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10주년 기념 일본의 미디어 예술 100선

일본의 문화청에서 지난 2006년 7월 13일에서 8월 31일까지 50일 동안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1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 게임 등의 엔터테인먼트, 애니, 만화 등 각 부문의 작품들 100선을 앙케이트 조사하여 집계한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만화 부문은 애니메이션에 이어 78980표가 집계됐군요.



1위는 의외랄 수도 있고 납득이 가기도 하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 [슬램덩크]가 타게 됐습니다. 그에 이은 2위는 거의 국민 소년만화라고도 할 수 있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 3위는 어라, 이게 3위네.... 할 정도의 네임밸류를 갖춘 말이 필요 없는 만화 [드래곤볼]이 차지했습니다.

[드래곤볼]의 막강한 실적이나 대외영향력을 뒤엎고 [슬램덩크]가 1위 자리를 꿰찬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번 순위가 보여주는 현재적 지향을 알려주는 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외에 이어질 순위를 봐서도, 이번 순위는 골수 전문가 지향이나 객관적이면서도 거시적 시야로 나온 결과가 아닌, 대중적 영향력의 정도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테고 그것이 현재라는 시의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렇다고 뭐 [슬램덩크]가 1위를 차지했다는 게 불만이라는 건 아니고.... 에에이, 말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여기 드나드는 분들 중 [슬램덩크]를 안 본 분이 몇이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강백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이 결과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 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래곤볼]이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라는 '낯선' 만화에게 밀렸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지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 지옥 같은 소년 점프에서 20년 넘게 연재가 되고 있는 괴물만화이기도 합니다. 현재도 7부가 연재되고 있으며 1부의 극장판 애니화 계획과 게임화가 결정되면서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마라톤맨]이라는, 작품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묘한 제목의 해적판으로 나왔었습니다만 현재 그것마저도 희귀상태고, 너무 분량이 많아서 어디서 정발해 줄 가능성은 없을 거 같으니 내용이 궁금하면 일본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28위까지의 순위를 보면 상당수가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연재가 진행중인 작품들이며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작품들이 잔뜩 있다는 점에서, 이 순위의 현재성을 다시금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데츠카 오사무의 작품인 [불새]가 무려 6위, [블랙잭]이 7위라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불새]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방대한 이야기 구조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신화적 세계관,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세계를 총합하는 작품으로 명실공히 걸작의 칭호를 받고 있으며 현재 절판 상태로 우리나라 중고 사냥꾼들의 표적 1순위이기도 합니다.

 

 

팬덤의 열광적인 열기는 좀 식기도 했고, 이제 아라카와 히로무 자신의 신작도 병행하여 연재 개시되기도 하고, 시작은 너무 전형적인데다 밋밋해서 저로선 거의 억지로 보는 수준이었던 [강철의 연금술사]가 4위를 떡하니 차지한 것은 팬덤의 현재적 힘과 만화 자체의 퀄리티가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이젠 패턴이 눈에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강철의 연금술사]는 권마다 즐거운 경험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의외이자 순위의 현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충사]의 9위 선점. 오토모 가츠히로의 실사영화, 극장판 제작 등등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아키라], [몬스터], [유유백서] 등의 작품들을 누르고 이 정도의 저력을 보여줄 줄은 몰랐습니다. 의외로 상당히 인기가 있는 거였군요 이 작품....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순위의 극단적인 현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헬싱]의 22위 차지라고나 할까요.... 어째서! 왜! 마침 어제 8권을 봤습니다만, 이 겉멋만 잔뜩 든 만화의 성공은 작가나 소비독자 사이에 공명하는 사춘기적 감수성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굳게 만들어주더군요.... [바나나피쉬]의 26위 차지와 더불어 당최 이해가 안되는 결과입니다만, 신의 손은 인간의 개인적 감수성 따윈 쉽게 무시해버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1년 반이 넘어서야 거의 이야기가 진행이 안된 단행본 한 권을 달랑 내놓으면서도 굶지 않고 살아가는 작가 히라노 코우타의 재정능력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페이트] 동인지로 먹고 사나-_-

 

24위에 오른 히구치 아사의 [크게 휘두르며].... 야구에서의 배터리 간에 벌어지는 끈적한 아가페 러브를 그린 이 작품은 홍조를 너무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좀 의외. 아니, 이게 그렇게 인기가 좋았어? 문득 [애프터눈]에 연재된 작품들이 묘하게 강세를 띄는 순위라는 걸 느끼게 만드는군요.

