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은 괜찮았다. 삼국지를 시대의 텍스트로 치환하여 보다 사실에 가까운 사료들과 증거들, 논리적 판단을 기초로 기존의 삼국지 안에서 의도적으로 축소된 인물들을 되살려내고 그들의 도와 인감됨을 다시 물으며 거시적인 영역으로 삼국지를 확장하여 경제, 사회, 군사, 정치에 이르는 소위 실용적이라 불릴 법한 모든 범위에서 삼국지를 활용한 바, 그 의도도 지금까지의 비슷비슷한 무리들에선 눈에 띌 정도로 충실한 편이었고 그만한 작업을 몰아부치기 위한 의욕 또한 충분히 보여진다.

그런데 뭐 이렇게 반복되는 사설들이 많다더냐.

인물론, 역사적 사실, 평가 등등 모든 것들에 있어서 재활용의 수준을 넘어서 앞 장에 나왔던 것들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대로 징하게 반복해서 써먹어주는 미덕이 돋보인다. 마이리뷰에 실린 혹자의 비판처럼 뒤에 실린 방대한 분량의 인명사전은 사족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더군다나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한 의도에 맞추느라 사유와 판단들이 순간순간의 편의에 맞춰 자잘한 결론을 내리는데 집중된다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산만함과 매너리즘의 영역으로 독서를 몰아넣는다.

한마디로, 지루했다. 문화일보에 연재됐던 장정일의 삼국지 칼럼만큼이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새....가 아니라 이제야 3권.... 전작들과 다른 특이사항은.... 거의 없다-_- 쌍둥이 이야기가 드디어 끝을 보게 되고, 미려한 작화와 미친 듯한 수다빨에 비해 후까시에 정력이 집중된 나머지 막판 맥이 풀리는 스토리와 영 신통찮은 액션씬에서의 동선은 별로 나아진 점이 없어 보인다는 점은 그대로. 그리고 있는 개폼 없는 똥폼 다 잡는 인물들만 한다스지만 이번 권에선 삼합회의 보스인 양반이 주윤발의 재래를 보여주는 건액션을 펼쳐주신다. 또한 레비의 록을 향한 애정 고백도 약간....-_- 본편보다 훌륭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보너스만화도 건재.


이번 권에선 보다보면 이슬람 투쟁전선에 몸을 담은 일본인이 하나 등장한다. 그 양반이 공산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운동은 프롤레타리아를 가장한 잠재적 프티부르주아들의 놀이터가 되버린 이 시대에 대한 우화를 들먹이면서 그러면서도 왜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다음과 같다.


-내가 싸움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말야, 형씨. 그 무렵의 내가 아직 살아있단 걸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야. 내 신념을 거짓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


일본은 1960년대 초에 전세계에 몰아닥친 민주화운동에서 파급된 전공투와 그것이 극단적으로 승계된 적군파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몰락이란 것이 아직 민주화 운동의 당사자들이 살아서 사회 일선에서 있고 그 공과가 이제사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나라보다 훨씬 일찍 이루어졌기에 그 이후에 시작된 일련의 후유증들 또한 우리나라보다 빨리 나타났다(물론 우리나라도 같은 시기에 이승만 영감을 몰아낸 4. 19 혁명이 있었지만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그 싹은 아작이 난다. 이후 우리나라의 운동권이 일본 전공투 세대의 몰락과 같은 길을 걷게 되기까진 영삼-대중옹이라는 양김씨들 간의 통합 대선 후보 도출 실패에 따른 민주화 세력의 대선 패배와 연세대 점거 사태에까지 이르는 근 30여년 뒤의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기존 가치관의 붕괴와 바탕을 상실한 세대의 등장, 보헤미안적 정서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기모멸적 태도, 그리고 그에 반발한 극우적 가치관들의 난입 등등.


