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톨이 되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은 정말로 필요한 일 아니면 밖에서 체제하는 시간이 거의 없군요...-_- 사람들 안 만난지도 꽤 됐고. 그래도 아직 대인기피증까지는 안 된 걸 보면, 좀 더 수련을 쌓아야 할는지도. 순전히 집에 틀어박히게 된 이유가 추워서...인데. 단지 그것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버티게 만드는 근성을 부여하다니...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체 왜 이런 근성을 부리고 있는 거지...-_-

 



그리고! 현시연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 7권은 한 2월달쯤에 발매될 거 같더군요. 한정판 얘기도 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리 가망은 없어보입니다. 일단 기다리는 거고....

더불어 노리고 있는 게 이거 14권.... 역시나 배송료 때문에-_- 현시연과 함께 몰아서 구입할 예정.... 이렇게 말하면 마치 요즘 로또라도 당첨됐냐고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립금입니다-_-

그러나 이 모든 게 2월 뒤로 훌쩍 늦춰질 가능성이 바로! 이 작품 때문에 생겨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선 [핑퐁]에 이어 두번째로 정발되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인 [하나오]는 제본 퀄리티나 번역으로나 따지면 손꼽히는 회사인 애니북스로 출간이 되는지라, 국내에 있는 마츠모토 타이요팬들을 한껏 기대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전 3권인지라 2월 내에 완간이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완간이 되는 날로 즉시 전권 구매 대기중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6-01-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오는 야구하는 父子 이야기인가요? 예전에 해적판으로 나왔던. 그거 보다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웃기는 제목으로 번역됐는데...

hallonin 2006-01-16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거 맞을 겁니다.
 



데드 캔 댄스의 음악은 종종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레고리안, 고딕, 켈틱, 아라비안, 에스닉의 거의 모든 요소들을 흡수하여 싸이키델릭적 방법론으로 빚어낸 그들의 음악은 악몽과 환희,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그 어느 지점에 모호하게 위치해 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 짐 모리슨 같은 브랜단 페리나 제령을 펼치는 듯한 리사 제라드의 귀기 서린 목소리들은 청자로 하여금 그들이 만들어낸 꿈속으로 들어오길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 경계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것은, 그들이 구조한 그 어둡고 내밀한 세계가 지금껏 들어왔던 그 어느 것보다도 화려하고 다채롭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른 연옥의 한복판, 어슴푸레한 새벽 안개 속에서의 침묵. 느릿하게 떨어져내리는 차가운 빗방울의 한 순간. 혹은, 광막한 사막 한복판에서 열망하게 되는 고독에의 자유. 검푸르고 뜨거우며 활활 타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굳게 정제된 순간들. 그럴 때면 가만히, 대기에 귀 기울여 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샤미센

일본의 발현악기(撥絃樂器).
 

산겐[三弦]이라고도 한다. 4개의 판자를 합친 통[胴]에다 긴 지판(指板)을 달고 그 위에 비단실로 꼰 세 줄의 현을 친 것으로, 동피(胴皮)로는 고양이나 개의 가죽이 쓰인다. 연주 방법은 통의 오른쪽 테를 오른쪽 무릎에 얹고, 지판을 왼손으로 받치면서 손끝으로 현을 누르며 오른손의 발목(撥木)으로 켠다.

조루리[淨瑠璃]·가부키[歌舞伎]를 비롯한 일본 고전예능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쓰인다. 중국의 삼현(三弦)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16세기에 오키나와[沖繩]를 경유하여 전해진 후 개량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일본은 아시아 내의 나라들에게 있어서 역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위치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그것은 일본의 역사가 아시아라는 지리적인 위치를 끊임없이 벗어나려 시도해왔고 그로 인해 아시아 내에 위치한 아시아의 전반적인 침략국이라는 사실과 서구에는 가장 익숙하게 전파된 범아시아적 문화컨텐츠라는 외피를 동시에 가지게 됐다는 점에서 역으로 아시아에 전파된 서구문물의 중개자이자 필터로서의 중간자적 입장, 혼혈적인 문화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아시아내 국가들의 시선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이 외부문물에의 수용을 용이케 한 동시에 그에 대한 반작용이 전통문화에 대한 강박적 수호로 드러나는 일본문화의 일련의 경향은 특히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급격한 산업화와 미국의 아시아 병참기지로서의 역할과 함께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여 그 독특한 모순의 균열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소위 쇼윈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지형의 대표적인 지표로 자리잡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섞여있으되 분리되어 있고 추상적인 것을 복제하려하면서도 그 가운데에서의 미학을 찾아내려 하는 듯한, 독특한 부유감.

