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임은경과 같은 동네 사람으로 두 번 정도 2미터 내의 거리에서 구경도 해봤고, 동시에 중학교 선배인 입장에서 애정을 가지고 이 글을 쓰는 바입니다-_-

임은경이 처음 티티엘과 함께 튀 나왔을 때를 생각해보면, 대단했죠. 티티엘과 임은경이라는 브랜드로 당시 에스케이텔레콤은 백만명이나 되는 가입자를 끌어모았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그 사실 하나로 임은경을 메이저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당시 컨셉으로 들고 나왔던 티티엘의 이미지 자체가 스탠다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박명천이 감독한 그 CF는 난해한 이미지와 과도한 생략, 블라인드 마케팅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컬트현상을 노리고 제작된 작품이었죠. 그런 강렬한 이미지의 대상 그 자체로 나왔다는 것부터가 일단 임은경의 이미지를 묶어버린 것이고, 동시에 소수의 지지에 국한되게 만든 결과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임은경의 그런 이미지를 그대로 타고 가려고 했던, 일단 시도 자체는 탁월했던 영화였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그 제목이 주는 미묘한 쾌감-메르헨, 성서적 신화가 뒤섞인 키치적 쾌감을 고스란히 전달해주는-에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다만, 감독이 장선우였다는 게 문제였죠-_- 이 양반은 영화외적으로 하나의 현상을 불러 일으켜서 영화의 시의성을 바깥으로까지 확장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반면, 영화 자체는 의도적인 것과 감독 스스로의 감각이 뒤섞인,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론 다소 부실한 모양새를 가진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장선우 감독이 아니라 다른 이가 맡았다 하더라도, 당시의 충무로의 기술력으로 저 영화의 백그라운드에 포진한 이슈성 요소들이 불러 일으키는 아우라를 충족시킬 정도의 결과물은 내놓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장선우 감독 정도 되니까, 당시 꽤 여러 명을 파산시킬 수 있었던 무지막지한 제작비를 끌어모았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영화는 개판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었다고 해도 거둔 성과는 빈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장선우 감독의 특기인 이슈 차원에서조차 말이지요. 류승완 감독이 한 말을 약간 차용해오자면 그 돈을 차라리 불우이웃돕기에 쓰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암튼 임은경의 악몽이 시작된 이즈음에서부터 임은경은 보다 적극적으로 연기자로서의 탈바꿈을 시도합니다. [품행제로]는 소위 신비소녀의 이미지를 벗고 연기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변화가 감지되는 동시에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촬영 중간에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의 바보 같은 완성도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그녀의 행보는 철저하게 틴에이지 아이돌의 길을 따랐지요. 아무래도 백만명을 끌어모은 임은경의 과거를 보자면, 그리고 그에 맞는 성과를 거둘려면 그녀의 행보가 대중지향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백만명이, 당시 태동하던 핸드폰 사업과 그 젊은 수요층을 거의 전부 끌어가버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백만명이란 수요는 핸드폰 수요가 전 계층으로 확장된 지금의 백만과는 다릅니다. 당시 백만명은 막 핸드폰 구입 및 이용에 적극적으로 달려들던 구매층,  동시에 티티엘 광고에 공명하는 젊은 세대들의 것이었습니다. 에스케이텔레콤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한 계층 구분 전략이 성공한 결과라고 해야겠죠. 그들은 특권층, 소수자라는 환상을 티티엘에게 돈을 바침으로써 구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백만명이 임은경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그 백만명이 지지했던 것은 임은경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이미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임은경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연예계라는 정글에 들어와버렸고, 그녀가 과거에 갖고 있던 명예는 싸그리 다 물말아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리는 건 배우 임은경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임은경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연기자로서의 아우라입니다. 일단 에러성 짙은 고갸루 스타일 화장술과 마케팅 전략을 고수하는 현 기획사는 뛰쳐 나오는 게 최우선이고.... 그 다음엔, 베스트극장이라든지, 인디영화라든지 같은, 보다 그녀의 안목을 소수에게나마 인정 받을 수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니, 어떻게 임은경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시대를 티티엘 시대에 묶어두고 있는 열성적인 팬들이겠죠. 앞서 봤듯이 그녀는 컬트문화의 상징으로 대중문화계에 틈입해 들어온 캐릭터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미지만으로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거둔 과거와 연기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현재의 그녀가 메워야 할 간극은 작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줍잖게 대중적인 것들을 찔러보는 것보단, 아예 소수자들의 영역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다고 티티엘과 같은 신비소녀역을 주구장창 끌고 가라는 소린 아니지요. 바보 같은 시트콤에 다수 출연하고 이것저것 일을 겪은 통에 더이상 기자회견장에서 수줍게 고개만 숙이고 있지 않게 된 덕분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녀의 이미지에서 옛적의 신비소녀 이미지는 상당 부분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로선 마이너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일을 잡는다고 해서 딱히 현재의 이미지에서 더 부서질 것이 있다곤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입니다. [레인보우 로망스]도 뛰쳐나왔구요-_- 제가 보기엔 그렇게 하는 것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나영과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만, 가장 이상적인 도정으로 보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긁적긁적 2005-12-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예인의 장래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가진 내가 단언컨대, 임은경은 그 매부리코를 고치지 않는한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의 매부리코는 세인들에게 너무나 강렬하게 각인된 나머지 쉽사리 고칠 수도 없다는 딜레마가 문제.

