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주변엔 유난히 시모의 [릴라는 말한다]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그 느낌을, 인상을, 혹은 시모에게, 릴라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이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이 책의 매력은 야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아니, 이젠 그것마저도 희석되어버렸으니-_- 민음사에서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나를 끌어당긴 것은 유혹적으로 탄탄한 감촉을 전해줬던 붉은 장정과, 그 무엇보다도 소설이 보여주는 성묘사의 충격적인 대담함 어쩌구 노선을 달리는 출판사의 홍보문구 덕이었다.
그러나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릴라는 말한다]는 별로 야하지가 않다. 금발소녀에 대한 긴 감탄사를 페티시즘적 매혹으로 풀어놓고 있는 이 책은 남성화자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눈부신 우윳빛 피부를 가진 릴라의 모습을 상상해내기에 충분할 정도의 집중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뿐이다.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서, 페미니스트와 급진적인 성적 리버럴리스트들을 분노케 만든 작가의 기호를 넘어서, 고백하건데 나로선 이 소설 자체가 재미가 없었다. 이 책은 마치 릴라 그 자체와도 같다. 릴라의 목소리와 릴라에 대한 감상을 통해 만들어놓는 모호한 묘사들 속에서 소설은 독자를 유혹하듯 끌어당기면서도 제 속은 보여주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도발적인 시선을 견지할 것처럼 굴다가도 이내 그런 게 어딨냐면서 발뺌한다. 물론 그것은 기술적으로 흥미있는 흐름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그만한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가독성을 뿜어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바라보는 페티시즘의 여왕 릴라의 모습만큼은 그 시선 덕에 나에게도 제법 단단히 각인이 되어 있었다. 매혹이란 단어를 하나 쓰면, 그 이후에 독자들은 자신들의 매혹을 정당화해야 할 사고회로를 작동하기 시작하기 마련이라. 더군다나 난 금발도 좋아한다-_-

영화를 봤다. 시모는 프랑스 빈민가의 아랍계 소년이었고 릴라는 예의 그 금발의 우윳빛 피부를 가진 소녀였다. 작가가 바라보는 릴라에 대한 인상 그 자체였던 [릴라는 말한다]를 영화로 옮기는 건 어쩔 수 없이 원본의 아우라를 깨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결말이 바뀜으로 인해서 보다 온건한 로맨스물로 환골탈태한 영화는 어딘가 느슨해보인다. 배우들의 연기에서부터 빈민가의 풍광들에까지, 어디에도 치명적인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긴, 온전히 환상의 저자가 쓴 꿈나라 이야기에 가까웠던 원작을 생각해볼 때, 그의 컨버전인 영화에서 현실적인 살풍경과 쓴맛 나는 리얼리즘을 기대하기란 힘든 것이리라. 그것은 어느 정도, 붕 뜬 듯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감독은 그 현실성과 환상성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견지하는 통에 영화를 마치 책상 위에서만 세상을 바라본 이가 쉬이 드러낼 법한 경치로 만들어놓는다. 그래, 마치 그토록 모호한 존재인 릴라처럼 말이다. 약간 더 잔인해진 동화처럼, 여기선 자학과 피폐한 가난, 욕구와 현실이란 요소들이 그저 두리뭉실하게 떠다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뭐 어떻든,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책에서나 영화에서나 우리의 릴라 아니겠는가. 바히나 지오칸테는 매혹이란 단어와 동의어인 릴라를 연기함에 있어서 원작에서 상상했을 법한 번뜩거리면서도 지독한 유혹이 담긴 눈길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여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남자들에 대한 반면교사적인 가혹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유혹과 매정함을 동시에 함유하는, 그래서 숫컷들을 끊임없이 곤혹스럽게 만드는 릴라를 소화하는데 충분한 젊음과 이기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