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에 고딕로망의 현대적 대가, 광막한 지옥과 어둠의 창시자이자 아이스크림 중독자였던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집을 읽다가 생체시계의 유혹에 빠져 깜빡 잠에 빠져 있던 차였다. 구글과의 사운을 건 혈투를 벌이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 제작의 메신저가 팡팡하고 울려대는 익숙한 소리가 문어괴물이 꿈틀대는 꿈속에서 비몽사몽하고 있던 중에 들려와서 겨우 몸을 일으켜 보니,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목소리 좋은 늙은 소녀가 말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래 뭔 일이냐. 하니, 이 여자가 사랑에 빠진 거 같댄다. 이런 썅썅, 신성한 노동의 시작일인  월요일로 넘어간 이 시점에, 공복에 위산이 쏟아져 나오는 위험한 시간 새벽 2시에 누구 염장 지를 일 있냐! 라고 외치는 속마음을 감추고 그녀에게 친절하게 물어봤다. 누구니 그게?

"여자야."

여자! 아, 우리가 안지 어언 2년... 째던가 3년째던가. 암튼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느 해의 추석이었지. 왜냐면 그때 우린 툴에 대한 얘길 하면서 서로 친해진 거였거든.... 그때 툴은 여느 해처럼 대보름 파티를 기획하고 있을 때였으니 이 기억은 정확한 거겠지. 그 기간 동안 많고 무수한 일들이 있었고.... 뭐 그러던 통에 드디어 사랑에 빠진 늙은 소녀가 한다는 말이, 여자랑! 젠장, 레즈랑 사귈 바엔 차라리 나랑 사겨!

...라고 말한 건덕지는 전혀 없다-_- 돈도 없고.... 감당도 못하겠고.... 그러고보니 상대인 여자가 레즈라는 보장도 없군.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 레즈도 있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나는 금방 공감하고 납득한 다음 다시 아랍의 미친 광인이 쓴 무시무시한 지옥 예언서의 제목만이 줄기차게 언급되는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에 얘가 여자랑도 사겼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_-

'에이, 그건 계약연애였잖니.'(기억 속 정보)

뭐 사람 맘이란 게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일이니까. 그런데 이번 건이 놀라웠던 것은 그 평소엔 볼 수 없었던 호들갑에, 이 아낙의 입에서 무려 '사랑'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는 것이지.... 그런 거 모르겠다며!

아무튼 축하해요.

 

....서로 안지 하루 됐다고?-_-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udan 2005-11-14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핫.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사랑] 속 딱 그 상황이군요. 분위기는 영 다르지만.

hallonin 2005-11-1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안 읽어봤는데.... 밑의 오후의 악마는 친구놈에게서 하루키 같다는 소릴 들었었죠. 그때는 하루키 소설을 이죽거릴려고 엉망인 글 하나를 쓰고 있던 때여서 그랬던 거 같은데, 이거, 혐의가 생기면 곤란한데-_-
 

젯 셋 라디오, 신화나 되어라.

가끔씩 우리는 시대를 너무 앞질러서 나온 작품들이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처절하게 묻혀버리는 것을 보곤 한다. 그런데 세가는 그런 게임이 너무 많았다. 매니악한 센스, 언제나 너무 이른 시기에 나와서 실패해버리는 마케팅 포인트, 가끔씩 내놓았던 다소 골 때리는 게임성의 작품들과 도대체 어디에 써먹으라고 개발된 건지 모를 부수 하드웨어들 등등. 세가가 결국 콘솔 사업을 접고 서드파티 전문회사로 기업을 재편하는 동안에 보여줬던 장면들은 거의 그 수순에 이르게 된 게 충분히 이해가 가게 만드는 도정이었음이라.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당연한 것처럼 세가매니아라 불리는 이들이 당당하게 존재하여 아무도 안 사가는 걸 그들만큼은 열심히 사가곤 했으니 그중에 우스타 쿄스케(멋지다 마사루. 현재 피리 만화 연재중)가 끼어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 그 세가의 마지막 자체 플랫폼인 드림캐스트의 초기.... 뿐만 아니라 후기에 이르러서도 이놈의 하드웨어에 소속된 게임들은 하나같이 뭔가 매니악한 느낌이 들거나 아케이드 컨버전이 주를 이루는, 다분히 하는 사람만 할 것 같은 게임들을 양산해냈는데 그중 가장 빛나는 것이 바로 이 [젯 셋 라디오]였다.