블랙 라군 3권에서 저 중년 아저씨의 입을 빌어 얘기되는 것도 그런 세상을 떠나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야 했던 사람의 변명이자 그 시간이 남긴 파장 안에서 자라난 밀리터리 취향의 작가가 몰락한 시간을 위해 준비한 나름의 변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아저씨가 하는 짓이나 발언들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총과 전쟁을 사랑하는 이들(레비, 미치광이 쌍둥이 등등)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이 양반이 지켜내야 할 신념이란 결국 전쟁터와 같은 격렬한 공간이 전해주는 그 치열함과 자극이란 말이 된다(앞서서 이 아저씨는 세상 모든 일이 놀이와 같다는 발언도 한다). 이 부분에서 히라노 코우타가 일찌기 <헬싱>에 수록된 단편에서 보여줬던 건액션을 사랑하는 범죄자들과 고리타분한 혁명광, 혹은 나치와 칼잡이 수녀들의 험악한 만남들이 보다 사랑스러운 분위기에서 이뤄져야 했던 이유에 대한 대답이 나오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그 난폭함을 사랑하는 족속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극좌와 극우는 만나기 마련이다 라는 진중권의 탁견처럼 극좌나 극우나 아나키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의 극단들이 만나게 되는 지점은 폭력에의 매혹이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여기서 보여준 작가의 견해는 그 탁견의 연장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결국 이 작품 또한 그에 대한 매혹을 먹이 삼아 만들어지는 그리 진지하지는 않은 작품이란 걸 감안해 볼 때....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진실 혹은 의견, 그리고 작가가 가진 무의식적인 영역의 도출, 가장 중요한 결론은 그냥 재밌으면 된다는 것이겠다-_- 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타쿠는 학문으로 정착이 가능한 것인가.... 배스낚시도 300페이지가 넘는 책이 나오는 마당에 무엇이 두려우랴-_-

뭐.... 가이낙스의 창립자였던 오카다 토시오가 도쿄대에서 오타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오래된 얘기이고 에반게리온의 대성공이 이끌어낸 오타쿠 문화의 메이저 진입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조차도 오타쿠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소위 스탠다드와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도 라이센스로 발매되는(아마도 인기작품에 묻혀오는 계약 관계일 것인) 오타쿠 관련 소재 작품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근래에 쏟아져 나오는 이 계열 작품들의 라이센스 러시는 일본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이것이 매니악하게나마 제법 트렌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작품, 엄하다. 초형귀 동인지를 그렸던 작가의 전적....

우리나라에 라이센스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오타쿠 만화들의 계열들을 대강 정리해보자면 리얼리즘 계열(현시연)과 초현실주의의 영역을 넘나드는 계열(러브얀, 남자는 불끈불끈, 제멋대로 카이조) 정도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 각각의 장단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해당 작품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나뉘는 편이다(솔직히 그 바닥 사람이 몇명이라고 의견이 나뉘어봤자겠지만-_-). 우선 <현시연>은 오타쿠 문화 자체를 다루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주변, 혹은 그 중심에 들어가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주력하고 있다(...해서 리얼로봇 계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타쿠 라이프의 소소함을 그려내는데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 이 작품을 보고 '나와 너무 똑같잖아!' 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빠진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남자는 불끈불끈>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려나. 하긴 이 작품도 나온지 꽤 됐으니 이미 적정 자극의 수위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타쿠들의 생활을 완벽한 초현실주의의 영역에서 다루는 이 작품은 오타쿠들의 의식과 욕망을 일체의 가감 없이 그대로-_- 펼쳐보이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이 싫다-_-

사나이는 개뿔이 사나이.... 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작가의 또다른 작품이라면 <얼짱 응원단장>이라는 물건이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남자는 불끈불끈>하고 별 다를 것도 없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가의 작품들이 싫다. 혐오스럽다. 그것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센세이셔널리즘의 극단적인 추구