 

 

 

후지TV의 사활을 건 드라마로 제작되는 [노다메 칸타빌레]가 14위를 차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순정만화가 기근인 순위에서 순정만화라는 타이틀을 달고선 최고 순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합니다. 2006년 7월 현재 일본내 판매부수 1100만부 기록, 가끔씩 작가 후기에서 헐렁한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던 작가의 남편 직업이 마누라 셔터맨이 아닌지 하는 의심을 더욱 굳혀주게 만들 정도로 대박을 치고 있습니다. 주연인 노다메역은 작가가 직접 이 배우가 아니면 안된다고 지명했다는.... 우에노 주리!

 

 

 


우에노 주리!

죄송합니다. 그냥 사진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라비아 비키니 사진을 올리고 싶었으나 데뷔초기의 촌스러움이 물씬 풍겨 농촌 아낙에게 억지로 비키니 채운 느낌이 드는 것보다 이게 더 예뻐서 포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하 50위까지의 순위입니다. 역시나 알아보기 쉬운 작품들만 골라서 올라와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군요.

 

다카하시 루미코의 작품으론 유일하게 [시끌별 녀석들]이 '고작' 31위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어째서! 왜! 아, 이건 노골적인 불만입니다. 역시 요즘 세대란.... 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게 [개귀신]은 아예 순위에 끼지도 못했군요....

그렇게 따지면 아다치 미츠루는 33위에 오른 [터치]가 유일하고.... 그러고보니 전반적으로 쇼가쿠간의 작품들이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군요. 순위 1~3위를 먹은 슈에이샤의 작품이 압도적. 그외에 작품성으로 납득할 법한 [기생수], [아키라] 같은 고단샤의 작품들이 듬성듬성.

아무튼 [메존일각] 재발간합시다.

 

40위에 오른 [여기는 잘 나가는 파출소]입니다. [고르고13]을 이어 최장수 연재만화로 유명하며 얼마 전에 드디어 연재 30주년을 돌파했죠. 30주년 기념작품집에는 도리야마 아키라, 아라카와 히로무, 후지시마 코스케, 오바타 다케시 등등의 걸물들이 참여해서 아예 파출소 동인지를 만들어놨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중간서부터 발간을 시작했다가 인기가 없어 중간에서 뚝 잘라먹고 발간 중단.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가상 세일즈 케이스로 받아들여도 될 결과를 가지고 있죠. 정작 일본에선 [블리치], [은혼]을 제치고 인기투표 4위를 먹기도 하는 등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인기가 없었으면 점프 편집부 성격에 가만 놔두지 않았겠죠.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이 시작된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가 달랑 단행본 3권이라는 연재분량에도 불구하고 42위에 이름을 올려놨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론 지금의 나오키 작품에서 꽤 진하게 매너리티를 느끼고 있습니다만.... 19위에 [몬스터], 29위에 [마스터키튼], 36위에 [20세기 소년]이라는, 50위 권 내에 자신의 작품 네 개를 올려놓는 저력은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의 영향력이란 걸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메이드만화의 대표로선 [엠마]가 올라와 있습니다. 과연....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한때의 트렌드에 대한 보다 진지해진 고찰이 이렇게 성과를 얻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죠.

 

 

 

 



자유기입란의 순위입니다. 리스트에는 없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작품란에서 집계해서 골라진 순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위는 바로 [허니와 클로버]! 축하합니다!

 

정작 안 봐서 모르겠지만-_- 주변에선 꽤 반응들이 좋은데 손은 안 가더군요....

 

 

2위에 오른 [아리아]도 좀 의외. 치유만화라고 하지만 별로 치유받고 싶어하지 않는 저의 썩은 감수성 때문에 아직 접하고 있지 못한 작품이긴 하나, 이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르는 거 참 많아요....

 

 

 

[메존일각] 재발간합시다. 우선 [도레미하우스]라는 저 우스꽝스런 제목부터 좀 손질하고.... 무려 5위!