게임 내용은 간단하다. 유저는 도쿄, 그중에서도 시부야를 중심으로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다니며 그래피티질을 해대는 동네 양아치가 되서 양아치들의 자유와 열정을 짓밟으려 하는 부자놈과 경찰들을 포함한 떨거지들을 무차별 그래피티를 통해 엿먹이는 것이 목적이다. 플레이어는 곳곳에 널려있는 스프레이들을 먹어서 잉크양을 콱콱 채워놓고 정해진 장소로 가서 그래피티를 직직 그리는 짓으로 한정 시간 내에 정해진 수의 그래피티를 채우면 미션 클리어.




이 게임이 일단 먹어주는 것은 그 스타일에 있다. 셀쉐이딩 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게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센스를 보여주는 그래픽은 그래피티 전문가를 불러서 고안됐다고 설명된 만큼, 스트릿 그래피티 스타일에 더없이 들어맞는 감각을 펑펑 쏟아내고 있다. 거기에 그루브감이 넘쳐나는 다양한 일렉트로니카 트랙들은 해보지 않고도 이 게임을 충분히 사랑스럽게 만들어준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게임 사운드트랙을 꼽자면 [스트리트 파이터3 서드 스트라이크], [괴혼], 그리고 이 사운드트랙을 꼽아준다.



그러나 이 게임의 게임성이란 것도 결코 스타일에 비해 만만치 않은 것이라, 처음엔 게임 자체가 낯선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조작이 다소 어려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일단 익히고 나면 마약이 따로 없다. 카툰랜더링과 일렉트로니카가 만들어 놓은 발랄유쾌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역회전, 벽타기, 지붕타기 등등의 액션들은 [매트릭스]의 공간비틀기와 비슷한 쾌감을 안겨주는데 가끔씩 놀라울 정도의 속도감도 보너스로 제공된다.



그러나 이 모든 혁신적 요소와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판매량은 8만장.... 도 안 나갔던가. 아무튼 이후 드림캐스트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처럼 대단히 암울했다. 물론 그렇게나 엄청나게 안 팔린 덕에 이후 [사립 저스티스 학원2]와 더불어 값이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 대표적인 중고GD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지만. 아무튼 그 탁월한 게임성 만큼은 여전한 자장을 발휘됐던지라 이후 엑스박스로의 컨버전 및 업그레이드가 이뤄지는데 그것이 바로 [젯 셋 라디오 퓨처]. 전작의 조작이 다소 어려웠다는 비판을 수용하여 컨트롤러 조작이 훨씬 쉬워졌으며 시간제한이라는 요소를 제거하여 한층 여유있게 게임을 즐기게 만들었다.... 만. 이것도 7만장도 못 나갔던가-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단 주류 순문학 업계와는 삐딱선을 타는 한겨레 문학상의 선택 답다는 생각.

서술에의 방법론, 전쟁터의 치열함을 묘사하기 위한 형용사와 부사의 일관된 억제는 훌륭한 선택이었으나 전쟁의 슬픈 풍경을 담는 이야기 전반과 충돌한다는 느낌을 가끔씩 받았다. 작가의 의도에 더 충실했더라면 이보다는 더 건조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렇게 하면 그저 역사서이지 소설이 아니잖느냐, 라는 반론이 있다고 한다면 작품 전체적으로 감출 수가 없는 센티멘탈한 감수성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가 문제.

만화로 만든다면 사무라 히로아키가 딱일 듯. [무한의 주인]에서의 관문통과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221P '일본에 도착한 후... 사창가로 팔려갈 것이다.' 이 부분에서 '사창가'보다는 '유곽'을 쓰는 편이 더 나을 듯.