...라는 점에서다. 한마디로 이 작품들은 추잡하다. 근자에 오타쿠 문화라는 것을 소재로 삼는다는 만화들은 근본적으론 자기노출 행위와 다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양상들을 그대로 드러내보인다는 것이 커밍아웃의 자랑스러움을 갖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절제 없는 노출이 상업적 흐름과 맞물려서 보여지는 자본주의의 뻔한 흐름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면 과장일까. 그것은 차별화된 문화의 양상이 아니라 뻔하고 별볼일도 없는 주제에 그저 드러내기만 할 뿐인 노출증의 세계다. 거기엔 그저 노출만 있을 뿐이지 그에 대한 문제제기와 고민이 없다. 적어도 오타쿠 문화가 제대로 된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이런 식으로 드러나면 안된다. 물론 그 위악없는 노출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그 노출이란 것이 과연 위악이 없는 것인지는 재차 되물어야 할 문제다. 오타쿠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지금 이 마당에 와서 그런 노출증은 그저그런 이미지의 판박이 이상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에바처럼 괜시리 목에 힘주고 훈계하는 내용으로 가식을 떨어야 하는가' 소비주의적 양상과 생산적 양상이 극단적으로 맞물려서 정보의 흐름이 일반의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엄청난 속도를 가지게 된 오타쿠 문화의 속성에 따라 에바의 이미지들은 이미 업계에선 닳고 닳은 또하나의 상업 이미지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런 속도가 에바가 가진 의미와 방법론을 완전히 깔아뭉개버렸지만(가이낙스 또한 그 흐름을 철저히 이용해먹었으니 그들이 에바로 달리 할 말이 있다는 건 공구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근자의 천박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담론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선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 너무 오래 걸렸지만 시작은 여기서부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시연>을 지지하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이 분명한 접점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갈등, 그리고 그것을 통한 융합의 과정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 작품은 혹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만들어진, 그저 그런 오타쿠 소재의 만화가 아니다. 여기엔 진정 제대로 된 커밍아웃이 존재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들이 있으며 그저 자극적이고 분출만 해댈뿐인 동인 문화의 재탕인 오타쿠 소재 만화를 뛰어넘는 사려깊은 고심의 흔적이 있다. 이 작품이 '오타쿠 만화'가 아니라서 싫다는 평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단순히 '오타쿠 만화'라기 보다는 '오타쿠 만화인 동시에 오타쿠에 대한 만화'의 접점을 액자형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제멋대로 카이조>가 실행했고 결국은 폭주해버린 자기회의를 뛰어넘는 긍정적인 힘이라고 보인다. <제멋대로 카이조>는 분명 용감한 작품이었고 의식있는 자기노출이 폭발적인 공격수단이 될 수 있음을, 출판사에서 연재중단을 때려버리는 걸로-_- 결국 상업지가 가진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성과로 증명해버렸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자폭행위였다. 그에 비하면 <현시연>은 훨씬 능글맞고 어찌보면 소소하지만 하나의 대안을 훌륭하게 도출해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오타쿠 만화의 시작이자 트렌드에 대한 애프터눈의 대답이며 이후 비슷비슷한 컨셉의 아류 이미지들을 양산한 이 작품이 여전히 대안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업계는 이 작품에서 팔릴 수 있는 '소재'들만을 잡아냈다.

그저 그런 줄 알았지만 뒤로 갈수록 실로 제대로 된 폭주 만화로 환골탈태. 처음엔 라이센스로 나온다는 사실이 경이로운 작품이었다.


이 장면은....

돌려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에 대한 얘기다....

앞서 언급한대로 <제멋대로 카이조>는 이 분류에서 색다른 작품이다. 폭주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거침이 없는 이 작품은 단순히 유희 차원을 뛰어넘는 해체의 경지를 선보인다. 결국엔 작가가 출판사에서 목이 잘리는 걸로 끝이 났지만.... 26권이나 그린 작가를 자르는 출판사도 어지간하지만 그것은 뒤로 갈수록 거침이 없는 쿠메타 코지의 비판과 풍자를 견딜 수 없었던 상업지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무라카미 류와 같은 작가에서부터 모닝무스메와 같은 아이돌 문화까지 아우르는 일본 대중문화 전반과 소위 국민성이라 불리우는 집단 무의식적 부분들, 심지어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 만화업계, 일본의 정치 일선에 이르기까지 <제멋대로 카이조>는 모든 걸 패배자 정서와 막가파 정신으로 씹어버린다. 분명 이것은 대안이 보이지 않는 난감한 독설이긴 하지만 그 의미를 저버릴 순 없다. 적어도 <제멋대로 카이조>는 소위 오타쿠 만화들이 정말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까발려버리는 진지함을 갖추고 있다.

난감하다....


나름대로는....

<소타군의 아키하바라 분투기>는 무척 애매모호한 작품이다. 이것은 <현시연>에서의 발상을 빌려오면서 <남자는 불끈불끈>의 상상력을 집어넣었지만 감정의 흐름을 다루는 작가의 미숙함이 오타쿠 문화에 대한 자극성 있는 노출증과 섞여서 어중간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일종의 후유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라이센스 발매 예정이라는 또하나의 오타쿠 관련 작품. 물론 여기서 말하는 NHK는 <카드캡터 사쿠라>의 첫 방영 채널이자 욘사마 열풍으로 무너지는 가세를 세워보려했던 저명한 공영방송 NHK가 아님은 물론이다.... 