 

 

 

 

그리고 마지막 10위는 [창천항로]에게 돌아갔습니다. 연재가 종료된지 얼마 안 됐다는 메리트도 작용한 걸까요. 사실 만화의 퀄리티란 면으로 보면 10위라는 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많고 많은 만화들 중 60개만 골라낸다는 점에서 이미 신의 손 리스크는 따르게 되는 거겠지요. 왕흔태라는 작가에게 있어서 36권이라는 이 길고 길었던 대장정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도 궁금해지는 바입니다. 또한 전 60개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논쟁적일 이 작품이 마지막에 끼어 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기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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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6-10-0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사>는 오다기리 죠 주연의 영화로 재작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3부 정도까지 해적판으로 본 기억이 있는데, 제게는 정말 좋았는데, 출간되지 않는다니 아쉽네요.

hallonin 2006-10-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마 [충사]는 이번 베니스영화제에 출품이 됐을 겁니다. 그리고 [죠죠]를 접하긴 접하셨군요. 저 [마라톤맨]이란 제목 말고도 그 이전에 온전하게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란 제목을 달고 500원 짜리 해적판으로 나온 적이 있었지만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저는 휙하고 넘겨버렸었죠..

날개 2006-10-02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 상당히 궁금하네요.. 20년 연재라니 그만큼 매력있다는 거겠죠?^^

배가본드 2006-10-0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 '충사' 꼭 보고싶습니다!! " 라고 도매겸 미니책방을 꾸리시는 아주머니께 울부짖었음이지만.. 절판이라던가? 다른책방이 망하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는 ㅠ

hallonin 2006-10-0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죠죠는 국내에도 꽤 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다 팬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골수팬인, 꽤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작품이기도 하죠.
요즘은 만화의 종류는 늘어났되 출판량은 딱 전국 대여점수 정도로 적어져서, 미리 사두지 않으면 나중에 가면 못 볼 만화가 많아졌더군요.
 

간만에 홍대를 갔습니다. 간만에 맥주도 두 병씩이나 마시고 사치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나쵸칩에 치즈소스까지 곁들여서 먹어봤습니다. 아울러 [현시연] 8권도 사왔습니다.

 

8권은 완연하게 오기우에와 사사하라가 벌이는 본격적인 연애질의 장이더군요. 군더더기 없이, 여러 의미에서 아주 잘 참고가 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키오 시모쿠는 연애질의 합이란 걸 잘 파악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일본판 띠지의 카피는 '오타쿠라서 사랑했다' 였는데, 핵심을 찌르는 문장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8권에서 대강 저 커플이 수습이 됐으니, 이제 남은 9권에선 드디어 마다라메와 사키의 떡씬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추가로 들어간 페이지도 만만치 않은 만큼.... 헐헐.

그러나 내년 1월에나 나온다는군요. 어이쿠.

 

그리고 일전에 넌즈시 얘기했던 [에반게리온] 10권이 드디어 깔렸습니다. 뉴타입 10월호의 특집과 연동한 것일까요? 이제 더이상 나노 바이오 회사임을 거부하는 대원씨아이의 저도의 전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전략치곤 오지게 오래도 끌었군요-_- 빵빵한 자본력의 근거를 잃어버린 대원씨아이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 바입니다.

 

