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에 진보적 지식인들의 찬탄과 젊은 세대의 실용주의 데이트 노선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면서 강력한 정치적 화두로 떠오른 좀비물의 기세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사그라들고 있던 터였습니다. 거기엔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 영화 제 3탄으로 온갖 기대를 받고 있었던 [시체의 날]에게 쏟아진 악평들도 한 몫 했구요. 그런데다 내부의 적과의 갈등이라는 좀비영화의 정치적 노선이 자본주의의 노선 경쟁 승리에 의한 냉전 체제 붕괴와 더불어 잠시 주춤거렸던 탓도 있습니다. 물론 거기엔 자유주의 무역의 확대로 인해 변질된 공동체의 일원인 타자=100% 적이라는 공격적 사고관의 전파가 배경에 깔려있기도 했죠. 더이상 좀비물이 가진 미묘한 정치관, 세계관은 새로운 게 아니고 일상 그자체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변화된 사회에 대한 절치부심의 결과인지, 로메로는 자신의 데뷔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할 것을 결심합니다. 물론 새시대에 걸맞게 자신은 뒤로 빠져 제작자 역할을 하고, 감독은 당시 특수효과계의 거물이었던 톰 사비니에게 맡기죠.
그래서 만들어진 영화는 제법 재밌는 편이었습니다. 물론 시대상을 반영한 리메이크판임을 고려하여 여자의 역할이 더 커지고 문제의 결말부가 좀 바뀌긴 했지만,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야유는 더 노골적으로 보여진다고나 할까요. 결론적으로 톰 사비니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아주 팍하고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별볼일 없게 심심한 것도 아닌, 전체적으로 무난한 리메이크판으로 나왔습니다.
이후 한동안 제대로 된 좀비물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통 호러물 장르 전체의 쇠퇴 경향과도 맞물리는 건데, 그 과정에서 호러물의 양식들, 특히 고어적 표현과 같은 것들이 [양들의 침묵] 이후 스릴러물에 흡수되어 네오느와르의 형태로 드러났다는 것, 그리고 헤비메탈의 쇠락과 동반된 얼터너티브의 중흥기와 그 시기가 겹쳐져 있다는 것을 주목할만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중 90년대 중반, 게임계의 핵폭탄이었던 캡콤의 [바이오 해저드]가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공개되고 그 작품이 공전의 히트 및 이후 줄줄이 시리즈를 이어가게 되면서부터 다시금 좀비물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김정대씨의 지적대로 좀비라는 괴물은 수없이 죽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비디오게임 세대의 최적의 아이콘이 될 가능성이 있던 크리쳐였습니다. 이제 좀비는 더이상 복잡스런 정치적 상징이 아닌, 순수한 척살의 대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이 기회를 놓칠쏘냐, 일단 [바이오 해저드2]의 예고편 감독으로 조지 로메로를 기용한 것이 일련의 흐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 [바이오 해저드]는 미국판 제목인 [레지던트 이블]이란 딱지를 달고 영화로 만들어지죠. B급 호러물과 게임에서 파생된 기획영화들의 전문가였던(물론 개중엔 크툴루 신화의 악몽 같은 SF버전인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수작도 끼어 있지만) 폴 앤더슨을 기용하여 만들어진 [레지던트 이블]은 B급의 감수성을 살리면서도 천박하게 보이지 않는 재주를 선보이며 게임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고 마냥 얼간이 같은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냅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밀라 요보비치의 유일한 프렌차이즈로 자리를 박게 되죠.

좀비 영화의 진화는 미국에서의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대니 보일의 손에 의해 이뤄집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라고나 할까요. 무려 '달리는' 좀비가 나타나게 된 거죠. [28일 후...]에서 바이러스에 의해 좀비가 된 이들은 달려들어서 목을 물어 뜯습니다. 사람이 사악해진 만큼 좀비도 업그레이드.... 뭐 마땅한 생각이긴 합니다. 확실히 달리는 좀비의 존재는 기존의 좀비들과 확실한 구분점을 마련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니 보일의 이 재기작은 좀비영화의 전통이 가진 정치적 성향을 부활시키는 성과도 이룩해냅니다. 결국 인간의 적은 인간, 이라는 아주 고전적이면서 이제는 당연시되는 것을 [28일 후...]는 '화끈하게' 보여줍니다. 네, 무섭습니다 이 영화-_-