hallonin 2005-12-1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 코는 참... 언제부터 그리 눈에 띈 건지-_- 뭐 연기로 메워야지 그런 간극은.
 



윤리를 말하던 이들이 공갈협박을 하고, 과학자가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뒤틀린 걸 뒤틀렸다고 말하지 못하는, 혹은 자각도 못하는 언론이 그 모든 자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허상 앞에서 미친듯이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거운 광기가 제 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웃고 있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날로그맨]은 궁상 맞은 만화입니다. 그리고 그 궁상맞음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습니다. 누리코리아에 연재되다가 단행본으로 나오게 된 이 작품은 만화가인 주인공이 돈이 다 떨어져서 집세도 못 내고, 해서 결국은 노가다판에까지 나가서 막장일을 하며 겪게 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스스로의 궁상맞은 감수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욕하고 도망가고 화내고 다시 반성하는 이 길죽한 이야기의 흐름은 매끈하게 정돈되어 있다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크게 자극적이거나, 엄청나게 웃기거나 그런 것도 없죠. 하지만 여기서 보여지는 미학이 거친 리얼리즘의 미덕을 고수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서울이라는 차가운 도시 속에서 꿈과 생계라는 두 길을 고수하는 고난한 삶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로서 말이죠.

먹과 펜만을 사용하는 작가의 두텁고 울퉁불퉁한 선이 만들어내는 사연 많은 세상과 인물들은 마츠모토 타이요와 로버트 크럼을 연상케 하며 그래서 그들의 만화에서처럼 그래피티적 감각과 미묘한 리얼리티를 동시에 뿜어냅니다. 이 만화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위태롭지만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은 마련되어 있는, 살아가기엔 벅차지만 자살할 생각은 없기에 빈궁하면서도 절절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살아날 구멍'이란 것이 때로는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추레하게 만들기도 하는지요. '살아날 구멍'은 때론 현실의 인자함이 아니라 강요된 잔인한 선택일 때가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서울이란 비대한 도시 구석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화가-기술자-예술가라는 얄팍한 자존심과 꿈을 안은 채, 굶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생계 지탱에의 본능을 가진 하층민-지은이의 근심은 냉소적인 독백과 관찰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냉랭하게 보이는 풍자 속에서 역설적으로 이 이야기의 온기, 차가운 서울시 바닥에 자리한 삶에의 추구와 콘크리트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가 제 모습을 슬그머니 내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만화에 애착이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저도 지난 겨울에 노가다판을 전전했던 기억이 나서-_- 아무튼 그 바닥으로 내려가면 별의 별 사람들 다 있습니다. 추위와 시멘트 가루로 부르튼 찢어진 장갑을 낀 손으로 석고판을 들고 평당 수백만원 짜리 바닥에 깔린 최고급 대리석 타일을 밟고 걸어가서 방음벽을 세워야 하는 곳. 그 간극을 어느 정도로 가늠하느냐 만큼이 바로 세상을 얼마나 능글맞게 살아갈 수 있느냐의 기준이겠지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12-07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추천하고 퍼갈게요.
좀 널리 읽혀지면 좋겠네요.^^

hallonin 2005-12-0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흘 추천 감사.
 