묘사의 간결성이 두드러지는 만큼 시원시원하게 읽히는 편. [엄지손가락의 기적] 때보다 조금 늦은 시간 내에 완독. 재밌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발표는 경제사회와 영화의 강의용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분석은 두가지로 분류가 가능한데 하나는 영화의 외적인 영향력이 경제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연구, 다른 하나는 영화의 내적인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제사회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은 후자입니다.
[올드보이]가 채택된 이유는, 실은 지금에 와선 [복수는 나의 것]으로 하는 게 쉬웠다고 후회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일단 비평적으로나 수치적으로나 구할 수 있는 자료량이 풍부한 편이었고 또 타이밍 좋게도 [올드보이]와 관련된 현상과 제작과정 전반을 묶은 책이 바로 올해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어디에서도 [올드보이]를 경제사회와 결부시켜서 설명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도전의식 비스무리한 것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예전부터 일본의 버블붕괴와 장기 불황이 우리나라가 IMF 이후에 겪고 있는 불황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현상적 측면에서 비슷한 시대를 품고 나온 두 텍스트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올드보이]는 경제현상 자체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앞서 말한 [복수는 나의 것]이 차라리 그런 성질에 어울리는 텍스트죠. [올드보이]는 그보다는 일종의 징후를 잡아낸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올드보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다음 두가지 키워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실 이 두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영화 [올드보이]에 대해선 그리 많은 얘기가 필요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작 [올드보이]와 박찬욱 감독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입니다.

 

쓰치야 가론,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올드보이]

만화 [올드보이]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버블붕괴입니다. 만화의 이우진, 카키누마는 버블경제를 타서 급속도로 재벌이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죠. 90년 초에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이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게 된 일본의 장기불황은 단순히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측면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양상이었습니다.

 

우선 경제적 요인을 보겠습니다. 사이토 세이치로의 지적에 따르자면 버블붕괴의 경제적 요인은 다음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80년대 후반에 있었던 경기 활황으로 인한 엔고충격을 금융완화와 같은 긴급재정조치 시행으로 넘긴 일본의 경제전문가, 정부, 경제계 사람들의 의식 변화입니다. 즉, 낙관론이 대두된 거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달러를 가진 나라로서, 미국의 가장 큰 채권국으로서 자국의 자산가치가 상승했다고 믿게된 것. 이것은 소비를 급증시켰고 엔화의 가치를 지나치게 고평가하게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80년대 후반에 보여졌던 도매물가와 소비자물가의 하락추세, 혹은 안정세가 첫째로 제시된 엔화의 고평가와 안정된 경제구조라는 간판에 힘있는 논거가 됐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1987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뉴욕주식시장의 붕괴에 따른 블랙먼데이의 재현을 두려워 한 미국정부가 강한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금리인상을 견제했고 그 결과 87년 2월부터 89년 5월까지 2년 3개월 동안 2.5%의 저금리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시장에 과잉유동성을 공급하게 되어 거품이 불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경제적 문제들이 멀쩡하게 일어나려면 어떤 사전작업이 필요할까요. 만국 공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정치적 부패입니다. 1997년, 버블붕괴 이후 7년째가 되던 해에 잃어버린 10년의 한복판에서 전후 최대의 금융스캔들이 터집니다. 아사히 중앙은행에서 총회꾼에게 300억엔에 달하는 대출을 불법적으로 해 준 사건이었죠. [쥬바쿠]는 이 사건을 논픽션으로 그린 원작을 영화한 겁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부정스캔들에서 그치지 않고 50여년 동안 나라의 뿌리를 잡고 있던 자민당 정권과 재계의 비정상적인 유착 관계 폭로로 이어졌습니다. 1997년은 바로 [올드보이]가 연재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버블붕괴의 원인과 과정에서 제가 보다 중점을 두고싶은 것은 사회적, 도덕적 측면의 현상들입니다. 사회적 증상으로 보자면 일본인들은 버블붕괴 바로 전 해인 1989년에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을 겪어야 했습니다. 89년에 검거된 미야자키 츠토무는 88년부터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 4명을 유괴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하고 사체를 먹고 그 모든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관하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야자키 츠토무가 오타쿠라고 불리는 일본 서브컬쳐의 매니악한 향유계층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미야자키 츠토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주변상황은 무척이나 병리적이었습니다. 오타쿠라는 사회계층 자체가 소비사회의 마지막 단계에서 태어났다는 분석처럼, 그의 공간은 개인적 망상과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소비품들-애니메이션과 유아포르노, 에로만화들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의식 속에서 살해된 아이들은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 반성없는 환경에서의 극단적 돌출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소비사회의 극단을 경험한 탕자가 벌일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습니다.

