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한 여자가 말한다. 여자는 그녀에게 긴 시간 동안 가해진 제도적 폭력과 불합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 모든 고통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지독한 상흔과 후회를 안고 있었다. 고통이 습관이 되버린 여자는 앞으로 나오기 보다는 움츠러드는 것에 더 익숙해지고 잔인할 정도로 명징한 육체의 병까지 얻은 상태에서 바깥세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방황, 그리고 방황. 여자는 크고 넓은 원을 그린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그것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구원을 향하게 된다. 자신이 7년 동안 버린 시간 속 제도의 요구로, 나중에는 그녀 스스로의 갈망으로 끊임없이 추구했던 그 지독한 구원을.

이 이야기는 수녀원에서 7년을 보내야 했던 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가정적이든 교육적으로든 어떤 이유로서든 조금 보수적이고,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세상에 낯설어하며 말보다는 글에 익숙한 모든 이들을 자극할 이야기다. 이것은 실화이며 에세이들의 촘촘한 총합이 짜낸 어느 비교종교학자가 겪어야 했던 내면의 고백이지만 동시에 모든 억압된 종류의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을 향해 보내는 담담한 자아쟁취기기도 하다.

7년간의 수녀원에서의 삶을 통해 그녀가 얻게된 증오는 상당해서 처음 그녀가 그 감옥을 나와 벌이는 사고는 그녀가 천성적으로 가지는 소심함 속에서도 가끔씩 돌출적이고 공격적인 모양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적어도 글에 있어서 그녀는 더없이 당당하다. 그래서 이제는 흔해진 종교에 대한 일반론, 혹은 중세철학 시대의 교부들이 설파했던 신의 불가지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뒤로 미뤄진다.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경험주의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면서 자신을 속박했던 것을 차갑게 냉소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책-인생 내내 그 떨쳐버리고 싶었던 가톨릭의 굴레 밖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저 폭력적이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가톨릭은 어떤 형태로든 그녀의 인생에서 존재한다. 어떤 때 그것은 그녀의 예전 신앙에 대한 비웃음의 대상으로, 어떤 때는 그녀가 맡아야 할 생활의 역할 중 하나로, 어떤 때는 가망 없는 도피처로. 그녀가 가장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그녀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한다. 그리고 그녀는 실수하고 잘못 판단한다. 첩첩이 이어지는 우회로. 그녀는 종종 지친다. 아니, 어쩌면 내내 지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시간과 경험이 쌓여 보다 더 침착해진 다음 그녀는 되묻는다. 바로 뛰어나오지 못하고 7년이나 보낸 것, 그 시간 동안 자신이 갈구하던 것에 대한 물음의 난해함, 혹은 적대적 냉소에서 잠시 비켜 서서, 어째서 자신이 그 지옥에 매혹되었던가를, 그 원초적인 시작점의 근원을 묻는다. 선택은 온전히 그녀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던 고향, 마음의 안식, 구원의 표상을 점지한다. 이제야 그녀는 뒤돌아서서 자신이 그린 원을 볼 자신이 생긴다. 그 원의 크기를, 궤적을 비로소 파악하게 된다. 자, 그리고 이것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째서 미련은 형태를 달리 해서 당신의 주위를 멤도는가. 당신은 그것을 뿌리끝까지 증오한다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이 해왔던 일들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되묻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것은 발걸음, 아주 길게, 오랫동안 우회해서 올라가야 하는 나선계단과도 같다. 그 궤적의 크기는 방황의 수치를 나타내지만 긴 여정은 마침내 그녀에게 역할을 부여해준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저 비교종교학자라는 역할을, 그녀가 원했고 세상이 원했고, 아마도 신이 있다면 점지해뒀을 터인 그 자리를.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종교들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심원한 비의의 한자락을 들춰낸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말을 건다. 당신도 같지?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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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았는데, 아직 못 보고 있어요.
옷 좀 단정히 입고 봐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님의 취향을 종잡기 힘든걸요.

hallonin 2006-11-07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평소에 제가 어떻게 보였길래-_-
 

<킹덤 오브 헤븐 : 감독판> / 궁극을 정의하다!

