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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시대에 와서 아버지란 존재는 존경과 감동의 의미로서보다는 부숴진 신화의 파편 같은 이미지로 더 쉽게 다가온다. 그것은 인류가 시작되면서 그 근원부터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수천 년에 걸친 꾸준한 작업 끝에 우리는 신문 사회면을 통해 망가진 아버지, 죽는 아버지, 파괴되어 가거나 파괴하는 아버지의 형상들을 아침 식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가진 제목 '아버지'는 그 단순명료하고 치장이 없는 인상으로 하나의 단호한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 그 이야기는 더없이 담담하고 스무스하게, 지나쳐버린 아이콘에 대한 회고의 감정을 풀어놓는다.
주인공인 요이치는 어느 날 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은 이미 내려가본지 15년이 지난 곳. 아버지와의 서먹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요이치는 내키지 않지만 장주로서의 도리를 해야 하니 결국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외삼촌과 누나를 보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진실,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서 하나씩 알게 된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파인 골의 진실이 밝혀지는 때가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이 설정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일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는 일일 것이다. 망가진 신화의 시대에 끊임없이 마모되어가는 아버지란 우상의 파편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은, 그가 사라졌을 때 느끼게 되는 법이다. 효의 덕목이라든지 있을 때 잘 하라든지 하는, 그런 오래된 이야기들을 꺼내려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가지고, 같은 집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지금 시대에 정작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완전하게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돌이 호수에 던져졌을 때 그 파장이 얼마나 될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 파장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생각외로 흔들리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런 현대에서의 가족이라는 관계를 바라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대한 관찰, 그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지점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아버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슨 엄한 경험의 소유자나 그런 정신상태를 가진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하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부자간의 많은 오해를 만들어낸 사건들이 자리한 소년시절의 요이치는 일탈로 인해 단단히 삐뚤어져 가는 소년하곤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다른 일을 찾아나서는 능숙하고 평범한 체제순응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그의 인생에선 요즘 쏟아져 나오는 사회비판물 만화들에 비춰보면 별 대단하다고 할 법 한 사건도 없다. 다만 한가지, 부모의 이혼 때문에 그의 마음 속을 침범해 들어왔던 것은 잔잔한 공허감이고 그것이 그와 아버지의 골을 슬금슬금 확장시키고 결국은 그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는 주인공이 잊으려 했던 고향 그 자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다. 그것은 고향을 잃거나 잃으려 했던 이들이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 했던 자신의 궁색한 치부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다만 주인공은, 현대 사회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고향을 치기어리게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점점 속도전으로 변해가는 각박한 세상에 대한 우화인지, 아버지란 존재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편협한 자식의 못난 사고에 대한 오래된 잠언의 증명인지는 각자 생각해 볼 일이겠지만.
아버지의 장례식,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일본적인 리얼리티를 진하게 갖춘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으로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다. 버블 붕괴후 불황의 한복판이었던 1994년에 빅 코믹 스피리츠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오직 작품성 자체만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연재됐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IMF 시절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가 대박을 쳤던 것과 비슷한 사회적, 구조적 기능의 산물이란 것을 유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라면 소설 [아버지]가 그의 고통스러운 죽음에까지 이르는 상당한 신파의 도정이었던 반면 이 만화는 그런 신파조가 배제된 담담한 시선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아들은 그를 느지막히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가 그제껏 피해왔던 것을 직시하고, 거부하려던 것을 흡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얕은 후회와 부서뜨린 불안의 조각들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