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루던 R.O.D의 OVA를 드디어 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 예정된 수순이라니.... 


요미코 리드먼. 이름에서부터 풍겨오는 즐거운 유희. 그러나 거기까지다.

미리 얘기해두건데 나는 쿠라타 히데유키가 쓴 라이트 노벨 원작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읽을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내가 미디어믹스의 법칙을 따라 사방팔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한 것은 코믹스판으로 나왔던 R.O.D였으며 그 버전이 준 실망감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오늘 드디어 증명되어버렸지만.

애니메이션화된 결과물보다도 더 엄한 먼치킨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 받는 소설판. 게임은 끝났다.

R.O.D는 독서광이자 책수집광이며 종이술사 '더 페이퍼'인 요미코 리드먼을 축으로 그녀가 대영 도서관 특수공작부에 소속되어 벌이게 되는 작전들, 임무들, 소일처리 등등의 직업활동 및 취미 활동들을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환상적이면서도 신나게 그려내어 아이들 및 십대 소년 소녀들의 호주머니를 갈취해낸다는 철저한 목적의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도서관 사서 스타일의 캐주얼들과 안경 미소녀. 고서 수집을 빙자한 난잡하고도 어지러운 서적들의 등장. 마치 퍼즐처럼 고도화된 스토리와 메타포들. 그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서적사적 이야기가 다중텍스트적 면모를 보임과 동시에 보르헤스까지 넘나드는 허구적 리얼리티의 구축과 텍스트 농담들의 환상적 제례. 자뻑 증세 150%라도 좋다, 독서광 수퍼 히어로의 두뇌게임과 라파엘 전기적 싸구려티 약간 포함의 모조 클래식함이 넘치는 중후한 센스가 살아있는 스팀 펑크적 세계!

...를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저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리고 완전한 시간낭비라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으니까.

읽고 나서 그 충격적인 전개와 양상에 할 말을 잃어버려야했던 코믹스판. 작가는 <헬싱>의 작가인 히라노 코우타와의 오랜 동인지 작업과 다수의 에로만화들로 유명한 綾永らん. 그의 메이저 전작인 <론울프>는 은근한 쇼타 분위기만 슬금슬금 드러내기만 할 뿐... 그뿐인 심심쩝쩝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작품과 관련된 것들을 감상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욕심을 최대한 버려보려고 애썼다. 이것은 그저 만화다, 애니다, 대단한 걸 바라지 말자 이것은 그저 딱 십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진 세계 속에서 종이를 다루는 30살 먹은 (타칭) 독서광 노처녀가 나와서 벌이는 활극이다....

그래도 못 참겠다-_-

이 작품이 충격적인 점이라면 그 좋은 소재들과 그 멋진 설정들을 준비해놓고도 만들어진 상품은 솜사탕 겉만 발라낸 듯 부실하고 뻔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캐릭터인 요미코 리드먼은 동인에서 통용되는 소위 안경미소녀의 특징들을 차용해오며 자연스럽게 생성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 속에서 제법 독특한 캐릭터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멍청해 보이지만 똑똑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느릿하지만 나름의 개그 센스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종이를 다루는 그녀의 능력은 생뚱맞음이 아니라 서적의 내용과 결합되는 시스템 상의 고도화를 통해 생뚱맞음을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캐릭터 자체가 가진 설정 상의 응용가능성의 다양함이 제대로 된 스토리 라이터와 만났을 때 이뤄질 수 있는 '그랬을지도 모르는' 행복한 결과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으로 이 이야기는 그런 설정상의 요미코 리드먼의 매력이란 걸 거의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어중간하고 별 매력도 없는 전형성을 보이고 있으며 솔직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게 만들어주는 심각한 캐릭터다. 그에 덧붙여 그녀의 캐릭터적 전통인 트랜드화 되어있던 안경 미소녀의 법칙에서 끌어온 요소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지는 탓에 이야기에서조차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육화된 특징들만이 돋보인다는 것이 나의 충격의 요지였다(독서광이라는 그녀는 머리를 거의 쓰지 않는다. 사실 머리를 쓸 시추에이션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뻔한 내러티브의 연속들에서 그녀는 자신이 부리는 종이와 몸의 활극에 집중하며 그 활극마저도 상당히 허약한 동선을 보이기 때문에 별 박력을 느끼기가 힘들다).

물론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지만 R.O.D가 노리는 소비자층은 적당하게 새로운 감각을 갖춘 대중문화 상품을 원했던 상당히 무난한 수준의 소년소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가츠시카 호쿠세이가 아니다. <마스터 키튼> 정도의 매끈한 정보세공능력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우스운 일이다(슬프게도 이 작품에서 가끔씩 이야기의 베이스를 이루는 역사적-현상적 소스란 것들의 수준은 심히 안타까운 수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작품이 모욕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 본연에 가졌을 기대감에 대한 반작용의 정도이다. 옷을 보라. 사서다. 사서복장이란 말이다! 그런데다 쏟아지고 날아다니는 책들의 이미지와 그것이 상징하는 정보의 홍수. 주인공은 수퍼 히어로. 도서관이라는 매니악한(우리들의!) 공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서적과 정보의 시너지, 이것이 (영국, 일본 대중문화가 가진 그놈의 영국병-_- 이 부분도 어지간한 매너리즘으로 다가온다.... 감안하도록 하자 일단.)수퍼 히어로라는 가장 성공적인 대중문화 산물과의 결합을 추구할 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상상했으면 좋았겠느냔 말인가.

그러나 모조리 빗나갔으므로 그만 두기로 하자....

 

결론, 안 보는 게 좋다. 당신의 시간을 위해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렌초의시종 2005-01-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갈께요.

hallonin 2005-01-0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