뒷심부족만 빼면 그런대로 볼만 했던데다 꽤 노력파였던 [레지던트 이블1]에 비해 2는 엉성한 홍콩액션물을 보는 듯한 감각으로 많은 이들을 실망시킵니다. 도대체가 좀비들의 습격이 박력이 없어요. 그런데다 타일런트는 맺집만 좋아서는 디리따 얻어터지는 역할만 하고 있고.... [28일 후....]의 격렬했던 감각을 맛 본 이들에게 [레지던트 이블2]는 여름용 블럭버스터로의 뻔한 진행만을 선사합니다. 전편에 비해 제작비도 팍팍 부은 이 영화에서 제작자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고질라]의 방법론이었습니다. 더 크게, 더 많이, 라는 물량전의 공식 말이죠. 그러나 관객이 바라는 건 화염폭풍 속에서 날아오르며 쌍권총을 쏴제끼는 여전사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3탄도 제작중이지만요.

[28일 후...]의 적자는 다른 곳에서 나왔습니다. 다수의 뮤직비디오와 CF를 감독하고 그것들로 칸느에도 다녀왔던 잭 스나이더는 [시체들의 새벽]이라는 클래식 걸작을 리메이크하면서 보다 격렬하고 강렬한 공포를 선사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여기서도 달리는 좀비가 튀어 나옵니다. 사실상 다들 달리고 있죠 여기 좀비들은.... 그런데다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 답게 카메라를 다루는 실력 또한 능수능란해서 이 영화가 전해주는 화끈한 재미에 올드팬들이나 MTV세대나 다들 맘에 들어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리고 [숀 오브 더 데드]가 있었죠. 이 영화 또한 [시체들의 새벽]을 원전으로 삼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만, 다른 점이라면 노골적인 개그물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공개되기는 [새벽의 저주]보다 먼저 공개됐었습니다. 솔직히 비영어권 사람들 눈으로 보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블랙유머가 그리 와닿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일단 저부터가 그랬으니까요-_- 좀비영화에 대한 이해와 영미권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웃을 구석을 놏칠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나 할까요. 뭐, 기대치가 너무 높으면 정작 접하면 심심해 보일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니만큼. 저로선 이 영화를 처음, 뉴스위크지에서 알아냈는데, 그 기자가 얼마나 상찬을 쏟아놨는지.... 암튼 부풀어진 솜사탕 맛이었습니다-_-

이런 와중에 관객들의 시청각에 테러를 가하는 듯한 영화 한 편도 나왔습니다-_- 역시나 좀비물 게임의 걸작인 [하우스 오브 데드]를 원작으로 한.... 이라고 말은 하곤 있지만 어디를 봐야 게임과 같다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게임을 제작한 세가나 이 영화의 배급자나 마찬가지로 잊고 싶을 것인 영화 [하우스 오브 데드]는 신세기에 쓰레기 영화란 어떻게 만드는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바이블과도 같았습니다. 뭐 일단 이것도 좀비물이긴 좀비물이니까요....-_- 감독은 불릿타임의 남발이 영화를 구원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듯 합니다. 하긴,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진 몰랐어도 이미 제작사에서 공식시사회조차 갖지 않고 개봉해버린 영화였으니까요....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업계의 본령이자 대가인 조지 로메로 할배가 돌아왔습니다. 기존의 좀비물들이 좀비의 탄생과 습격 진행과정, 그리고 파멸에 촛점을 맞추고 있던 반면에 [랜드 오브 데드]는 좀비들의 습격이 있은 이후, 살아남은 인류가 인류만의 사회를 구축하여 위태롭게나마 잘 먹고 잘 사는, 다소 안정된 상태의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영화에선 시대를 거부하는 듯 천천히 슥슥 걸어다니는 좀비들이 잔뜩 등장하는데 인터뷰에서 보면 로메로 자신이 뛰어다니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못박은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코멘트를 하자면 정치적으론 흥미로웠으나 영화 자체로는 좀 재미가 떨어진다고나 할까요....
감독의 명성이 명성인만큼 연기파 조연배우들의 대거 주연화가 돋보이는 [랜드 오브 데드]에선 무엇보다도 아시아 아르젠토의 주름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아르젠토가의 부녀는 2대에 걸쳐 로메로와 함께 작업을 한 셈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