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BBK, <한겨레>가 <조중동>보다 낫다" 
 
 

[뷰스앤뉴스   2007-11-24 09:59:36]
 
 
"이명박, <조중동> 있으니 버티면 된다 하다가 큰코 다칠 수도"

보수논객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24일 또다시 <조중동>의 '이명박 감싸기'를 질타하며 <조중동>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공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 전대표는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띄운 'BBK에 관한 한 <한겨레>가 <조중동>보다 낫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요사이 보수인사들로부터 “BBK 의혹 사건에 관한 한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가 <조중동>보다 정확하더라”, “이명박 후보의 해명이 거짓말로 밝혀지면 보수신문들이 함께 당할까 걱정이다”라는 얘기를 되풀이해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1961년 미국의 쿠바침공 당시 일화를 소개하며 <조중동>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난민들을 상륙군으로 편성하여 카스트로가 다스리던 쿠바에 대한 침공작전을 폈다가 반격을 받아 실패했다. <뉴욕타임스>는 침공 작전이 준비중임을 알고도 쓰지 않았다"며 "실패 후 <뉴욕타임스> 간부를 만난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가 미리 알았을 때 기사를 썼더라면 침공 작전은 중단되고 실패도 없었을 것인데 왜 쓰지 않았어요?'"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물론 <뉴욕타임스>가 기사화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던 침공작전을 언론이 망쳤다고 해서 오래 오래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면서도 "혹시 이명박 후보가 BBK 사건으로 잘못된다면 <조중동(조선, 동아, 중앙일보)> 간부들에게 '왜 그때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다면 나도 억지를 덜 부렸을 것이고 파국까지는 가지 않았을 터인데...'라고 말할지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이 여기까지 와버린 데는 <조중동>의 이명박 감싸기가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라며 "자신들의 반박을 엉터리까지도(김경준씨와 이 후보가 맨첨 만난 일자에 대해서 일부 보수언론은 이 후보측의 거짓 해명을 충실하게 소개해주었다) 잘 보도해주는 <조중동>이 있으므로 버티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거듭 <조중동>과 이명박 후보간 밀착을 질타했다.

그는 "인터넷이 가장 큰 언론으로 등장하고 국민들이 거의가 기자 역할을 하는 오늘날, 우호적인 종이신문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라며 "어제 이장춘 대사의 폭로 사례처럼"이라며, <조중동>에만 기대는 이명박 후보측에 강력 경고하기도 했다.

 


/ 김동현 기자 (tgpark@views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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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완전 패닉 상태네요. 다리 하나 건너서 한나라당 내부자들이 외부자들보다 아는 게 더 없다는 얘기도 들었고. 이명박이 낙마한다고 해도 이회창 찍기도, 정동영 찍기도 싫으신 분들이 분명히 있으리라, 아니, 오히려 그런 분들이 대다수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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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11-24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86'만 아니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좋아요.

마늘빵 2007-11-2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조갑제가... :)

Mephistopheles 2007-11-2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명이인 아닌가요 조갑제가 정녕 맞습니까?? ㅋㅋㅋㅋ

hallonin 2007-11-2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 허 허....

네, 조갑제가.

MB에게 목 걸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말이죠.
 

 

[제5원소]에서 나왔던 믹싱으로 채워지고 쪼개진 스페이스 디바의 일렉트로니카 성악곡이 내용적으로 차지한 그 어마어마한(비대한) 지위에 비해 영 촌스럽고 구닥다리처럼 보였던 이유는 그것이 뤽 베쏭의 오래 묵은 SF적 열정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미 우리 모두가 비요크의 노래를 들은 다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데뷔하면서부터 지난 세기의 마지막 오년여 간을 거의 모든 여자 보컬리스트들이 따라잡아야 하는 경지, 혹은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될 대상, 아니면 그 기이한 열정에의 매혹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마녀와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합쳐서 아연으로 간 다음 오래된 턴테이블에서 돌려서 만들어낸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고안해 낸 불협화음의 엇박자적 조화는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인 순진함과 기괴함이 뒤섞인 이계적인 공간감을 구성해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무가 되고 녹슨 쇠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물소리 같고 메아리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독특하고 독보적이어서 누군가가 그녀의 노래를 따라 하면 두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었다. 비요크를 베꼈다는 소리거나 어설프게 베꼈다는 소리거나.

물론 타인의 매너리즘도 온전히 그녀만이 가진 독자적인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비요크의 노래는 지겹다던지, 이제는 신선하지 않다던지. 너무 강렬할수록 쉽게 익숙해져버리는 후각의 명민한 게으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 의한 자극은 잦아들어갔다.