 

과연 명불허전. 원래 나온 극장판의 루즈함이 내용의 생략에 의한 결과였음을 잘 알려주는 감독판입니다. 표정부터가 영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던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발리안이 왜 그 지경이 됐고, 어째서 그런 활약을 하며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충실하게 이뤄지거니와(그런 점에서 올랜도 블룸의 어설픈 연기가 수도사에 가까운 탓에 내내 절제된 감정선을 보여주던 발리안의 역할에 그럭저럭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와 맞먹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던 에바 그린의 역할이 대폭적으로 상승(그저 많이 출연하면 좋습니다). 그런데다 가샨 마소우드가 맡은 살라딘의 출연시간 또한 늘어나서 그 품위 있는 카리스마를 더 즐길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더불어 한스 짐머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아랍에스닉 음악과의 조우를 훌륭하게 치뤄낸 해리 그렉 윌리엄슨의 스코어와 리들리 스콧의 화면 장악 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라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194분.

이 영화 속 러브스토리가 전통적인 기사도의 궁정식 사랑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것을 보다 확고하게 인지하게 만들었다는 점 또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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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야샤르 야샤마즈. 야샤르 야샤마즈. 야샤르 야샤마즈. 솔직하게 얘기해볼게. 노골적으로 고백하건데 저 이름, 불편해. 간장공장콩장장으로 시작되는 우리네 발음훈련을 떠오르게 만드는 저 이슬람 소스가 가득 배어나는 불편한 이름은 척 봤을 때 거부감마저 줘. 어쩔 수가 없지. 익숙치가 않거든. 더군다나 저 야샤르 야샤마즈의 고향은 터키. 혈맹의 나라니 동로마 문화의 중심지니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에게 터키라는 나라는 월드컵 이벤트로나 가끔씩 볼 수 있는 나라잖아? 아무리 케밥이 이마트 지하 식품매장 곳곳에 깔려 있다 해도, 전통적인 터키인력 수입국이자 햄버거 대신 케밥을 먹는다는 지경에까지 이른 독일 정도가 아닌 한에야 터키는 예전부터나 지금까지나 우리에겐 어디 붙어있는지도 지도에서 제대로 찾아내기 힘든 낯선 타자의 나라일 수밖에 없지. 그런 나라에서 온 야샤르 야샤마즈의 이야기에 우리가 얼마나 공명할 수 있을까?

야샤르 야샤마즈 만큼이나 발음 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쉠넴 이쉬규젤이라는 이름의 글쟁이 양반의 친절한 소개글이 끝나면, 우리는 교도소의 한 모퉁이에서부터 한바탕 무대를 여는 야샤르의 행각을 진득한 묘사를 통해 목도할 수 있어. 이슬람교의 전통에 대한 설명과 어느 고명한 성직자의 세상에 대한 회의와 신을 향한 처신, 그리고 그를 공손히 따르는 야샤르의 독실한 무슬림적 태도에 대한 묘사. 우리는 시작된지 얼마 안 지났는데도 꾸란의 숭고한 신비와 그를 체현하는 두 남자의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종교적 승화를 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하게 되. 그러나 전혀 부담 갖지 말지어다. 단 3페이지 내로 작가는 자신이 독자를 웃겨줄 채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줄테니.

일단 한 차례 웃었으면, 이제부터 야샤르가 겪었던 고달픈 삶에 대한 주구장창 설레발에 빠져들 무장해제는 다 된 셈이야. 자신이 [아라비안 나이트]가 일찍이 알려줬던 이야기꾼의 운명에 대한 오래된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가 아지즈 네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민등록증을 가지지 못할 팔자였던 터키 촌구석의 평범한 청년 야샤르 야샤마즈의 입을 빌려 살면서 보고 겪고 느껴야 했던 부조리하면서도 흔한 풍경이기에 슬프고도 웃기는 양상들을 통해 터키 사회, 더 나아가 관료적이고 조직화된 사회에서 드러나는 지독한 인간소외를 이죽거리며 드러내보이기 시작해.

그런데 여기가 터키야? 무슨 이름들만 얄리꼴리하지 터키 같지가 않잖아....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잖아!

 

얼씨구.