 

PS.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자랑스럽게도-_- 본격적인 오타쿠 소재 만화가 등장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인조차 그림만 보고서 훌륭한 모에도를 자랑한다고 감탄했던 그 물건!-_- 개인적으론 우리나라에 (자칭 타칭 통합) 재림 예수가 40명이라는 통계 조사를 봤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어이없음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eele 2008-05-2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메타 팬으로서. 네기마와 같은 출판사/잡지(강담사 소년매거진)에 들어간 건 절망선생부터입니다. 카이조까지는 계속 소학관 소년선데이에서 작품활동을 했지요 예.

hallonin 2008-05-2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게끔 한 지적 고맙습니다. 정말 간만에 보고선 뭔가 피식거리게 만든 옛글이네요.
 

미루고 미루던 R.O.D의 OVA를 드디어 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 예정된 수순이라니.... 


요미코 리드먼. 이름에서부터 풍겨오는 즐거운 유희. 그러나 거기까지다.

미리 얘기해두건데 나는 쿠라타 히데유키가 쓴 라이트 노벨 원작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읽을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내가 미디어믹스의 법칙을 따라 사방팔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한 것은 코믹스판으로 나왔던 R.O.D였으며 그 버전이 준 실망감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오늘 드디어 증명되어버렸지만.

애니메이션화된 결과물보다도 더 엄한 먼치킨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 받는 소설판. 게임은 끝났다.

R.O.D는 독서광이자 책수집광이며 종이술사 '더 페이퍼'인 요미코 리드먼을 축으로 그녀가 대영 도서관 특수공작부에 소속되어 벌이게 되는 작전들, 임무들, 소일처리 등등의 직업활동 및 취미 활동들을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환상적이면서도 신나게 그려내어 아이들 및 십대 소년 소녀들의 호주머니를 갈취해낸다는 철저한 목적의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도서관 사서 스타일의 캐주얼들과 안경 미소녀. 고서 수집을 빙자한 난잡하고도 어지러운 서적들의 등장. 마치 퍼즐처럼 고도화된 스토리와 메타포들. 그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서적사적 이야기가 다중텍스트적 면모를 보임과 동시에 보르헤스까지 넘나드는 허구적 리얼리티의 구축과 텍스트 농담들의 환상적 제례. 자뻑 증세 150%라도 좋다, 독서광 수퍼 히어로의 두뇌게임과 라파엘 전기적 싸구려티 약간 포함의 모조 클래식함이 넘치는 중후한 센스가 살아있는 스팀 펑크적 세계!

...를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저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리고 완전한 시간낭비라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으니까.

읽고 나서 그 충격적인 전개와 양상에 할 말을 잃어버려야했던 코믹스판. 작가는 <헬싱>의 작가인 히라노 코우타와의 오랜 동인지 작업과 다수의 에로만화들로 유명한 綾永らん. 그의 메이저 전작인 <론울프>는 은근한 쇼타 분위기만 슬금슬금 드러내기만 할 뿐... 그뿐인 심심쩝쩝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작품과 관련된 것들을 감상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욕심을 최대한 버려보려고 애썼다. 이것은 그저 만화다, 애니다, 대단한 걸 바라지 말자 이것은 그저 딱 십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진 세계 속에서 종이를 다루는 30살 먹은 (타칭) 독서광 노처녀가 나와서 벌이는 활극이다....

그래도 못 참겠다-_-

이 작품이 충격적인 점이라면 그 좋은 소재들과 그 멋진 설정들을 준비해놓고도 만들어진 상품은 솜사탕 겉만 발라낸 듯 부실하고 뻔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캐릭터인 요미코 리드먼은 동인에서 통용되는 소위 안경미소녀의 특징들을 차용해오며 자연스럽게 생성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 속에서 제법 독특한 캐릭터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멍청해 보이지만 똑똑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느릿하지만 나름의 개그 센스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종이를 다루는 그녀의 능력은 생뚱맞음이 아니라 서적의 내용과 결합되는 시스템 상의 고도화를 통해 생뚱맞음을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캐릭터 자체가 가진 설정 상의 응용가능성의 다양함이 제대로 된 스토리 라이터와 만났을 때 이뤄질 수 있는 '그랬을지도 모르는' 행복한 결과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으로 이 이야기는 그런 설정상의 요미코 리드먼의 매력이란 걸 거의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어중간하고 별 매력도 없는 전형성을 보이고 있으며 솔직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게 만들어주는 심각한 캐릭터다. 그에 덧붙여 그녀의 캐릭터적 전통인 트랜드화 되어있던 안경 미소녀의 법칙에서 끌어온 요소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지는 탓에 이야기에서조차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육화된 특징들만이 돋보인다는 것이 나의 충격의 요지였다(독서광이라는 그녀는 머리를 거의 쓰지 않는다. 사실 머리를 쓸 시추에이션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뻔한 내러티브의 연속들에서 그녀는 자신이 부리는 종이와 몸의 활극에 집중하며 그 활극마저도 상당히 허약한 동선을 보이기 때문에 별 박력을 느끼기가 힘들다).