한겨레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만화잡지를 만드는 얘기를 잠깐 하게 됐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안합니다. [씨네21]의 유통망이라는 것은 꽤 매력적이긴 하나 내부사정으로 인해 [씨네21] 자체도 재정상황이 썩 좋지 않았던(혹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다 한겨레 자체가 경영상의 삽질을 한 과거들이 주루룩 생각이 나서.... 일단 생활정보지 [한겨레리빙]과 여성잡지 [허스토리]의 폐간 건, 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지식검색 기능의 표류로 인한 웹주도권 상실 등등이 떠오르는군요.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만화잡지수가 점점 줄어들어가는 현 세태에 비추어 정부지원이 확실치 않으면 분명히 위태로운 게임입니다. 뭐 한겨레로서도 돌파구가 필요해서 선택한 바이겠지만, 정부에서 내건 제한조건들을 보니 썩 유들유들하진 않더군요.... 더군다나 지하철에서 사서 보고 던져버릴 수 있는 만화잡지라는 포멧은 이미 서울문화사에서 실험했고 결과는 영 신통찮았으니. 만화라는 포멧에 대한 대중 소비 측면에 자리한 거부감을 날려버릴 킬러 타이틀의 존재,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해봅니다. 이거 참, 무슨 네오라도 나타나길 기다리는 거군요. 한국영화판의 네오는 좋든 싫든 [쉬리]였습니다만(그래서 영웅의 혈통성에 대한 지적이 현재의 기형적 관객구조라는 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만), 만화는 과연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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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로즈 Under the Rose 1 - 겨울 이야기
후나토 아카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시작은 라이너스 킹이라는 위풍당당한 이름을 가진 한 몰락귀족 소년의 비뚤어진 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은 더할 나위 없는 욕심쟁이이자 스스로 내팽개쳐버린 애정에 집착하는 아이지만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척 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든 뜯어내고 캐내서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시골 구석 바닷가에 자리한 다 무너져가는 조그만 집을 나와 접하게 된 세상은 19세기 영국. 금욕과 퇴폐라는 두 극단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그 전통 있는 시공간 속은 그의 생각처럼, 그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아이임을 거부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무의식적 가해자의 역할만을 떠맡게된다. 그자신은 자신이야말로 홀로 정의를 행하고 있음이라 여기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마치 광기에 젖은 것 같지만 어설프게 의도된 그의 행동들은 표피 너머에 새겨진 상처들과 사건들, 기억들에 비교하면 그저 재롱일 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모든 흔적들을 한꺼번에 되살려주는 것 같은 [언더 더 로즈]는 시작부터 불분명한 죽음으로 촉발된 우울한 정서로 가득하다. 이미 가문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다룬 많은 결과들을 접한 이들에겐 익숙하겠지만 그것은 숙명과 핏줄, 잘못된 관계와 꼬인 시간이 만들어낸 오래된 잔혹극의 낯익은 정경이다. 그러나 [언더 더 로즈]의 미덕은 단순히 옛전통의 안이한 답습에서 끝나지 않는다. [언더 더 로즈]는 가혹한 세계를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숨이 턱턱 막히는 좁고 내밀한 미궁으로 직조하여 펼쳐보인다. 그 방법론은 보다 분명한 시대적 리얼리티의 부여와 인물들을 향하는 확고한 시선, 그리고 개성으로 충만한 그들 하나하나를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배려를 통해서다. 한 남자와 세 여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여덟 명의 아들들. 이 복잡다단하면서도 위태로운 관계는 태생적으로 절대 물리쳐지지 않을 신경증적 강박과 불안을 담보한다. 따라서 사계절로 예정된 이 긴 이야기(두번째 에피소드인 '봄의 찬가'는 7권에서 끝나는 걸로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기쁘게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다!)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서늘하고 딱딱하게 마른 미로를 더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 과정을 보다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은 후나토 아카리의 매력적이면서도 탄탄한 작화와 작가로서의 냉정한 자각으로 유지되는 엄격한 태도다. 자칫 잘못하면 과잉된 정서의 분출로 인해 신파극이나 가학-피가학적 상황의 너절한 나열이 되어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인상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그녀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이끌어간다. 그렇게해서 추리극의 면모를 진하게 띄는 '겨울이야기'의 서스펜스가 보장될 수 있었으며 뒤틀린 치정극인 '봄의 찬가'의 잔인한 전개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후나토 아카리는 이 고도화된 소프 오페라 속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제도와 관습 뒤에 엉켜있는 비틀린 인간들의 감정을 직시한다. 그녀의 인물들이 달려가는 곳은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예정된 수순이되 시대에 의해 정당화되고 안정된, 감춰진 광기의 세계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은 그들은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방황해야 할 이유를 부여받는다. 도대체가 완전하게 닫혀버린 미로 속에 던져진 다음에야 어떻게 구원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 안에서 잊어버린 죄를 찾기 위해, 혹은 속죄하기 위해 부여된 방법이 그저 그 미로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나가는 일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러니 이 고통은 끝없이 파고 들어가는 나사와 같다. 한 번 넣기 시작하면 그 결에 자신을 단단하게 새겨버리는 끈질긴 나사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 가혹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그 있을지 없을지 모를 끝을 보기 위해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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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9-2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정말 강렬한 제목이군요.
일본 사람들은 왜 이 시대와 이 공간에 집착하는 걸까요?