샤미센은 가부키에서부터 게이샤, 만담극에서의 보조악기로의 쓰임으로부터 독주연주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통문화의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보편적인 전통악기입니다. 3현으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음색은 일본 전통음악, 하면 딱하고 떠오르게 만드는 강한 인상을 만들어내죠. 그러나 샤미센의 분명한 색깔과 일본외 국가에서의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본 내에서는 썩 보편적인 악기는 아니었습니다. 딱 우리나라의 해금과 같은 전통악기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인식을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요시다 형제는 그 듣는 사람만 듣는 샤미센 음악을 대중적인 음악으로 만들어놓는데 성공한 이들입니다. 1999년에 앨범 [ibuki]로 데뷔한 이들은 그 해에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샤미센 음악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샤미센만 20년을 다뤄왔다는 이들은 이후에도 꾸준한 앨범 작업과 공연으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에 내한공연을 가졌었죠.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샤미센 자체만으로, 샤미센 고유의 음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추구하는 음악을 보여줬었습니다. 그 이후엔 차차 크로스오버적인 경향이 강해져서 여러 다른 악기들과의 적극적인 조합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내려 했고, 우리나라에 정발된 [Renaissance] 앨범은 그런 크로스오버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들의 초기 음악은 샤미센 자체에 몰두하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에 처음 듣는 이에겐 거부감을 줄지도 모르는 터라, 다소 대중화되고 쉬운 편인 [Renaissance]앨범부터가 발매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샤미센만으로 이뤄지던 이들의 초기 음악들이 더 좋긴 하지만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6-01-1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한번 샤미센 연주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음색이 강한 느낌이었는데.

hallonin 2006-01-1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라이브로는 만담공연 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텅 빈 홀을 튕기듯이 울려나가는 샤미센의 음색이 무척 매력적이었죠.

blowup 2006-01-1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만담 공연 때라...

hallonin 2006-01-1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심장하죠-_-
 



내 주변엔 유난히 시모의 [릴라는 말한다]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그 느낌을, 인상을, 혹은 시모에게, 릴라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이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이 책의 매력은 야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아니, 이젠 그것마저도 희석되어버렸으니-_- 민음사에서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나를 끌어당긴 것은 유혹적으로 탄탄한 감촉을 전해줬던 붉은 장정과, 그 무엇보다도 소설이 보여주는 성묘사의 충격적인 대담함 어쩌구 노선을 달리는 출판사의 홍보문구 덕이었다.

그러나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릴라는 말한다]는 별로 야하지가 않다. 금발소녀에 대한 긴 감탄사를 페티시즘적 매혹으로 풀어놓고 있는 이 책은 남성화자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눈부신 우윳빛 피부를 가진 릴라의 모습을 상상해내기에 충분할 정도의 집중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뿐이다.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서, 페미니스트와 급진적인 성적 리버럴리스트들을 분노케 만든 작가의 기호를 넘어서, 고백하건데 나로선 이 소설 자체가 재미가 없었다. 이 책은 마치 릴라 그 자체와도 같다. 릴라의 목소리와 릴라에 대한 감상을 통해 만들어놓는 모호한 묘사들 속에서 소설은 독자를 유혹하듯 끌어당기면서도 제 속은 보여주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도발적인 시선을 견지할 것처럼 굴다가도 이내 그런 게 어딨냐면서 발뺌한다. 물론 그것은 기술적으로 흥미있는 흐름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그만한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가독성을 뿜어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바라보는 페티시즘의 여왕 릴라의 모습만큼은 그 시선 덕에 나에게도 제법 단단히 각인이 되어 있었다. 매혹이란 단어를 하나 쓰면, 그 이후에 독자들은 자신들의 매혹을 정당화해야 할 사고회로를 작동하기 시작하기 마련이라. 더군다나 난 금발도 좋아한다-_-