물론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지만 R.O.D가 노리는 소비자층은 적당하게 새로운 감각을 갖춘 대중문화 상품을 원했던 상당히 무난한 수준의 소년소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가츠시카 호쿠세이가 아니다. <마스터 키튼> 정도의 매끈한 정보세공능력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우스운 일이다(슬프게도 이 작품에서 가끔씩 이야기의 베이스를 이루는 역사적-현상적 소스란 것들의 수준은 심히 안타까운 수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작품이 모욕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 본연에 가졌을 기대감에 대한 반작용의 정도이다. 옷을 보라. 사서다. 사서복장이란 말이다! 그런데다 쏟아지고 날아다니는 책들의 이미지와 그것이 상징하는 정보의 홍수. 주인공은 수퍼 히어로. 도서관이라는 매니악한(우리들의!) 공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적과 정보의 시너지, 이것이 (영국, 일본 대중문화가 가진 그놈의 영국병-_- 이 부분도 어지간한 매너리즘으로 다가온다.... 감안하도록 하자 일단.)수퍼 히어로라는 가장 성공적인 대중문화 산물과의 결합을 추구할 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상상했으면 좋았겠느냔 말인가.

그러나 모조리 빗나갔으므로 그만 두기로 하자....

 

결론, 안 보는 게 좋다. 당신의 시간을 위해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렌초의시종 2005-01-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갈께요.

hallonin 2005-01-0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드립니다.
 

 

1. 길

'삼포 가는 길'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길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란 걸 천명한다. 길은 천성적으로 예외적인 공간이다. 오래 전부터 길은 인생을 상징하는 삶의 축소판과 같은 공간인 동시에 과정인 자리였고 그것은 이 '삼포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길은 예정된 미래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정처 모를 강제된 시간의 연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마주하게 된 영달이 길 위에서 머뭇거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영달은 착암기 기술자이며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뜨내기 노동자다. 그는 지내던 밥집 아낙과 통정을 벌이다 남편에게 들켜서 밥값도 떼먹어가며 허겁지겁 달아난 처지다. 그런 그가 비슷한 처지인 정씨를 만난다. 그러나 정씨와 영달은 다른 점이 있다. 영달에게 있어 길은 예정되지 않은 행로이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잡는 수단이 되는, 아무런 낭만도 강렬한 목적도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정씨에게 길의 의미는 그와 달리 분명한 목적, 고향인 삼포로 가야한다는 확고한 목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정씨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영달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신을 깨닫고 정씨의 길에 자신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로선 어디로 가나 상관이 없는 몸이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여기서 영달이란 사람의 성품-정이 많은 성격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소설은 머뭇거림 없이 무척 빠르고 직설적으로 달려온다.

길은 공감을 얻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같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 사람은 상대와 마음을 통하게 된다.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온 이야기는 길에서 삼포로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차분해진다. 영달과 정씨는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통해 서로에 대한 공감대를 쌓아간다. 영달과 정씨는 실상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뿌리를 잃은 채 떠돌고 있던 두 사람은 금새 서로에게 융합된다. 그 둘의 차이는 정씨가 도착해야 할 고향이 있다는 그 한가지밖에 없다. 정씨는 주로 듣는 입장으로 떠돌이인 영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한다. 영달이 주막에서 떠돌이인 자신에 대한 회한을 늘어놓을 때처럼.


"의리있는 여자였어요. 애두 하나 가질 뻔했었는데, 지난 봄에 내가 실직을 하게 되자, 돈 모으면 모여서 살자구 서울루 식모 자릴 구해서 떠나갔죠. 하지만 우리 같은 떠돌이가 언약 따위를 지킬 수 있나요. 밤에 혼자 자다가 일어나면 그 애 때문에 남은 밤을 꼬박 새우는 적두 있읍니다."
 정씨는 흐려진 영달이의 표정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사람이란 곁에서 오랫동안 두고 보지 않으면 저절로 잊게 되는 법이오."


