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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로즈 Under the Rose 1 - 겨울 이야기
후나토 아카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시작은 라이너스 킹이라는 위풍당당한 이름을 가진 한 몰락귀족 소년의 비뚤어진 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은 더할 나위 없는 욕심쟁이이자 스스로 내팽개쳐버린 애정에 집착하는 아이지만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척 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든 뜯어내고 캐내서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시골 구석 바닷가에 자리한 다 무너져가는 조그만 집을 나와 접하게 된 세상은 19세기 영국. 금욕과 퇴폐라는 두 극단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그 전통 있는 시공간 속은 그의 생각처럼, 그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아이임을 거부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무의식적 가해자의 역할만을 떠맡게된다. 그자신은 자신이야말로 홀로 정의를 행하고 있음이라 여기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마치 광기에 젖은 것 같지만 어설프게 의도된 그의 행동들은 표피 너머에 새겨진 상처들과 사건들, 기억들에 비교하면 그저 재롱일 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모든 흔적들을 한꺼번에 되살려주는 것 같은 [언더 더 로즈]는 시작부터 불분명한 죽음으로 촉발된 우울한 정서로 가득하다. 이미 가문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다룬 많은 결과들을 접한 이들에겐 익숙하겠지만 그것은 숙명과 핏줄, 잘못된 관계와 꼬인 시간이 만들어낸 오래된 잔혹극의 낯익은 정경이다. 그러나 [언더 더 로즈]의 미덕은 단순히 옛전통의 안이한 답습에서 끝나지 않는다. [언더 더 로즈]는 가혹한 세계를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숨이 턱턱 막히는 좁고 내밀한 미궁으로 직조하여 펼쳐보인다. 그 방법론은 보다 분명한 시대적 리얼리티의 부여와 인물들을 향하는 확고한 시선, 그리고 개성으로 충만한 그들 하나하나를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배려를 통해서다. 한 남자와 세 여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여덟 명의 아들들. 이 복잡다단하면서도 위태로운 관계는 태생적으로 절대 물리쳐지지 않을 신경증적 강박과 불안을 담보한다. 따라서 사계절로 예정된 이 긴 이야기(두번째 에피소드인 '봄의 찬가'는 7권에서 끝나는 걸로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기쁘게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다!)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서늘하고 딱딱하게 마른 미로를 더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 과정을 보다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은 후나토 아카리의 매력적이면서도 탄탄한 작화와 작가로서의 냉정한 자각으로 유지되는 엄격한 태도다. 자칫 잘못하면 과잉된 정서의 분출로 인해 신파극이나 가학-피가학적 상황의 너절한 나열이 되어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인상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그녀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이끌어간다. 그렇게해서 추리극의 면모를 진하게 띄는 '겨울이야기'의 서스펜스가 보장될 수 있었으며 뒤틀린 치정극인 '봄의 찬가'의 잔인한 전개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후나토 아카리는 이 고도화된 소프 오페라 속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제도와 관습 뒤에 엉켜있는 비틀린 인간들의 감정을 직시한다. 그녀의 인물들이 달려가는 곳은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예정된 수순이되 시대에 의해 정당화되고 안정된, 감춰진 광기의 세계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은 그들은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방황해야 할 이유를 부여받는다. 도대체가 완전하게 닫혀버린 미로 속에 던져진 다음에야 어떻게 구원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 안에서 잊어버린 죄를 찾기 위해, 혹은 속죄하기 위해 부여된 방법이 그저 그 미로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나가는 일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러니 이 고통은 끝없이 파고 들어가는 나사와 같다. 한 번 넣기 시작하면 그 결에 자신을 단단하게 새겨버리는 끈질긴 나사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 가혹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그 있을지 없을지 모를 끝을 보기 위해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