 

다른 하나는 93년에 있었던 오움진리교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일본내 사회학자들 다수는 오타쿠 문화의 병폐적 양상으로 이 두 사건을 동시에 꼽고 있습니다.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는 특촬물과 연관시킨 이상세계에 대한 자신의 환상을 교인들에게 세뇌하듯 이식함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오타쿠 문화의 병리적 양상들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오움진리교 사건의 중요한 점은 그 범죄에 가담한 오움진리교 사람들의 핵심이 도쿄대나 와세다대 출신의 사회 고급인력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도덕붕괴를 이보다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 없었죠.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 폭력. 부조리. 당시 사린가스 테러의 경험자들이 술회한 증언에 따르면 사린가스의 중독에 의한 고통을 한마디로 '공포가 머릿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출근 지하철에서 악몽에 시달리면서 죽어가야 했는가. 붕괴 이후 부조리와 불안은 사회 전체적으로 하나의 증후가 되어갔습니다. 만화 [올드보이]는 이런 시대적 정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에서도 일본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일본의 버블붕괴가 있은 후 7년 후에 우리나라에선 IMF가 있었죠. OECD가입, GDP 1만불 시대 개막과 같은 장밋빛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텅텅 빈 외환고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봐야 했습니다. 마치 버블이 풍성하게 부풀어오른 가운데에서 주식시장 붕괴를 바라봐야 했던 일본처럼 말입니다. 이미 그때의 우리나라에선 사회적으로도 곳곳에서 몰락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폭발 사건. 그 모든 일들이 1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건설업은 나라의 기반을 차지하는 산업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분야에서 부조리한 대형사고가 연속적으로 일어난 겁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엔 부실시공이라고 하는 단어가 붙어있었습니다. 고속성장,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결과였습니다. 반성할 줄 모르고, 돌볼 줄 모르던 시절의 악몽들이 아주 뒤늦게서야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의 유사성 만큼이나 IMF 이후의 우리나라는 일본과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됩니다. 평생직장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대량실업 사태가 빚어졌으며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급증했습니다. 그것은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를 만든 2003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3년에도 여전히 불황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IMF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간격을 확장시켰습니다. 중산층의 몰락은 돈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간극을 더욱 키웠습니다. 물론 서류상으로 IMF를 1년만에 졸업했다는 성과가 있었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취임 직후 코스닥을 중심으로 한 주가 폭등과 내수활성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의 정부 말기에 가서는 환상과도 같은 얘기가 되었고 2003년엔 그와 관련된 부작용들이 드러나고 있었죠. 코스닥은 거품논란을 겪으면서 떨어질 대로 떨어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내수활성화는 신용카드의 양산에 의한 것이었죠. 그로 인한 후유증은 엄청난 수의 개인파산자 증가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2003년은 정신없이 사건들이 몰아친 해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이 부패와 비리에 깊숙이 들어간 것들이었습니다. 대북사업 비리 건과 관련하여 정몽헌 회장이 자살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이 낀 게이트 수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며 최태원 SK 회장은 1조를 넘는 천문학적 숫자의 분식회계로 법정에 섰습니다. 혼돈과 비리, 후유증.