그들은 길을 우회해가면서 마치 운명처럼(물론 도식성의 위험이 있다) 나머지 한 명의 동료이자 떠돌이를 만나게 된다. 백화라는 이름의 작부는 정씨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 여자다. 오랜 시간을 고향을 떠나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몸을 팔던 그녀는 두 남자와 이형동체인 인물이다. 그녀 또한 길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는다.


 걸을수록 백화는 말이 많아졌고, 걸음은 자꾸 쳐졌다. 백화는 여러 도시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이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자가 결론지은 얘기는 결국 화류계의 사랑이란 돈 놓고 돈 먹기 외에는 모두 사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 보퉁이를 꾹꾹 찌르면서 말했다.
 "아저씨네는 뭘 갖구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헌 속치마 몇 벌, 빤스,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


물론 그녀도 이렇게 그들처럼 정신적으로 노회하고 지친 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소위 막달라 마리아형 여자,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창녀이자 성녀인 구원의 상징을 답습하는 인물이다. 길 옆 초가에서 쉬게된 어느 날 밤, 그녀는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날인 군인 죄수 여덟명과 차례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짧지만 충실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일은 이후 그녀가 군부대 주위를 전전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녀 또한 속아서 팔려온 몸이었지만 자신만큼이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줬던 여자였다. 이것은 이후의 두 남자가 그녀에게 하는 행동에 대한 복선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남자는 자신들보다 나은 인간의 모습을, 같은 떠돌이이자 풀뿌리 인생이면서도 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닌 모습을 여기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달은, 그리고 정씨는 역에서 모자란 여비를 보태 그녀를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붙잡을 수도, 같이 갈 수도 있었던 영달은 그녀를 포기한다. 이 부분은 짧고 건조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영달이라는 인물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달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 백화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가 예전의 연인을 포기했던 것과 같은 결과가 반복된 것이다. 끝내 영달은 떠돌이로서의 삶을 택한다. 그런 그에게 백화는 자신의 본명을 가르쳐준다. 점례라고 하는, 그 옛날 농촌에선 흔했을 이 촌스러운 이름이 도시에서 백화라는 제법 작부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작품이 전해주는 사회 현실에 대한 표식이다. 그리고 고향에서나 쓰일 이 이름을 남자에게 알려줬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상징하는 바이기도 하다.

변하는 현실에 대한 상실감은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어야 할 자리에서 급격하게 몰려온다. 정씨는 옆자리 노인에게서 자신의 고향인 삼포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듣고 망연자실해 한다. 나룻배와 바다로 그려지던 고향에 대한 인상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는 데서 부서져 내린다. 한순간에 정씨는 영달과 다를 바가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래서 공사판이 들어섰다는 소리에 되려 안심하는 영달에 비해 정씨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길을 따르는 여정은 끝이 난다. 누가, 어디로 가게되었는지조차 모르게.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 삼포

삼포는 가상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고 그 와중에서 자신들의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을 귀향할 장소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성을 획득한다. 실제로 작중에선 삼포에 대한 묘사가 막연하게 바닷가라는 것과 흐릿한 인상 정도로 그치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목적으로써 제목 자체로 삼포는 강한 구심력을 갖고 그 자리에 있다. 그러한 보편적 상징의 존재는 작품의 보편성에 힘을 실어 리얼리티에 대한 힘을 강화해준다. 삼포를 당시 급변기의 한국 사회에 대한 메타포라고 하면 그곳을 향해 가는 영달과 정씨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계급을 상징함과 동시에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보편적 초상으로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영달과 정씨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한 초상이다. 그들은 공사판 노동자인 것이다. 즉, 그들이 도시를 만든 이들이다. 밭을 흙으로 메우고 산을 자르고 시멘트를 바르고 바위를 깨고 모래를 뿌리고 벽돌을 나르면서 건물을, 도시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또한 이후로도 그들은 그런 '공사판'이 있어야 먹고 살 것이며 그런 자리, 즉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곳을 찾아서 헤매 다닐 것이다. 그래서 영달과 정씨의 초상엔 단순히 소외된 노동계급을 아우를뿐만 아니라 도시화의 공범이면서 도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정처 없는 모든 현대인의 표상으로 승화될 복합성이 있다.