04.01.17 23:05  
 
 
아침, 진눈개비가 질척질척 땅바닥을 흙탕으로 만들어놓고 있는 걸 확인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천스러운' 것이 아닐런지. 지난 번과는 달리 저녁께 즈음의 인천을 확인하기로 결심한 나는 진눈개비가 인천에 도착할 때 때까지 계속 내려주기를 기대하면서 가면서 들을 시디와 책들을 정리했다.
1호선을 타는 행위는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길창덕의 [꺼벙이]에서 도시락 때문에 내려야 할 역에서 못 내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꺼벙이가 생각나게 해준다. 무의식중에 떠오른 그 이야기는 근본적으론 경제 이데올로기였던 19세기 좌파, 우파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있었던 격렬한 갈림의 소용돌이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처음으로 전사에 등장했던 전격전의 개념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 같아 길창덕 선생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줬던 인상 깊은 에피소드였다. 참고로 전격전의 개념은 영국에서 먼저 개발되었지만 그 유용성을 인정해 준 것은 독일이었다.
128메가 램을 사기 위해서 잠시 백운역에서 머물러야 했다. 백운!(白雲) 참으로 참으로 인천스러운 이름이지 않은가. 나는 그 이름이 주는 촌스러움과 시류에 뒷걸음질하는 반시대성에 전율하면서 내가 어느새 인천이라고 하는 거대한 자장권에 들어와 있음을 뼈저리게 체감해야했다. 게다가 램을 팔러 나온 사람조차 어찌 그리.... 인천스러웠는지.
인천역에 도착한 것은 5시가 다 되어서였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여차저차해서 가지 못 한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가서 어렸을 때 자주 먹었던 월병을 먹었다. 4개에 3000원. 앙금과 건과류가 월병 특유의 밀도 높은 밀가루와 섞여서 입 안을 메우는 느낌은 참으로.... 별로였다. 다 자라고 난 뒤엔 입맛도 바뀌는 듯 월병은 더이상 내 입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가게에서 강정과 흡사한 튀김 과자를 한 뭉텅이 샀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 위해서 가장 싸게 가격이 책정된 음식점을 찾아 헤맸다.
차이나타운은 인천에서 가장 인천스럽지 않은 동네였다. 그곳엔 중국인은 별로 보이지도 않았고 한국인 또한 별로 보이지 않았다. 붉은색으로 곱게 포장된 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독특한 거부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짬뽕을 먹었고 가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 들어있었던 그 음식은 또, 가격에 비해서 고추 기름을 너무 많이 쓴 듯 했다. 중국 본토의 짬뽕은 해물과 면을 기름에 넣고 볶은 것이라 들었는데.... 중국 가요가 흘러나오고 종업원들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곳은 중국이 아니었다. 그곳은 인천이고 차이나타운이었다. 하지만 서비스로 나온 헤이즐넛 커피의 맛은 좋았다.
땅은 과연 내 기대대로 눈이 막 녹기 시작한 탓에 끈적거리고 질척였다. 나는 월미도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 걸어가는데는 40분 정도 걸렸다. 가는 동안 산업화 시대의 유산인 커다란 공장들, 하나 같이 번호판이 붙어 있지 않은 대규모의 자동차 군단, 나른한 기운이 감도는 겨울밤의 부둣가,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은 외국 선박들, 진짜 개들, 지하를 지배하는 축축한 세균의 왕, 어둠 속의 누런 암살자, 카섹스 커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월미도는 요란스러웠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놀이 기구들과 호객 행위 금지 팻말 아래서 당당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식당들, 인천의 기운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당황하는 소년소녀들, 바이브레이션 건슈팅 게임의 고전인 터미네이터2(1992년작이다. 무지하게 난이도가 높다.)를 볼 수 있었던 오락실, 텅 빈 거리와 하늘처럼 새까만 바닷가, 나를 따라다니던 할아버지.... 인천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비슷한 풍경을 오이도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곳엔 낚시꾼들이 있었다. 강태공.... 부러진 낚시 바늘로 세월을 낚고 있던 중국의 거물.... 그 망할 할아범은 분명 법가의 후손이었겠지?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아나키즘의 역사임이 다행스러웠다.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물을 객체화시키는 작업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지는 태도에선 분명 아나키즘에 대한 매혹을 읽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서를 기록함에 있어서의 최소한의 매혹이다. 애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돌아오는 길엔 동인천의 골목들을 누비고 다녔다. 가는 골목마다 세숫대야 냉면집들이 가득했다. 세상에, 갈갈이 박준형이 사진에 찍혀서 냉면집을 홍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냉면의 명인이라는 사람이 있는 식당도 있었다. 가격도 쌌다. 3500원. 겨울이라서 그런 걸까? 난 서울 중구에 있는 냉면집이 생각났다. 그 집은 회냉면이 기가 막히지. 정신을 차려보니 난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과연, 인천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저명한 인천매니아인 김 모씨의 말에 따르면 인천에는 전라도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한나라당 서상덕이가 국회의원을 맡고 있는 거지?(서상목인가? 강삼덕인가? 최병팔인가? 너의 이름은 어디에 있나.) 나는 이내 내 생각이 민중의 의식을 무시하는 우익 아나키즘의 전형적인 사고관이란 걸 깨닫고 자아비판을 했다. 또한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나자신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소규모 내셔널리즘의 전형적인 먹잇감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젠장, 그래도 민중은 바보야. 난 어쩔 수 없이 우익이었다.

