하고 설득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무섭고 날카롭다.  '평생 그렇게 짐승처럼 살다가 죽고싶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그는 도리어 인간은 병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육체적 병이나 정신적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앎에 대한 갈망, 지적 결핍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 '앎'이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러한 '앎'의 재료들을 조합해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프리즘을 갖게 된다.  나만의 그 프리즘을 통해 내게 보여지는 세상만큼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풍부한 재료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앞에 펼쳐지는 세계란, 다를 수 밖에 없다.  쉽게 말해, 나 역시 이 텍스트들을 읽기 위한 '앎'이 부족했기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깔끔하게 집약한 것이 아닐지.  나는 항상 병들어 있기를 원한다.   '지적 결핍'을 느끼고 싶다.  그게 내게 독서와 학업에 대한 동기가 되고 크게는 삶의 핵심 키워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내게 도전이 된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가 조금은 다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배움을 위해 방황하고 어지러이 편력하고 싶다.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 이상의 일깨움을 준 책이기에 나는 이 책이 좋다.  그리고 다시 읽어 볼 작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