 

그들이 야샤르의 이야기에 이렇게나 열광하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샤르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그들 대부분에게 야샤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동의 삶이었던 것이다. 야샤르는 마치 모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체화한 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206P

 

조나단 스위프트가 아일랜드의 위정자들을 향해 감자 대신 애들을 잡아먹자고 제의한 거나, 움베르토 에코가 냉동된 연어 한 마리 때문에 최신식 시스템의 호텔에서 겪아야 했던 온갖 수난을 그 초현실주의적인 인상들에도 불구하고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 야샤르의 이야기 또한 깊숙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니, 아니다 그딴 거 몰라도 상관없어. 그곳이 아일랜드든 캄보디아든 북부 이탈리아의 특급 호텔이든 간에 상관 없이, 우리는 야샤르의 빙글빙글 끌어들이는 입담에서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왜냐, 야샤르, 그리고 야샤르들이 날카롭게 간파한 것처럼 세상은 한없이 엿같기 때문이야. 조직은 개인을 우습게 만들면서 그 피를 빨아 스스로를 비대하게 만드는 선천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의 야샤르들은 뭔일을 당할까 쪼금 무서워서, 쌍욕을 (아마 아무도 없을지도 모를) 하늘에다가 대고밖에 못해. 근데 아무에게도 안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향하는 그들의 욕질은 그 대상인 하늘의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엉뚱하게 정확한 셈이야. 여기까지 오면 이스탄불 한 번 안 가 본 사람이라도 터키와 우리가 고리짝적부터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형제적 속성을 진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라구. 그래서 이런 불온한 이야기를 줄줄 읊는 아지즈 네신은 내란음모, 좌익활동 등과 연루되는 250번의 재판과 5년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통해 당당한 개인주의의 가치를 웅변했던 건지도 몰라. 뭐 그렇게 신나게 깜빵을 드나들었으니 이런 깜빵이야기도 쓸 수 있었던 거겠고. 그렇게해서 이 소설이 탄 상과 상업적 성과를 가늠해보면, 자신에 대한 투자가치대 산출비용을 확실하게 받아냈다는 점에선 이 작가, 은근히 지독하게 CEO스러운 양반일지도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실용적 면모. 처음 기획이 라디오드라마의 극본이었던 것 만큼, 소설은 내내 연극적 색채로 가득 차 있어. 교도소라는 제한된 공간의 살가움과 야샤르의 이빨과 혀가 만들어내는 활극에 가까운 인생담, 줄줄이 펼쳐지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모든 광경들. 그리고 공감, 씁쓸한 뒷맛의 마무리까지. 이 수다쟁이의 이야기는 그 본래의 기획이 가진 장점들을 전혀 배신하지 않는 극본으로서의 가치도 실로 훌륭. 우리 주위를 둘러친 뻔뻔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조직의 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 몸부림치는 야샤르의 억울한 표정과 내일을 꿈꾸는 몸짓은 그 살아있음이 보장됨으로써 설명 가능한 조건이기에 팔팔 꿈틀대는 인간을 통해서만이 제대로 체현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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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랩 가사처럼 리듬감을 살려서 읽어야 할 것 같은. 재미있어요.

hallonin 2006-11-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헐.
 

매니아들의 오매불망 리스트의 가장 첫순위에 자리하고 있었을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이 드디어 애니북스에서 재발매를 개시했습니다. 다른 출판사에는 실리지 않은 텍스트부록이 들어간다는 얘기가 있는데, 출판사가 출판사인 만큼 퀄리티는 믿을만 하겠죠. 일단 1, 2권을 동시에 내놓고 한 달 간격으로 전 5권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영화판DVD와 할인쿠폰 등등과 연계되는 온라인 서점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데 알라딘은 어째 잠잠하군요.