---------

인천이란 도시를 발견하게 된 것은, [고양이를 부탁해] 덕분이었다. 모두가 감탄했던 것처럼, 그 영화는 오래되고 내내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풍화작용에 의해 점점 사그라드는 인천의 풍광들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파이란]을 보면서 묵혀뒀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난 인천이 좋다. 그 오래되고 삭막하며 쓸쓸하게 삭혀져 가는 풍경들이 좋다. 가끔씩 그것은 비정하고 잔인하게도 비춰진다. 하지만 그보다는, 단단했지만 이제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차차 부서져가는 완고한 껍질 속에 들어있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기에 궁상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5-12-06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사람 마음에도 마르고 찬 바람이 불게 만드는 글이어요. 너무 좋았다는 뜻이어요.

sudan 2005-12-0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hallonin 2005-12-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또 한 번 가봐야 하는디....
 

소녀의 껌




갯벌에서 주운 적이 있는
조개껍질 같은 가슴으로 재봉틀 앞에 앉은 소녀
땀에 젖네
출렁이는 파도를 연주하였으므로 미역줄기처럼 가슴이 축축하네

그 연주의 볼륨을 높이고 싶은 나른한 오후
질겅질겅 씹던 껌의 반죽이 잘되어 통통한 자지가 되었네
소녀의 입에서 말처럼 욕이 쉽게 튀어나오는 건
그 자지를 너무 세게 물었기 때문에....그렇다네

이제 박아줄까,
둘둘 말린 붉은 천이 풀리고 그 바닷가 모래 알갱이들이 쏟아지네
붉은 천으로 만든 옷의 안주머니는
탁탁 털어서 입을 것
주머니엔 못된 아이의 선인장이 자라고 있을 줄.....몰라


연주의 중간 중간에 파도의 화음이 들리고, 전화를 받으러 소녀가 뛰어나가고

일터를 자주 옮기는 똥파리 분대, 밥알을 남기고
찢어진 빵봉지를 지나서
언 생수통마냥 묵묵히 있던 소녀의 등에 보청기처럼 콩 달라붙네

소녀의 땀냄새, 분냄새,
고향 바닷가냄새가 나는 좋아.....파리는, 지겹게 달라붙네

너처럼 이쁘고 멋진 연주자를 본 적이 없구나
흰 목덜미를 한번 잡아보고 싶은 늙은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와서
긴 악보를 놓고가네

