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다는 말은 때론 오만으로 비춰진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그 표현은 오만에 가깝다. 타인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오래 전부터 현대라는 기이한 강박 속에서 존재해야할 우리 팔자로는 동의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결국 마지막에 위안을 가져오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등등.
그러나 이해라는 행위는, 그러니까 표현이 아니라 행위는, 상대방과 나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며 그이의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헤쳐나가고자 하는 행동의 초석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표현이 아니라 행위다. 그래서 그 끝에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있다, 라는 말이 비로소 나올 때쯤이면 발화자 또한 힘들게 고민하며 겨우 내놓는 말이다. 왜냐하면 발화자 또한 그 표현의 두려울 정도의 파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차이점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용과 인내는 공존의 의지다.
이해는 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연쇄를 위해 필요하다. 감정, 앎, 그리고 행동. 이해는 모든 창조에 앞서 우선되야 할 조건이다. 이해라는 행위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니 가끔씩 이해해서 뭐에 쓸 거냐는 말을 들으면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그 말에선 내가 혹여 비춰낼지도 모를 오만에 대한 잔인한 방어기제가 느껴진다. 그 태생처럼 한계지어진 말은 '이해'라는 표현에 대한 부정뿐이 아니라 행위와 노력 자체에 대한 부정까지도 아우르기 때문에, 그 발언이 나에게로 향할 때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의도하지 않음에 의한 상처는 크다. 굳이 마음을 물화해서 표현하자면, 혹은 마음을 질량과 숫자의 영역으로 치환하면(그렇게 하지라도 않으면 마음은 더욱 불확정적으로 되버리기 때문이다), 말은 마음을 조금씩 깎고 부숴버린다.
그러나 말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