hallonin 2006-09-2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저 시대와 공간 자체가 근대라는 이름으로 가장 막바지에 도달한, 현대와 고전시기의 융합이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고도의 양식화와 더불어 금욕과 퇴폐라는 두 영역이 극단적으로 맞물려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매혹의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일본의 이상적인 근대화 모델인 것과 더불어 지리적-제도적 동질감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었다는 역사적 현실로 인한 문화적 파장의 결과도 그 원인에 들어가리라 봅니다. 뷁사마와 안경잽이 마법사 꼬마에게 열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공포소설의 전통을 타고 시작하지만 공포소설은 아니다. 도입에서부터 중반까지의 강력한 흡입력은 실로 훌륭. 다소 루즈해지는 후반부는 그저 불가해 스타일의 공포소설이 가진 진부함을 거부하려는 딜레마가 섞인 결말부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럭저럭 납득. 그러나 왜 이렇게 비싸, 하고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볼륨 대비 가격치가 안타깝다.

 

부드럽고 쉬이 읽히며 중세에 대한 지식을 재확인하게 만들고 깔끔하게 요약수습이 가능하다는 점이 미덕. 작가의 처음 의도대로 현대적인 컨버전을 배제한 고답스러운 방향으로 갔으면 훨씬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시간역전이라는 소재를 통한 캐릭터 유희의 매력적인 일례. 소문대로 괜찮은 가독성. 나가토 유키 팬들의 축제의 장. 개인적으론 이토 노이지의 정력적인 동인활동 중 나가토 유키를 벗기는 게 하나쯤은 껴있길 기대하고 있을 정도로 열광적인 팬인 본인으로서도 당연히 만족.

 

아틀라스 게임 전문 컨버전 만화가였던 우에다 신슈의 오리지날 작품. 생각해보면 이 양반이 [바로크]도 만화화했었는데 그런 걸 보면 작화 자체는 야오이물에나 나올 법한 진한 색기(G펜)를 풀풀 풍겨내지만 정신세계는 꽤 그로테스크 지향인 듯. 이 작품도 작가가 책날개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러브코미디로 그리려고 했다고 뻥치고 있는데 다 본 사람이면 별로 동의가 불가능하거니와.... 일단 표지부터가 그렇다. 전기물에 가까운 내용으로 앞으로가 기대되는 물건.

 

호크아이 하악하악. 전체적인 내용은 쉬어가는 분위기로 지금까지 나온 권들 중 가장 긴장감이 덜하지 않았나 싶다. 그 증거로 작가의 농땡이로 인해 무려 11페이지나 배정된 보너스 만화 페이지. 본편 이상으로 즐겁게 보고 있다는 독자편지 투고자(and me)에게 동조하는 이라면 별 불만도 없겠지만.

 

의외로 유머가 넘치는 만화. 가끔씩 매 에피소드 끝에 달리는 작위적 해피엔딩의 쌍팔년도적 센스만 빼면 좀 좋겠다.

 

퀄리티가 화끈하게 떨어져버린 작화(월간연재인데). 그러나 이야기는 이제야 볼만하게 클라이막스로 달려간다. 즉슨, 이제 이 작품을 보면서 더이상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진지하게 원작소설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원작자의 말을 빌리자면 '주요 등장인물의 머릿속 나사가 기세 좋게 튕겨 나가는' 5권. 오직 오이와 켄다이의 색기 자르르한 그림만 보고서 참고 온 보람이 조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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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6-09-1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레 17세는 만화 소개글만 봤는데 느낌이 팍! 오더군요.=)

hallonin 2006-09-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치는 50% 이상 삭감 바람. 헐.
 