샘플로 공개된 것만 슬쩍 봐도 세주문화사판의 악명 높은 번역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날림 번역을 스스로의 작문실력으로 메꾸는 번역가 박련의 문학적 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어서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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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연 씨가 번역보다는 작문 솜씨가 낫다는 소리인가요?^-^
그럼.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는요?
세주 걸 갖고 있는데... 저 표지도 탐나네요.

hallonin 2006-11-0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웁게도 말그대로입니다. 세주문화사판 [몬스터]라면 터키가 일본어발음 그대로 번역되는 바람에 면도기회사 이름과 비슷하게 표기되기도 하고 성격 안좋은 키보드매니아 공무원의 이름이 초반엔 랑게라고 불리다가 뒤로 가선 룽게라고 불리는 것도 있고 그랬죠....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글로 그린 그림과 다를 바 없는 하이쿠를 맛보게 된다면 그와 꼭 맞는 그림과 연결시키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되려 힘들 것이다.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은 전국시대가 끝난 이후 펼쳐진 태평성대의 중심을 뒷심 삼아 우키요에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병풍을 불러들여 그런 편집자적 욕망을 마음껏, 그리고 정성스럽게 펼쳐보인 결과물이다.

사계라는 주제를 따라 완고하게 진행되는 그 한 수 한 수 속에서 그림은 글을 드러나게 만들고 글은 그림을 움직이게 만든다.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이미지의 화학작용을 꿈꾸는 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합의 연쇄들은 편집자, 혹은 가상의 독자라는 다른 이름의 편집자가 가졌을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그 단순하지만 정석적인 의도에 부응하고 있다. 그리고 온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떤 과함도, 삐져나옴도 없이.

그런 의미에서,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에선 욕망은 있되 욕심이 없음을 느낀다. 이 책이 두 명의 다른 필자의 힘을 빌어 풀어내는 나긋나긋한 설명을 통해 하이쿠와 우키요에를 처음 접하는 이도 그 낯설지도 모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한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충실함이다. 자기완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내면의 호수로 뛰어드는 개구리를 덤덤히 바라보는 하이쿠 시인처럼,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절제된 욕망의 적극적 자기표상이 보여주는 성숙하고 예의바른 유희에의 초대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의 미덕은 마치 하이쿠 그 자체와도 같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단정하면서도 친숙한, 그러면서도 고아한 그 무언가처럼.

 

계절과 풍광과 심상을 표현해야 하는 하이쿠에선 일본적 처연함과 허무함,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장르 자체가 가지는 유희성과 그를 따르는 낙천적 기운, 찬탄과 기쁨까지 맛볼 수 있다. 때로는 비극, 때로는 초탈, 때로는 해학을 보여주는 하이쿠의 다양한 면모는 짧고도 변화무쌍하며 그래서 언어유희에 더없이 적합하다는 측면에서 그 폭넓은 수용성을 보여준다. 압축된 삼라만상을 5-7-5의 엄격한 틀속에서 담아내야 했던 이 짧은 시는 필연적으로 고도의 이미지성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정형시가 빚어내면서 쌓아온 절제되고 정제된 시어가 마침내 도달해야 했던 운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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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0-3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쿠를 우키요에로 설명하려는 건, 과한 욕망 같아요.
어느 쪽이나, 서로가 서로를 보한다기 보다는 감하는 느낌이에요.
이 책 안 읽어 보았지만.--;;
근데, 다른 리뷰들이랑은 느낌이 좀 다른걸요.(뭘까?)
너무 나긋하달까.

hallonin 2006-10-3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실은 우키요에와 하이쿠의 결합이라는 모양새는 제가 전에 간직했던 아이템 중 하나였거든요. 바쇼에 의해 대중화된 하이쿠와 판화 양식을 통해 대중화되어 에도시대에 대한 일종의 간판 역할을 한 우키요에는 둘 다 민중적인 고아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결합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헐, 좀 찌르긴 찔렀다고 의도했는데 역시나 잘 보이진 않는 건지도?

blowup 2006-10-3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구나.
아이템 보따리가 뚱뚱한가요?
민중적인 고아함에서는 끄덕끄덕.
제가 아니라고 느꼈던 건, 아주 주관적인데(뭔들 아니겠습니까만)
하이쿠가 우키요에보다 훨씬 더 압축적인 형식이라고 생각해서였어요.
근데, 제가 본 우키요에가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단정적인 발언을 하나 싶어
제 발언을 살짝 물리고 싶습니다.(리콜할까요?^^)

hallonin 2006-10-3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긴요. 좋은 물음에 최대한 답을 짜낸 제가 안타까워집니다 그럼-_- 인류는 러브&피스죠 핫핫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