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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내는데 익숙하다. 우리는 하나의 문화적 화두였던 97년 홍콩 반환과 오우삼, 왕가위의 작업들을 기억한다. LA 흑인 폭동 전해에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를 만들었다. 70~80년대 미국에서 호러영화는 보수정권 시대를 관통하는 표상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증오]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프랑스란 나라에서 저렇게까지 난리판이 벌어질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앵그리 영맨들이야 어느 지천에도 깔려있는 것이겠고 [증오]는 그 양상이 국지적인 측면에서 드러난 폐쇄적 게토의 풍경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걸 느끼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키스 오브 드래곤]에서부터였다. 영화 속 프랑스의 풍경은 한마디로 '지저분하다'라는 인상이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키스 오브 드래곤]의 공간은 [레옹]의 뉴욕을 그대로 가져온 듯 했지만 그보다도 더 더럽고 지저분하며 거친 인상을 풍겨내고 있었다. 구정물이 흐르는 세느강을 낀 공간에서 외지인 형사는 부패한 파리 경찰에 의해 누명을 쓰고 쫓기고 얻어맞는다. 모든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그를 도와주는 것은 오직 콜걸 한 명뿐이다. [키스 오브 드래곤]은 이연걸이라는 '동양인' 배우에 대한 방점을 의식한다 하더라도 파리라는 공간에 대한 특이할 정도의 자학적인 인상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여기서 파리는 내내 회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야마카시]는 명백히 공간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리고 그 공간은 외곽에 자리한 게토지역들이다. 이 영화의 중심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고 공간에 익숙한 주인공들의 육체와 폐허와도 같은 도시의 외딴 장소들이다. 썩고 망가진 공간에서 살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건 뛰고 날아다니는 청년들의 몸뚱아리뿐이다. 그들 주위는 온통 부조리하고 부패한 시스템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부패한 악당에게서 돈을 털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악당이 사는 곳은 거의 성채하고 비슷한 장소다. 범법자가 그보다 더 한 악당에게서 돈을 털어내는 이야기. 천사가 없는 세상. 악당보다 덜한 악당이 필요한 세계. 이것은 [증오]에서 보여줬던 분노라는 정신상태가 육체라는 틀을 가지고 보다 격렬하게,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대중적 동의를 가지고 나타난 결과로 보였다.

그리고 [13구역]에 와서 뭐랄까, 프랑스의 소위 지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빈민가가 모여있는 게토 안에서 벌어지는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액션을 봐야한다. 경찰은 부패한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방관자 수준이고 그런 경찰 덕에 여동생이 납치되서 약물에 강간에 별의 별 꼴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봐야했던 주인공은 분노로 가득 찬다. 그런데다 정부는 폭탄을 이용해서 아예 게토 자체를 쓸어버리려 한다. 여기서 주인공들을 제대로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주인공들이 믿는 건 오직 마샬아츠와 야마카시로 단련된 몸뚱아리 하나뿐이며 그것 빼고 제대로 돌아가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다. 나 외의 세계에 대한 지독한 적의. 그리고 그런 세계관이 꾸준하게 먹혀 들어가는 프랑스 상업영화의 흐름. 프랑스란 나라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 건, 바로 이 영화를 본 시점에서였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길함이었다.
관용과 수용의 사회, 평등한 교육과 자유로운 표현의 사회라는 프랑스라는 국가의 아우라. 그러나 [증오]가 나온지가 벌써 10년 전이다. 그럼에도 분노는 가장 대중적인 수단을 통해 지지를 얻을 정도로 지하 밑에서 계속 흘러오고 있었다.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