 

그러나 비요크는 멈추지 않는다. 그해의 워스트 드레서상을 휩쓸기에 충분할 정도로 괴이한(그리고 웃기는) 패션센스를 지나치게 과감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거리낌없음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길이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없어보인다. 결과적인 걸 제외하고 음 자체로 볼 때 그녀는 어지간한 아방가르드 음악을 훌쩍 뛰어넘는 전위적 음악세계로 쉬이, 그리고 꾸준하게 침잠해 들어간다. 하물며 그녀의 메가히트 트랙인 'hyper ballad'조차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화음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이가 우리를 놀라게 만든 주안 아니었던가. 음의 실험에 있어서 그녀의 욕구는 그칠 줄 몰라 보이고 그런 추구는 그녀에 대해 어떤 평가가 떨어지든 아랑곳 하지 않고 지속됐다. 뒤늦게 그녀를 일컬어 포스트 일렉트로니카라고 부르는 표현이 정확한 이유는 그녀가 항상 '그 뒤'를 향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이제야 한국엘 온다. 올해로 마흔을 넘어간 나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순진한 아이 같고 동시에 여전히 천진한 마녀 같다(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목소리 또한). 마치 수줍은 얼굴로 오래된 기담을 노래하는 것 같은 그 얼굴과 목소리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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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2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기억나는 영상은 태국공항에서 인터뷰하는 여기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바닥에 패대기를 쳤던 동영상이랍죠..^^

hallonin 2007-11-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전후로 비요크 엄마 집에 폭탄이 배달되기도 했고 좀 정서가 많이 불안정했던 걸로 기억되는군요.
 



[그라인드하우스]의 훼이크 예고편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가 이젠 아예 장편 DVD용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마셰티]. 그런데 예고편 한 편이 어째 웬만한 로드리게즈 장편 영화 하나보다 더 재밌네요. 이런 삘로만 밀어부친다면 뭐 불만 없음.

 

사실 [바바렐라] 리메잌판이 어떻게 되가나 해서 찾아보다가 튀어나온 건데 로드리게즈판 바바렐라역은 로즈 맥고완이 맡기로 했다더군요. 그러니까 [플래닛 테러]에서 나온 외다리 아가씨. 아니, 누나.


바로 이 아낙인데 저리 탱탱해보여도 1973년생이라 우리나이로는 35살인 상대적 노땅이십니다. 적절하게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인상도 있고 데뷔를 92년에 했는데 영화 검색하니 쓸만한 건 잘 안 보이고 티비 드라마에서 5년 동안 논 걸 보면 인생의 쓴맛 슬쩍 느끼면서 살아온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보니 기사에 로드리게즈랑 애인이 됐고 바바렐라역도 꿰찼다고 해서 아니 이 로드리게즈는 마누라에 애까지 딸리지 않았나 싶었는데 16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애 다섯까지 둔 마누라랑 이혼했네요.

 

16년 날릴만 함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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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무엇보다 좋은 것은 단순히 눈꺼풀을 덮는 수고만으로 주체없이 고통스러울 시간을 단축시켜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간에 현실의 싸구려 믹싱, 열성 복제된 라엘리안풍의 외우주적 계시, 미래 지향적 몽타주를 빙자한 묻혀진 과거 탐색, 추억의 공포영화 짜집기 모음 등등과 같은 모험을 가끔씩 제공해준다.

한바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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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다는 말은 때론 오만으로 비춰진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그 표현은 오만에 가깝다. 타인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오래 전부터 현대라는 기이한 강박 속에서 존재해야할 우리 팔자로는 동의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결국 마지막에 위안을 가져오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등등.

그러나 이해라는 행위는, 그러니까 표현이 아니라 행위는, 상대방과 나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며 그이의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헤쳐나가고자 하는 행동의 초석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표현이 아니라 행위다. 그래서 그 끝에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있다, 라는 말이 비로소 나올 때쯤이면 발화자 또한 힘들게 고민하며 겨우 내놓는 말이다. 왜냐하면 발화자 또한 그 표현의 두려울 정도의 파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차이점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용과 인내는 공존의 의지다.

이해는 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연쇄를 위해 필요하다. 감정, 앎, 그리고 행동. 이해는 모든 창조에 앞서 우선되야 할 조건이다. 이해라는 행위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니 가끔씩 이해해서 뭐에 쓸 거냐는 말을 들으면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그 말에선 내가 혹여 비춰낼지도 모를 오만에 대한 잔인한 방어기제가 느껴진다. 그 태생처럼 한계지어진 말은 '이해'라는 표현에 대한 부정뿐이 아니라 행위와 노력 자체에 대한 부정까지도 아우르기 때문에, 그 발언이 나에게로 향할 때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의도하지 않음에 의한 상처는 크다. 굳이 마음을 물화해서 표현하자면, 혹은 마음을 질량과 숫자의 영역으로 치환하면(그렇게 하지라도 않으면 마음은 더욱 불확정적으로 되버리기 때문이다), 말은 마음을 조금씩 깎고 부숴버린다.

 

그러나 말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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