이제 원작 [올드보이]와 영화 [올드보이]가 공유하는 것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이것은 영화가 원작의 틀을 가져온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앞서 확인한 것처럼 영화와 만화는 비슷한 시대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다 노골적인 은유로 드러나는 것은 보통사람과 사회적 권력자의 대립입니다. 만화 [올드보이]의 고토는 미술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며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키누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부도 지위도, 변태적인 성의 지향도 충족시킨 끝내... 자신의 생애에서 부끄러움 또는 상처같은 응어리를 생각해 낸 사람.' 그에 반해서 다소 설명이 부족한 영화에서 하루하루 대충 수습하고 사는 오대수와 이우진은 하강과 상승, 낮은 곳과 높은 곳의 은유로 나타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대수는 내려가고 이우진은 올라갑니다. 시작하면서 오대수는 옥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이우진은 펜트하우스에 살며 내려가는 순간이 파멸의 순간입니다. 반대로 오대수는 올라가서 이우진과 '같은' 위치에 서게됨으로써 결국 파멸을 맞이합니다. 심지어 오대수의 친구는 지하 피시방을 경영하고 있죠. 주인공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힘으로 표상되는 이우진과 카키누마는 행동을 제외한 그 성격 자체는 만화와 영화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오대수와 고토는 그 성격을 달리 하며 이것이 영화와 만화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조리의 키워드입니다. 만화나 영화나 둘 다 10년간 갇힌 사람과 15년 간 갇힌 사람은 똑같이 자신들이 당하는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화와 영화에서 부조리의 풍경이 시작되는 해도 의미심장합니다. 만화에서 고토가 갇히는 해는 1987년입니다. 바로 버블의 절정기였죠. 앞서 설명드린 일본의 비정상적인 저금리 정책이 시작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오대수가 갇힌 해는 1988년입니다. 이 해는 우리에게 정치적 좌절의 해였습니다. 서울의 봄으로 평화적인 군사정권 몰락을 성공시킨 시민들과 민주화 세력들은 김대중씨와 김영삼씨의 후보단일화 실패를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해야 했습니다. 서로의 개인적 이해관계로 인해 벌어진 이 결과는 국민의 소망을 져버리고 결국 한 차례 더 군사정권의 수립을 맥없이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달콤한 기만과 기이한 부조리가 현현하기 시작하던 세상에서 살던 고토와 오대수는 그 근원들에 대한 해부가 이뤄지던 97년과 2003년의 현실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난폭하게 떨어지게 된 거죠.

 

[복수는 나의 것]

다음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은 IMF시대의 잔인한 풍경들을 총망라한 우울한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복수는 나의 것]에서 중점적으로 봐야 할 키워드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돈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중심에는 돈이 놓여있습니다. 류가 신장을 팔게 되는 것도 돈 때문이고 가족 집단자살의 이유도 돈이며 동진은 재산을 거덜내면서 류를 쫓습니다. 돈은 끊임없이 부유하면서 사건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영화는 가면 갈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지워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같게 되기'라는 서사적 장치입니다. 동진은 자신의 딸이 유괴당하자 가장 먼저 자신의 앞에서 배를 가른 공장기술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집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범인이 아니었죠. 되려 그 남자는 가족과의 집단자살을 택함으로써 자신이 사회의 우회적 피해자였음을 보여줍니다. 범인은 류였습니다. 그저 동진에게 고용된 노동자였을 뿐 아무 상관이 없었던 류가 유괴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착하게 살았는데, 남에게 피해 안 입히고 살았는데 동진은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경험을 겪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게 되기'의 원인이자 두번째 키워드, 부조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켜버리는 부조리. 착하게 살고 아무 피해 안 주며 살던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부조리.

