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없는 웰메이드의 풍경 <음란서생>
[음란서생]을 관통하는 최고의 화두는 역시 정빈(김민정)의 몸이다. 그녀의 몸이-속살이-과연 비치는가 안 비치는가에 대한 논의가, 혹은 욕망이 하나의 화두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위의 안시환의 비평에서도 충분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바, [음란서생]을 슬랩스틱 코미디인 줄 알고 본 이들이나 김대우의 시나리오를 먼저 접하고 그 문학적 스위치들을 어떻게 가동시키나 궁금해했던 사람들이나 정빈이라는 키-이미지의 체현에 적잖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시환은 영화의 웰메이드적인 고상한 취향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영화의 진정한 음란함을 저버렸다고 비판한다. 과연 김민정의 홀딱 벗은 몸이 스크린 위에 장대하게 펼쳐지지 않은 이유가 나무액터스와 제작사와의 속살 노출 퍼센티지 계약 때문만이었을까.
[음란서생]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이 영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중에서 윤서(한석규)의 소설에 내려지는 황가의 비판, '뭔가 있는 척, 내려다보는 느낌'이라는 것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윤서는 그 비판을 듣고 그런 자신의 필체를 바꾸는가? 그는 되려 인기작가인 인봉거사의 것과 차별화되야 한다고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제까지 없었던 완전히 다른 영역을 개척해내는데 바로 자신의 글에 춘화를 삽입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블루오션이란 게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작가성을 지키는데 주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을 보장받고 싶었던 정치적으로 좌절한 유생이었던 윤서의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 [음란서생]이 (수많은 이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도저히 음란해질 수 없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영화 속에서 현실의 욕망은 계속 꺾여나가고 그 빈 자리는 화려한 탐미적 감각의 미술들로 채워진다. 그러니까 정빈의 몸은 오직 망상만으로 스스로를 존재케 했던 윤서의 영원한 공상과도 같은 영역이며 닿지 못할 신천지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윤서는 끊임없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닿았을 때 자신이 맛봐야 할 공허감이. 현실에서의 실패에 대한 위로가 가능한 곳에서마저도 맞이하게 될 두려움이. 닿지 못하기에 영원히 향유가 가능한 망상을 할 수 있는 축복을 그가 과연 저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윤서의 태도가 바로 [음란서생]이란 영화가 가지는 그 머뭇거리는 태도, 영원히 닿지 못할 영역에의 갈구라는 욕망을 보장시켜준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문학 속 궁정식 사랑이 보여주는 끝없는 마조히즘적 욕망과 일치하는 이 긴장감으로 채워진 관계는 플로토닉한 사랑의 기이한 고착을 불러온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이뤄지는 윤서와 정빈의 대화는 이 미묘한 알레고리들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구속과 욕망, 강요와 자발적 의지, 진심과 망상, 겉과 속이 마구 뒤얽히는 두사람의 대화는 어떤 면으로 보면 영화 전체를 지배하던 알레고리들의 동시다발적인 폭발과도 같다.
[음란서생]의 주모티브가 정치적 실패자의 대리만족을 위한 본능적인 끌림의 공간으로서 음란소설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는 것은 그 글쓰기라는 행위와 결합된 성적인 추구라는 것이 본능의 한 영역이라는 것을 보장하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윤서 또한 가명으로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내놔야 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음란한 것을 쓴다는 행위의 사회적 인식의 천박함을 이기지 못한 작가들은 혹여나 가명으로도 못 막고 드러나게 된 자신의 행위 앞에 '돈 벌려고'라는 핑계를 다는데 무척 익숙했다. 더군다나 돈을 벌기 위해 그런 소설을 썼다는 것은 인간극장풍 작가의 눈물 배인 직업쟁취기의 훌륭한 양념이 된다. 심지어 저 사드마저도, 라 퐁텐을 잇는 풍속소설가로서의 야심과 기이한 성적 환상의 세계에 빠진 자신을 구분했다. 얌전해 빠졌던 첫번째 쥘리에트의 이야기를 뒤이어 그가 불운한 영감에 사로잡혀 써내려간 과격한 속편이 나와서 그 가학적인 이야기의 저자가 '풍속소설가' 사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을 때 그는 격렬하게 그 사실을 부정해버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음란함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본능적인 것이다. 외설소설들의 더미 속에서 때론 도저히 돈 벌기 위해서 그랬다고 보긴 힘든 문체와, 성찰과, 열정으로 가득한 소설들을 찾게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저명한 작가들의 음란한 소설들은 필명을 타고 흘러나왔되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일반에겐 공개되지 않은 것들도 수두룩하다. 역으로 사례를 찾아보자면 도스또예프스키도 원고료를 한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글을 줄줄 늘리곤 했었다. 그러니 어찌 생각해보면 음란소설들 앞에 붙는 작가의 궁색한 변명인 '돈 벌기 위해'라는 수사는 적절하게 무시해버려도 될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것도 80년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외설소설을 쓰고 싶어서 썼다고 나왔던 작품이 있었다. 장정일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음란서생]이 끝까지 김민정의 벗은 몸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소설 또한 끝까지 외설서적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이다(아울러 이후 장정일의 작품 목록에서 언제나 빠져있게 될 운명 또한 타고났다). 장정일이 실제로 겪었던 소년원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동성애적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일단 구성상으로서도 뒤로 갈수록 힘을 잃어버리는 작가의 필력(장정일은 구상을 안하고 소설을 쓴다고 했는데, 그 습관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과 전개의 무리함, 그리고 메타소설적 구조의 번잡함과 유치함이 총체적인 균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을 제하고, 오직 외설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장정일을 보자면 그는 이 작품을 '꼴리게' 만드는데 실패한다. 이것은 애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소위 야오이 커뮤니티와 게이 커뮤니티에서 생산되는 일련의 동성애 포르노 소설들은 장정일이 만들겠다던 그 외설적 영역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공간과 상황, 일련의 전통적 코드들이 부여하는 구속과 강제성과 그 틀 속에서 꿈틀거리는 남성상에 대한 지독한 매혹 때문에 그 소설들은 철저하게 소비적이며 잔인할 정도의 가학성과 자기동일화를 몸소 실천해보이고 있다. 장정일은 애초에 소년원이란 속박적인 공간에 전혀 애정을 느끼지 않는 이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폭력은 알레고리를 향한 폭력으로 결정지어지지 결코 그 폭력적인 공간, 혹은 혹자의 눈에 따라선 애정행각의 잔치판일 폐쇄공간을 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1인칭 화자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관조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 뒤로 갈수록 점점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묘사는 뒤로 갈수록 간소화되고 그에 따라 지루해지며, 결국 작가는 인물들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작품을 끝낸다.
어제는 침팬지의 사촌쯤 되는 보노보들의 생활을 담아낸 책을 읽어냈다. 프리섹스주의자인 이 히피스러운 유인원들은 섹스로 모든 트러블을 해결하는 멋진 짐승들이다. 그러니까 그 수많은 외설서적 작가들이 도달하고자 하면서도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이 바로 여기에 펼쳐져 있었다. 구속이라는 장치에 마조히즘적 쾌감을 안고 기꺼이 뛰어들어 극단적인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낸 사드가 보노보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면(물론 글도 쓸 줄 아는 보노보라는 전제가 있어야겠다) 결코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리라. [까트린 M의 성생활]의 섹스에 대한 해부학적 서술들을 기억하시라. 인간은 욕구불만일 때야 천국을 꿈꾸는 법이니.