1997년, 홍대씬을 중심으로 한 인디밴드들과 팝아트스러운 문화잡지들의 동시다발적 출현으로 인해 세기말 괴이쩍은 문화 전환기라도 맞이하고 있나 하는 사기스러운 감각을 느끼고 있던 시기에 자우림이 '헤이 헤이 헤이'를 부르며 나타났습니다. 신선했었죠. 그리고 절묘했습니다. 비주얼이 되는 여성 보컬을 메인으로 미묘한 절충선에 쫙쫙 감기는 멜로디를 가진 노래를 들고 나온 밴드는 자우림이 거의 유일했거든요. 그때 자우림을 봤을 때의 느낌은 이후 [라그나로크]의 오픈베타 광고가 났을 때의 느낌과 똑같았습니다. 즉, 새로운 트렌드에의 놀라울 정도의 포착감, 그로 인한 대박 예감.

 

그런 점에서 자우림의 1집은 제 기대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줬었습니다. 판권 문제 때문인지 음악적 자존심 때문인지 암튼지간에 히트곡 '헤이 헤이 헤이'가 빠진 상태에서 나온 1집의 감수성은 익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로 인디밴드가 가지고 있을 법한 마이너한 감각을 자우림-김윤아라는 인물이 가진 묘하게 절충적인 필터(만화적 감수성이라 불러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묵직함을 배제하고 약간의 우울증 페이소스를 첨가한 세련된 결과물로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은 그때부터 많았습니다. 당시 함량미달의 밴드들, 가수들이 크랜베리스, 시네이드 오코너 같은 색깔 강한 외국가수의 스타일을 답습하여 내놓은 음악들은 그 창의성 없음으로 해서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었었죠. 김윤아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진 못했습니다. 이후 지속된 앨범 발표에 있어서도 밴드 업계의 기둥다운 묵직한 한 방을 못 날리고 계속 실없는 잽만 날리고 있다는 비판 또한 있었구요.

 

일단 보컬로서의 김윤아에 대해선 시간이 흐르면서 일취월장했다고나 할까요. 좀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와서 그녀의 목소리가 돌로레스의 짝퉁이라고 놀리긴 힘들 듯 합니다.

 

실없는 잽의 문제에 있어선, 저로선 자우림의 노래들 중 정말 좋아하는 노래들이 있기 때문에 100% 동조하긴 힘들지만 그들의 노래들이 이제 와선 전반적으로 사카린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더군요. 너무 달콤한데, 그래서 7장째 듣고 있자니 좀 질렸습니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948444

그런데 뒤늦게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 이 포스트를 올리게 된 건 '하하하쏭' 표절 문제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고 있었겠지만 저는 얼핏 듣고 있다가 오늘 나귀님의 서재에서 보고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원래 자우림 자체가 기존의 여성보컬 중심의 소프트한 락 밴드라는 전통에 서 있고, 그 감수성은 팝컬쳐의 우울함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혼합 시너지가 불러 일으키는 잡탕적이면서도 패셔너블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서 많이 접한 것 같다는 인상은 전부터 많이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논란들에 대해선 김윤아는 특유의 베짱으로 버텨왔다는 점에선 그녀가 가진 자폐적인 당당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붕 뜬 우울함의 외향적 지향이라는 절충적 감각의 현현이 김윤아라는 점에서, 이 모순되지만 납득이 가는 인상 또한 자우림의 잡탕적 성격을 우회해서 드러내 보이는 양상이 아닌가 하고 남는 시간의 망상 약간.

아무튼 '하하하쏭' 얘길 보고 든 생각은,

 

2집에 실린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가 the wonders의 'that thing you do'와 판에 박은 듯 똑같은데도 당시에나 지금이나 어째서 아무데서도 표절논란이 없는지가 정말 궁금하다는 거였습니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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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단적치인 2007-10-1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와 'That Thing You Do'둘다 알고 있던 노래인데도 불구하고...이 글을 읽기전까진 둘을 함께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막상 생각해보니까 비슷한점이 분명 있어요. 신기해요.
두 노래의 성향이 좀 달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어요.

글 잘읽었습니다 :)

hallonin 2007-10-1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우림 스타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musial 2009-12-1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 예전에 Wonders의 그 노래하고 비교해보면서 듣던 기억이 나는군요. 오죽하면 두 음원을 제가 다니는 사이트에 올려서 비교해보던 기억까지 납니다. 제 생각에도.. 왜 이 노래가 표절의혹이 재기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는지 하는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