과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부조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보여지는 실업, 구조조정, 극단적 무정부주의 같은 것들이 IMF 이후 우리가 겪어야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들이란 걸 주시할 수 있겠습니다. 무한경쟁, 모두가 가해자이자 모두가 피해자가 되버린 세상.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장기매매로 대변되는 상업논리는 그런 시장원리에 철저합니다. 같은 값엔 같은 값이 따릅니다. 죽이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을 막아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원한과 복수라는, 1-1=0이라는 간단하고 자명한 산수논리만이 존재합니다. 결국 모두가 죽습니다. 이 동반자살극이자 비극적 결말은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거대한 구조의 희생자라는 것을 우회해서 보여줍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우리는 [올드보이]에서 [복수는 나의 것]에서 발견했던 '같게 되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이 안되는 결과. 오대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우진에 대해선 얘기를 달리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우진은 피해자라기보다는 궤변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적대적 은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원작과 영화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대수와 고토라는 캐릭터의 차이입니다. 원작에서 일반인이며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살아온 고토는 오대수완 달리 복수의 화신이 아닙니다. 그가 결국 카키누마를 무너뜨리게 만드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완벽한 수혜자이자 그 제도를 완전히 장악한 인물인 카키누마가 가진 어둠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키누마에게 고토의 존재는 자신의 어둠과 공허를 간파하여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토는 수도자에 가까우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대수는 고토처럼 괴물의 어둠을 직시할만 한 감수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는 갇혀있는 동안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성급하고 날이 선 인간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고토에겐 부재했던 가족의 존재와 그 상실이 오대수에겐 크게 영향을 미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오대수는 원작의 냉정하고 침착한 인물이 아니라 복수가 삶의 목표가 되는 '괴물'로 거듭나죠.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과 류에게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 캐릭터는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극단을 지향하는 파멸극의 방아쇠가 되는 겁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인물들에게 도덕적 붕괴를 통한 파멸을 준비해둡니다. 그것은 금기이기도 하고, 또 그 금기의 향유는 이우진이라는 극단적 존재의 특징을 결정지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의 류와 동진은 서로가 같은 인간들이라는 걸,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걸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서 서로를 죽이려 듭니다. 그들은 같게되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파멸하진 않습니다. 끝까지 목적이 된 복수 자체는 꾸준히 유지됩니다. 그러나 [올드보이]는 같게 되는 순간이 바로 붕괴의 순간입니다. 그것은 근친상간이라는 도덕적 붕괴입니다. 물론 저는 남매간의 사랑이 그저 도덕에 대한 치기 어린 비웃음이 섞인 불장난으로만 드러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여동생을 두고 가문을 음모의 전당으로 만든 보르자 가문의 이야기도 있거니와 인간이란 별의 별 일을 다 해낼 수 있는 존재니까요. 하지만 이우진은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 받기 힘든 일이며 동시에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대수에게 근친상간의 죄를 덮어씌워서 망가뜨리는 방법을 택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앞서 우리는 미야자키 츠토무와 옴진리교의 사례를 봤습니다. 도덕의 붕괴는 소비사회의 극단적 일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잃게 된 것에 대한 복수로 원한의 대상에게 근친상간을 강요하게 만드는 이우진은 이미 도덕적으로 망가진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한 사람의 운명을 돈과 권력으로 흔들어대는 권력괴물입니다. 그런 이우진과 다르다는 근거 하나만으로 복수를 준비해 온 오대수는 그와 자신이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무너집니다. 스스로를 지탱시켜 줄 단 하나의 제어장치가 무너져버린 겁니다. 그렇게 이우진은 다르다고 확신하던 오대수를 억지로 자신과 같은 위치로 만듦으로써 파멸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빅브라더적 괴물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마지막은 이 이야기를 시작한 부분으로 돌아갑니다. 처음 얘기한 것처럼, 영화 [올드보이]는 원작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이 융합된 결과물이고 그를 뒷받침되는 시대적 상황들이 뒤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올드보이]는 붕괴 이후에 찾아온 극단적 증후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징후이긴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진실들을 뒤에 안고 있는 풍경들입니다.

 

------

질문 : [올드보이]라는 영화 자체만으로 경제사회를 설명하라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 발표를 보니 만화에서부터 감독의 전작까지에 걸쳐서 다뤄낸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본래 영화 자체에 집중되었어야 할 분석이 너무 곁가지로, 그리고 상징과 같은 부수적인 요소들 위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까.

답 : 물론 영화 자체가 가진 텍스트만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영화가 있다면 이 주제에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왜 2003년에 만들어졌으며 왜 330만명이란 관객이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갔는가를 중요시 했습니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합니다. 미국 호러영화에 대한 로빈 라이트의 작업이라든지 최근의 프랑스 소요사태 전에 만들어진 프랑스 상업영화의 흐름이라든지를 보면 영화가 어떻게 시대를 반영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2003년이란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어느 인과를 통해 이뤄진 결과가 아닌가. 그것이 경제사회에 대한 분석과 맞닿을 수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해보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감독의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이 언급된 이유가 그저 원작만화에서 일본경제의 문제점만 발견하려 한 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한 반론과 두 나라가 가진 징후들의 탐색에 대한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영화의 텍스트는 영화 자체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제반 요소들의 통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38&article_id=0000305326§ion_id=104&menu_id=104

 