슬픔은 슬픔으로 기워야 하는 이 연주의 곡명이 뭐지,
악보를 보기 위해 소녀가 연주를 멈췄을 때
파리는 이제 보청기를 뽑고, 창밖으로 멀리 날아가고

입속의 껌은 더이상 발기하지 않았다네, 이 자지를 어디에 뱉을까





(알쏭달쏭)-(소녀)-(백과사전). 노란색 직사각형 몇 개가 겹쳐져 있을 뿐, 따로 장식이 없는 창비시선집의 단조로운 표지디자인은 역설적으로 이기인의 첫 시집에 붙여진 이 묘하게 복잡다단한 제목이 만들어내는 아우라를 증폭시킵니다. 다르게 보자면 이 제목은 무척이나 팝적입니다. 이 제목에선 저렇게 분절된 단위로 의미적 해독을 치러낸다 해도 그런 해독의 결과물까지 포함시켜버릴 수 있는 달콤함이 느껴집니다. 흡사 시부야케 프렌치팝 계열의 노래 제목처럼, 여기선 달콤함과 함께, 색다름, 몽환적 발랄함, 적절한 우울함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양산형 보사노바의 리듬과도 같은 감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상,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는 발랄일탈스러울지도 모를 감각에 대한 기대감이 이 시집을 선택하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시집은 그 첫 시작에서부터 나에게 즐거운 배신감을 안겨줬습니다. 제목이 독자에게 전해주는 자장, 뻔한 표현으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익숙한 감각은 역설적으로 작품들 안에선 말끔하게 거세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인용이나 패러디, 문자놀음, 아니면 엽기를 목적으로 하는 일탈적인 감각의 묘사들엔 관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알쏭달쏭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시어들은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게, 그러나 단단하게 문장들을 짜 나갑니다. 재밌는 건 그 완결된 문장이 보여주는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알쏭달쏭 소녀 백과사전>의 흐름은 흡사 달아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개개가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세심하게 고려된 단단한 문장들이지만 문장이 가는 길은 분명하게 보일 듯 하면서도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구조하는 흐름은 뭉쳐지지 않는 심상의 분해를 추구하며 그런 구조적 바탕 위에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과 성적인 도발들이 느슨하고 평온한 풍경을 그려내는 달콤한 은유적 시어들과 섞입니다. 그래서 시 속에서 소녀는 쇳가루를 씹어야 하고 제비는 흰 농약과 같은 문장에 놓이게 됩니다. 신기한 건 이 혼돈이 난삽해 보이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시가 담고 있는 잔인한 진실들에 대한 아련한 시선 탓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알쏭달쏭한 소녀들의 이야기는 현실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시는 ㅎ방직공장의 소녀들과 죄수, 혹은 무력한 화자 나의 독백을 통해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가혹한 현실을 음울하지만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이 노래들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프렌치팝의 달콤함 따윈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직 야만스러운 현실이 혼돈이라는 탈을 쓰고선 능청스러운 은유를 빌어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독자를 그토록 현혹시키는 제목은 속임수, 혹은 일종의 아우라입니다. 이 시집은 그렇게, 잔인한 현실에 대한 밀도 높은 반추로서의 독 섞인 꿀과도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설에서 인용된 전략적으로 글쓰기라는 작가의 말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80년대 중반에서부터 90년대 초반에까지 이어졌던 수많은 시실험들과 그와 동반하여 현실, 대중과 유리되어 가는 시들에 대해 가해졌던 수많은 비판들. 이기인의 시가 기대되는 건 그가 그런 일련의 문제들을 요령있게 아우르는 동시에 현학과 자기애적 함정들을 능숙하게(혹은 뻔뻔스럽게?)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쾌하고 섬세하며 도발적이면서도 신중한 이 알쏭달쏭한 시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은 우리 시의 미래가 가질 가능성의 한 축을 가늠하게끔 만듭니다. 그것이 이 달콤쌉싸름한 유희가 그저 치기나 과잉스러운 에고이즘의 산물로 보이지만은 않는 까닭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12-05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12-0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드는 그림이나 사진을 찾으면요-_-

sudan 2005-12-06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구리는 마음에 들어요?

hallonin 2005-12-0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데-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