영화를 봤다. 시모는 프랑스 빈민가의 아랍계 소년이었고 릴라는 예의 그 금발의 우윳빛 피부를 가진 소녀였다. 작가가 바라보는 릴라에 대한 인상 그 자체였던 [릴라는 말한다]를 영화로 옮기는 건 어쩔 수 없이 원본의 아우라를 깨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결말이 바뀜으로 인해서 보다 온건한 로맨스물로 환골탈태한 영화는 어딘가 느슨해보인다. 배우들의 연기에서부터 빈민가의 풍광들에까지, 어디에도 치명적인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긴, 온전히 환상의 저자가 쓴 꿈나라 이야기에 가까웠던 원작을 생각해볼 때, 그의 컨버전인 영화에서 현실적인 살풍경과 쓴맛 나는 리얼리즘을 기대하기란 힘든 것이리라. 그것은 어느 정도, 붕 뜬 듯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감독은 그 현실성과 환상성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견지하는 통에 영화를 마치 책상 위에서만 세상을 바라본 이가 쉬이 드러낼 법한 경치로 만들어놓는다. 그래, 마치 그토록 모호한 존재인 릴라처럼 말이다. 약간 더 잔인해진 동화처럼, 여기선 자학과 피폐한 가난, 욕구와 현실이란 요소들이 그저 두리뭉실하게 떠다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뭐 어떻든,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책에서나 영화에서나 우리의 릴라 아니겠는가. 바히나 지오칸테는 매혹이란 단어와 동의어인 릴라를 연기함에 있어서 원작에서 상상했을 법한 번뜩거리면서도 지독한 유혹이 담긴 눈길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여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남자들에 대한 반면교사적인 가혹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유혹과 매정함을 동시에 함유하는, 그래서 숫컷들을 끊임없이 곤혹스럽게 만드는 릴라를 소화하는데 충분한 젊음과 이기를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시대에 와서 아버지란 존재는 존경과 감동의 의미로서보다는 부숴진 신화의 파편 같은 이미지로 더 쉽게 다가온다. 그것은 인류가 시작되면서 그 근원부터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수천 년에 걸친 꾸준한 작업 끝에 우리는 신문 사회면을 통해 망가진 아버지, 죽는 아버지, 파괴되어 가거나 파괴하는 아버지의 형상들을 아침 식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가진 제목 '아버지'는 그 단순명료하고 치장이 없는 인상으로 하나의 단호한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 그 이야기는 더없이 담담하고 스무스하게, 지나쳐버린 아이콘에 대한 회고의 감정을 풀어놓는다.

주인공인 요이치는 어느 날 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은 이미 내려가본지 15년이 지난 곳. 아버지와의 서먹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요이치는 내키지 않지만 장주로서의 도리를 해야 하니 결국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외삼촌과 누나를 보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진실,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서 하나씩 알게 된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파인 골의 진실이 밝혀지는 때가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이 설정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일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는 일일 것이다. 망가진 신화의 시대에 끊임없이 마모되어가는 아버지란 우상의 파편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은, 그가 사라졌을 때 느끼게 되는 법이다. 효의 덕목이라든지 있을 때 잘 하라든지 하는, 그런 오래된 이야기들을 꺼내려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가지고, 같은 집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지금 시대에 정작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완전하게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돌이 호수에 던져졌을 때 그 파장이 얼마나 될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 파장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생각외로 흔들리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런 현대에서의 가족이라는 관계를 바라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대한 관찰, 그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지점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아버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슨 엄한 경험의 소유자나 그런 정신상태를 가진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하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부자간의 많은 오해를 만들어낸 사건들이 자리한 소년시절의 요이치는 일탈로 인해 단단히 삐뚤어져 가는 소년하곤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다른 일을 찾아나서는 능숙하고 평범한 체제순응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그의 인생에선 요즘 쏟아져 나오는 사회비판물 만화들에 비춰보면 별 대단하다고 할 법 한 사건도 없다. 다만 한가지, 부모의 이혼 때문에 그의 마음 속을 침범해 들어왔던 것은 잔잔한 공허감이고 그것이 그와 아버지의 골을 슬금슬금 확장시키고 결국은 그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는 주인공이 잊으려 했던 고향 그 자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다. 그것은 고향을 잃거나 잃으려 했던 이들이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 했던 자신의 궁색한 치부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다만 주인공은, 현대 사회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고향을 치기어리게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점점 속도전으로 변해가는 각박한 세상에 대한 우화인지, 아버지란 존재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편협한 자식의 못난 사고에 대한 오래된 잠언의 증명인지는 각자 생각해 볼 일이겠지만.

아버지의 장례식,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일본적인 리얼리티를 진하게 갖춘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으로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다. 버블 붕괴후 불황의 한복판이었던 1994년에 빅 코믹 스피리츠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오직 작품성 자체만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연재됐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IMF 시절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가 대박을 쳤던 것과 비슷한 사회적, 구조적 기능의 산물이란 것을 유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라면 소설 [아버지]가 그의 고통스러운 죽음에까지 이르는 상당한 신파의 도정이었던 반면 이 만화는 그런 신파조가 배제된 담담한 시선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아들은 그를 느지막히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가 그제껏 피해왔던 것을 직시하고, 거부하려던 것을 흡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얕은 후회와 부서뜨린 불안의 조각들을 안고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