영화는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내는데 익숙하다. 우리는 하나의 문화적 화두였던 97년 홍콩 반환과 오우삼, 왕가위의 작업들을 기억한다. LA 흑인 폭동 전해에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를 만들었다. 70~80년대 미국에서 호러영화는 보수정권 시대를 관통하는 표상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증오]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프랑스란 나라에서 저렇게까지 난리판이 벌어질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앵그리 영맨들이야 어느 지천에도 깔려있는 것이겠고 [증오]는 그 양상이 국지적인 측면에서 드러난 폐쇄적 게토의 풍경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걸 느끼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키스 오브 드래곤]에서부터였다. 영화 속 프랑스의 풍경은 한마디로 '지저분하다'라는 인상이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키스 오브 드래곤]의 공간은 [레옹]의 뉴욕을 그대로 가져온 듯 했지만 그보다도 더 더럽고 지저분하며 거친 인상을 풍겨내고 있었다. 구정물이 흐르는 세느강을 낀 공간에서 외지인 형사는 부패한 파리 경찰에 의해 누명을 쓰고 쫓기고 얻어맞는다. 모든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그를 도와주는 것은 오직 콜걸 한 명뿐이다. [키스 오브 드래곤]은 이연걸이라는 '동양인' 배우에 대한 방점을 의식한다 하더라도 파리라는 공간에 대한 특이할 정도의 자학적인 인상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여기서 파리는 내내 회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야마카시]는 명백히 공간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리고 그 공간은 외곽에 자리한 게토지역들이다. 이 영화의 중심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고 공간에 익숙한 주인공들의 육체와 폐허와도 같은 도시의 외딴 장소들이다. 썩고 망가진 공간에서 살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건 뛰고 날아다니는 청년들의 몸뚱아리뿐이다. 그들 주위는 온통 부조리하고 부패한 시스템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부패한 악당에게서 돈을 털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악당이 사는 곳은 거의 성채하고 비슷한 장소다. 범법자가 그보다 더 한 악당에게서 돈을 털어내는 이야기. 천사가 없는 세상. 악당보다 덜한 악당이 필요한 세계. 이것은 [증오]에서 보여줬던 분노라는 정신상태가 육체라는 틀을 가지고 보다 격렬하게,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대중적 동의를 가지고 나타난 결과로 보였다.



그리고 [13구역]에 와서 뭐랄까, 프랑스의 소위 지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빈민가가 모여있는 게토 안에서 벌어지는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액션을 봐야한다. 경찰은 부패한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방관자 수준이고 그런 경찰 덕에 여동생이 납치되서 약물에 강간에 별의 별 꼴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봐야했던 주인공은 분노로 가득 찬다. 그런데다 정부는 폭탄을 이용해서 아예 게토 자체를 쓸어버리려 한다. 여기서 주인공들을 제대로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주인공들이 믿는 건 오직 마샬아츠와 야마카시로 단련된 몸뚱아리 하나뿐이며 그것 빼고 제대로 돌아가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다. 나 외의 세계에 대한 지독한 적의. 그리고 그런 세계관이 꾸준하게 먹혀 들어가는 프랑스 상업영화의 흐름. 프랑스란 나라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 건, 바로 이 영화를 본 시점에서였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길함이었다.

관용과 수용의 사회, 평등한 교육과 자유로운 표현의 사회라는 프랑스라는 국가의 아우라. 그러나 [증오]가 나온지가 벌써 10년 전이다. 그럼에도 분노는 가장 대중적인 수단을 통해 지지를 얻을 정도로 지하 밑에서 계속 흘러오고 있었다. 변함없이.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아이 2005-11-0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얼마 전부터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들르곤 했답니다.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서 꽤나 충격 먹었더랬는데, 아아 이러한 전조가 있었군요. 슬픈 글인데, 야속하게도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숨은아이 2005-11-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제 서재로 퍼가도 될까요?

hallonin 2005-11-0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헐 감사합니다. 좀 시간 내서 제대로 다듬고 싶은 얘기기도 합니다만 블로그 페이퍼의 성격에 맞게 그냥 한 번에 써버렸습니다. 퍼가는 거야 물론 출처만 표기되면 상관없습니다.

Fox in the snow 2005-11-0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리하세요. 제가 즐겨찾기 신고했던가요? 항상 흥미로운 시각에 놀라고 갑니다.

숨은아이 2005-11-0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제 서재로 퍼갔어요. 알라딘 서재에서는 퍼가기 누르면 상단에 원래 출처가 표시된답니다. ^^

hallonin 2005-11-0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상찬에 감사드립니다. 흐.

긁적긁적 2005-11-08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댄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