3. 말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현대 사회의 소외현상에 대한 메타포로 보기 이전에 리얼리즘 문학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건 바로 그들의 대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인물들은 일반적인 현대인이라기보다는 소외된 밑바닥 계층에 속하며 영원히 떠도는 이들이다. 그 원인은 도시화를 축으로 한 급격한 사회의 변화 과정에 있으며 그것에 책임이 있는 것 또한 그들이라는 건 앞서 지적을 했다. 그렇다. 그들은 '잃어버려서 바닥에 이른 이들'이다. 그 현실성을 체득하기 위해 작품은 저잣거리의 육담과 같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린다.


 "바가지한테 세금두 내구, 거기두 줬겠구만."
 "뭐요? 아니 이 양반이......"
사내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껄껄 웃어제꼈다.
 "거 왜 그러시나. 아, 재미 본 게 댁뿐인 줄 아쇼? 오다가다 만난 계집에 너무 일심 품지 마셔."

 "군인들이 백화라면, 군화까지 팔아서라두 술을 마실 정도였으니까."
 뚱뚱이 여자가 빈정거렸다.
 "웃기네 그래 봤자 지가 똥갈보라. 내 장사 수완 덕이지 뭐. 그년 요새 좀 아프다는 핑계루...... 이건 물을 긷나, 밥을 제대루 하나, 손님을 받나, 소용없어. 그년두 육 개월이면 찬샘 바닥서 진이 모조리 빠진 거예요. 빚이나 뽑아 내면 참한 신마이루 기리까이할려던 참이었어. 아, 뭘해요? 빨리 가서 역을 지키라니까."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봬도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조용히 시골 읍에서 수양하던 참인데...... 야아,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국으로 가만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두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구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머. 벌써 그럴 줄 알구 감천 가는 길루 왔지요. 촌놈들이니까 그렇지, 빠른 사람들은 서너 군데 길목을 딱 막아 놓아요. 나 그 사람들께 손해 끼친 거 하나두 없어요. 빚이래야 그치들이 빨아먹은 나머지구요. 아유, 인젠 술하구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밑이 쭉 빠져 버렸어.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 냉수에 목욕재계 백 일이면 나두 백화가 아니라구요, 씨팔."


저런 인물들이 저런 상황이면 대체 어떻게 말할 것인가. 작가는 그 원칙을 아주 충실히 지켜서 인물들의 말투 하나하나는 작품의 인물들이 바로 그 삶,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단순히 비속어라고 하는 수단이 주는 거칠음에 대한 미감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그네들의 험난한 삶에 대한 스펙타클한 표상이 되어준다. 이것은 작가가 60년대 말 대학생 시절 전국을 무전여행하면서 만났던 소설 속의 인물과도 같은 사람들에서 획득한 것으로 가상적인 공간성과 도식적인 메타포로 인해 자폐적이고 감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는 소설을 리얼리티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4. 길

이 작품은 두드러진 상징성을 아우르는 작가적 감수성과 사회의식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가 결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절충으로 보기 힘든 것은 스타일에 있어서 간략함과 냉정함이 결합된 문장의 분명한 맺고 끊음과 감상적 서술에의 절제가 독자로 하여금 감상주의의 도입을 거부케 하는 단절의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무척 급작스러운 느낌을 주고 또 세 남녀가 서로에게 가지는 공감대와 융합에의 감정이입이 의식적으로 축소되어 표현됐다는 인상을 준다.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하지만 그것은 압도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대항하는 작가의 대안이 부재함에 따른 반성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연민과 허무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힘든 작품의 기조는 자칫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싸구려 감상주의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냉정한 서술상의 태도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작품 곳곳에서 보이는 급작스러움만큼이나 마지막에 찾아올 허무와 상실의 슬픔 또한 증폭시켜준다.

길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지만 영달과 정씨, 백화의 길은 그 끝에 도달하기도 전에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공범으로서 존재해온 그들이 정작 고향을 찾고 싶게 되었을 때 깨닫게 된 고향의 붕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 미래에 반드시 다가오고 말 듯 한 운명적인 결과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이러니컬한 공범자의 운명에 대한 위로이자 끊어질 길에 대한 예언적 동화처럼 보인다. 살에 와닿는 듯한 직접성과 현실감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 더욱 쓴맛이 느껴지는 진실로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